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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Mar 31. 2023

아름다움을 논리로써 이해할 수 있을까?

고집쟁이의 영화추천 : (1) 베니스에서의 죽음

제목 : 베니스에서의 죽음

감독 : 루치노 비스콘티

연도 : 1971년

런닝타임 : 2시간 10분

이런 사람에게 추천해요! : 지겨워도 잘 견디는 사람, 연애 극초반이라서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 명화나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동성애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 지드래곤, 티모시 샬라메같은 미소년이 취향인 사람들




나는 사랑을 싫어한다. 아니, 그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에 빠진 나를 싫어한다. 

하물며 술 취해서 혀 꼬인 모습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데. 어색하게 허둥대는 모습은 참도 좋아하겠다.

 

몇 번의 실패한 관계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랑에 빠질 때는 손끝으로 물 온도를 확인하고, 발부터 담가보고. 체조를 꼼꼼히 마친 후 천천히 입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심도 모를 수영장에 머리부터 먼저 다이빙하는 나는 사랑으로 인해 멍청한 선택을 참 많이 했다.


예시를 들어보자면, 중학교 때 좋아하는 선배가 다닌다는 이유 하나로 지원할 고등학교를 결정했다. 그 학교는 봄에 학교 투어를 했다. 그 선배를 마주칠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그전 날 밤부터 그날 아침까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가슴이 두근댔다. 계단을 걸어내려 가다가 마주치지 않을까? 눈을 마주쳤을 때 웃으면서 인사해 줬으면 좋겠다. 아니야, 오히려 당황하며 허둥대는 모습이 더 귀여울 수도! 

화장품이라고는 (지금 생각해 보니 내 피부 톤과는 상극인) 주홍색 차차틴트밖에 없었지만, 전 날 유튜브에서 본 것처럼 입술 중심에서 시작해 점점 주변으로 번져가도록 열심히 입술에 올려봤다. 거울을 쳐다보며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봤다.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때 살짝 놀라며 웃는 표정, 대화를 나눌 때 눈을 올려다보며 차분히, 그렇지만 생기 있게 대답하는 표정.

결전의 날이 다가왔을 때,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각오까지 한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오빠가 페레로로쉐와 응원한다는 쪽지를 들고 손을 흔들며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다.

엄마는 아직도 10년 정도 지난 그때를 회상하시며 거의 눈물이 날 정도로 깔깔 웃으신다. 몸은 얼고, 얼굴은 새빨개져서 목소리 톤은 점점 올라가는 내 모습을 봤다면, 주변 2m 반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그 오빠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거라며.


연기가 나면 불이 난 것을 알듯, 배가 꼬르륵대면 배고픈 것을 알듯. 난 나 자신을 싫어하기 시작하면 사랑에 빠진 것을 자각하게 된다. 내 멍청한 뇌가 되뇐다. 

“그냥 날 사랑해 줘. 지금은 네가 잘생기고 인기가 많고 마음만 먹는다면 사귈 수 있는 여자도 그만큼 많겠지만… 날카로운 턱선에 눈이 반짝이는 너도, 뚱뚱한 몸에 어색하게 웃는 나도 언젠가는 쭈그렁 늙은이가 될 거잖아. 지금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커리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움, 똑똑한 머리는 모두 의미가 없어질 거잖아. 그 모든 게 의미가 없어질 때까지만 날 사랑해 주면 안 될까?”


나는 처음 같은 어린이집의 재우를 좋아한 순간부터 직감했던 것 같다. 사랑을 하는 것은 일종의 머슬 메모리(muscle memory) 같은 기술일 수도 있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저 현상이라는 것을. 절대적인 사실이고 진리이고 추악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이 영화의 주인공 아셴바흐는 젊고 아름다운 소년인 타지오에게 빠졌을 때, 순간의 부끄러움을 감내할 뿐인 나보다 더한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본능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신념의 근간이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이다. 


아셴바흐는 천재적인 음악 교수이다. 흰 중절모와 깔끔하게 다듬어진 콧수염, 적당한 풍채에 교양 있는 말투로 이야기하는 그를 처음 마주친 사람들은 그를 전형적인 신사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셴바흐의 머릿속에서는 잠재워지지 않는 갈등이 있다. 작중 자주 등장하는 친구와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친구는 아셴바흐에게 예술이란 ‘그저 존재’하는 아름다움이라고 역설한다. 도덕과 규율이라는 틀에 갇혀서,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기는커녕 인정하지도 못한다며 화를 낸다. 아셴바흐는 계속해서 친구의 말을 부정한다.


“이봐, 가끔 나는… 예술가들이 어둠 속에서 활을 겨누는 사냥꾼 같아. 표적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맞춘 건지도 모르지. 현실은 그 표적을 밝혀 주고 명중을 도와주지 못해. 미와 순수의 창조는 정신적인 행위야.”
“아냐, 구스타프. 미는 오직 감각에 속하는 거야. 오직 감각에만! 감각을 통해서는 정신에 도달할 수 없어.”
“그럴 수 없어, 오직 감각을 완전하게 지배하게 될 때만이 성취할 수 있어. 지혜, 진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혜? 인간의 존엄성?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어? 천재성은 신이 주는 선물이야.”
“아니, 신이 주는 재앙이지. 타고난 재능의 사악하고 병적인 불꽃. 난 예술의 악마적인 힘은 믿지 않아!”
“틀렸어. 악은 필수야. 천재의 양식이야.”


그러던 중 아셴바흐는 베니스로 떠나게 된다. 아셴바흐는 호텔 로비에 앉아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조그마한 양산과 흰색 레이스가 목까지 올라오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들,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섞어가며 조잘대는 어린아이들, 새끼손가락에 청키 한 반지를 끼고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며 신문을 읽는 신사들. 그러다 시선에 타지오에 멈춘다. 

타지오는 최근 흥행했던 공포영화 “미드소마”의 초반부에 아내와 동반 자살하는 할아버지 역할을 맡은 비에렌 안드레센이 젊었을 적에 연기했는데… 얼굴로 충분히 줄거리에 개연성이 생긴다. 우아하게 마른 몸매에 흰 피부와 금발, 세상만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한 여유로운 눈빛은 다 큰 어른들은 낼 수 없는 깨끗하지만 고귀한 분위기를 낸다. 비에렌 안드레센이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일본 만화에서 피에르의 모델이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라는 다큐먼터리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보통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거나, 좀 더 마음이 약하다면 어색하게 목소하겠지만, 타지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아셴바흐를 지그시 바라본다. 카메라는 타지오의 얼굴에 줌인한다.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주인공의 감정에 몰입하기 쉽다는 점이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상당히 심미적인 편이다. 모든 장면이 아름답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처럼 짜임새가 신박하거나 웨스 엔더슨 영화처럼 무대 세트가 떠오를 정도로 짜임새 있지는 않지만, “클래식 음악에 뮤직 비디오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제임스 아이보리의 “전망 좋은 방”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클로드 모네가 “그림으로 표현하기에는 이 도시는 너무나 아름답다”라고 했을 정도로 절경인 베니스가 배경이고, 화면이 전반적으로 스노우 필터를 씌운 것처럼 로맨틱하게 뿌옇다. 그리고 말러의 심포니 제5번이 아셴바흐의 감정선을 따라서 테마곡처럼 흘러나오는데, 지금도 들으면 가슴이 울렁일 정도로 영화와 잘 어울린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듣는 중이다.) 그래서 첫눈에 반하는 조금은 비현실적이고 납득하기 어려운 전제일 수도 있지만, 아셴바흐의 시선을 따라가고 음악을 들으며 보다 보면 그의 감정에 동화된다. 


중년의 아셴바흐는 다시 십 대 소년이 된 것처럼 타지오의 흔적을 좇는다. 타지오가 해변에서 놀고 있으면 따라서 간다. 친구와 모래 위에서 몸싸움을 하면 분노한다. 그 친구와 화해하고 어깨동무를 한 채 해변을 산책하는 모습을 보며 질투한다. 나이 차이도, 성별의 장벽도, 서로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은 타인이라는 사실도 절대적인 아름다움,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인 예술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도덕과 규율의 틀이 무용지물이 된다. 사랑에 빠지며 자신을 비판하던 친구의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동의하지 않았을까?


“그 완고한 도덕 기준 때문이지! 자네의 행동도 음악만큼 완벽하기를 바라는 거야. 조금만 헛디뎌도 큰일이 나고 돌이킬 수 없이 더러워졌다고 생각하지.”
“난 더러워졌어.”
“그렇지 않아! 자신의 감각에 기대어 구제할 수 없는 타락에 빠지는 것은 예술가에게는 기쁨이야! 건강하다는 것은 얼마나 건조한 일인가?”


호텔에 머무르며 아셴바흐는 이상한 점을 눈치챈다. 베니스 전역에서 방역을 진행하고 있고 당시의 보건복지부에서도 경고를 내리는데, 신문에서는 아무런 경고도 행동지침도 내려오지 않은 것이다. 호텔 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지금 베니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하고 물어도, “이 경고들은 무시하셔도 됩니다. 그저 조심하라는 주의에 불과하지요!”하는 무책임한 대답만 할 뿐이다.

아셴바흐는 결국 로비 직원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된다. 아시아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배를 타고 베니스에까지 상륙한 것이다. 그리고 관광업이 경제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기 대문에 신문사도, 호텔 직원들도 진실을 숨긴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셴바흐는 곧바로 타지오의 어머니에게로 달려간다.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은 사이지만 어떻게든 타지오를 살려야 한다. 차분한 성정에, 타지오만큼 우아한 어머니는 흥분해서 당장 베니스를 떠나야 한다고 주절대는 아셴바흐를 보고 처음에는 흠칫 놀라지만, 곧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며 떠날 채비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삼십 분 동안 아셴바흐는 타지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닌다. 그전에 미용실에서 일종의 메이크오버를 한다. 몇 가닥 남지 않은 젊음의 흔적을 절박하게 움켜쥔다. 얼굴에는 하얗게 분칠을 하고, 흰 머리카락 가닥들을 검게 물들인다. 입술에 빨간 루주를 바른 아셴바흐는 거울 속 자신을 쳐다보며 흡족한 듯 웃는다. 진지하고 천재적인 엘리트로만 보였던 아셴바흐의 얼굴은 이제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년이다. 두 볼은 붉고, 내적 갈등으로 항상 긴장했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진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 논리와 도덕은 무력하다. 아셴바흐는 바보가 되었다. 타지오와 해변을 걷고, 모래 싸움을 하고, 젊어지고 싶은 바보.


“모래가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이는 때는… 오직 마지막뿐이야. 그때까지는 생각할 가치가 없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셴바흐는 의자에 기대 해변에서 뛰어노는 타지오를 바라본다. 반짝이는 파도와 눈부신 하늘, 그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지평선에 아름다운 타지오가 놓여 있다. 물놀이를 하는 실루엣이 일렁인다. 아셴바흐는 눈을 믿을 수 없다. 타지오가 긴 팔을 들어 올려 인사를 하는 것이다. 착각일 수도 있고, 신기루일 수도 있다. 아셴바흐의 머릿속은 어질 하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신체는 전염병의 숙주가 되었다. 그는 힘겹게 손을 들어 인사를 따라 한다. 둘은 서로를 응시한다.

인생의 마지막 사랑을 응시한다. 얼굴에 덧바른 기괴하게 하얀 화장은 모자에 묻는다. 젊음이라는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 한 알이라도 잡기 위해 머리에 덮은 검은색 염색약은 녹아 흘러내려 흰 카라에 뚝뚝 떨어진다. 


사랑에 빠지면, 거대하고 대단한 그 사람 앞에서 나는 한없이 초라해진다. 아셴바흐, 재력과 천재성을 가진 늙은 예술가가 대화 한 마디 나눠보지 않은 아름다운 소년 앞에서 완전히 무너지듯 말이다. 사랑 앞에서 우리는 모두 무력해진다. 사랑 자체가 아름다움, 아름다움 자체가 사랑이었던 아셴바흐에게 그 마지막 사랑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불가항력이라고 믿고자 하는 희망과 자신의 모든 생각에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 오만함이 공존하는 것 같다. 사랑이 시작될 때에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내 사랑의 주도권이 손에서 벗어난 것 같다고 느끼게 되면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긴 하지만.

미쉘 푸코는 권력을 억압적인 개념이 아니라 생산적인 개념으로 봤다. 억압은 자유로운 생각을 할 여지를 줄인다. 완전한 자유는 오히려 폭력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이런 식이다 : 우리 모두에게는 신체적인, 정신적인 능력의 제한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난 원한다면 베니스로 가는 티켓을 끊어 아셴바흐의 발자취를 좇아볼 수 있다. 하지만 부모님이 낸 등록금이, 학교의 학사경고 제도가, 주변에서 보내는 기대의 시선으로 인해 학교에 나와 강의를 들을 수밖에 없다. 자유의 부재로 인해, 모든 행동과 선택이 제한됨으로 인해 나는 오히려 내면의 갈등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진 것이다.


머리부터 사랑에 다이빙하는 것에 익숙한 나는, 한 번도 내 사랑에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아셴바흐로 인해 한 번 고민해 보게 된다. 만약에 그의 주장처럼 사랑과 예술과 아름다움이 연구할 수 있는 일종의 과학이라면, 작은 분자 단위로 나눠 조절할 수 있는 논리의 연속이라면, 나는 사랑으로 인해 선택한 멍청한 행동들을 철회했을까?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을까? 떨리는 목소리와 빨간 얼굴을 한 채 멍청하게 웃지 않았을까?


아마 그건 아닐 것 같다. 사랑이라는 권력 하에서 나는 푸코의 주장처럼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생산적이어지고, 행복해졌다. 

그렇기에 나는 또 얼굴을 희게 칠하고 머리를 염색한다. 해변에 누워 나의 타지오를 바라보기를 고대한다. 떨리는 목소리와 빨간 얼굴로, 또 머리부터 다이빙할 준비를 한다. 나의 신념을 바꿀 사랑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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