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앙떼뜨망 Jul 13. 2023

누구의 탓도 아니기엔 너무 아파요

고집쟁이의 영화추천 (9) : 보 이즈 어프레이드

제목 : 보 이즈 어프레이드

감독 : 아리 아스터

연도 : 2023년

러닝타임 : 2시간 59분

이런 사람에게 추천해요! : 심리적인 불안감을 견딜 수 있는 사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몰라도 일단 받아들이고 따라오는 mbti n인 사람, 숨겨진 메시지의 뜻을 찾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다크 한 유머감각을 가진 사람, 아리 아스터를 적당히 좋아하는 사람





이 영화는 마음 약한 사람들이 보면 안 된다.

마치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이불킥"할 만한 흑역사와 무근본 불안감을 누군가가 꺼내서 가장 친한 친구들과 가까운 가족들에게 폭로하는 기분이다.

가슴은 두근두근 뛰고 땀은 삐질삐질 나는데 어떤 장면도 놓치면 안 된다. 강박적으로 스크린을 노려보게 된다. 끝났나? 생각이 들면 아직 반도 안 지나갔다.

아, 그리고 이 악몽이 무려 세 시간 동안 이어진다.


두 편의 상업영화만으로 아리 아스터를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올린 "유전"과 "미드소마"를 생각하며 영화관으로 들어가면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초반부에 이미 특유의 섬세한 속도 조절로 답답할 정도로 심리적인 진을 다 빼두는데, 엔딩으로 달려갈수록 on-the-nose, 그러니까 지나칠 정도로 캐리커쳐적인 캐릭터의 묘사, 그리고 뉘앙스의 여백 따위 없는 장면들로 영화를 채워나간다.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지금 내가 뭘 본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수리 냄새 같은 매력이 있다.

싫어해야 하고, 분명히 초반에는 싫어했는데... 다시 느끼고 싶다. (그것도 아리 아스터의 정수리 냄새라면 다시 맡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다시 분석해봤다. 그리고 감상이 조금 더 분화되었다.

먼저, 세대를 거쳐 상속되는 상처를 다룬 "유전"과 사랑하는 관계에서의 의무,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현실을 공포스러운 전통에 비유한 "미드소마"와 연결이 되며 괴상한 장면을 통해 이 영화가 뭘 얘기하고 싶었는지 알게 되었다.

왜 이 영화가 현학적으로 느껴졌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네 개의 장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장은 저마다의 이유로 멀미를 유발한다. 어른들을 위한 "오즈의 마법사" 내지는 안데르센 동화 같은 모험의 구성을 따른다. 캐리커쳐적으로 그려진 뉴욕 슬럼가를 배경으로 한 1장은 "두려움, " 뉴욕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칼에 찔린 후 자신을 차로 친 착한 WASP 부부의 집에서 요양하는 2장은 "의심, " 집에서 도망쳐 나와 숲에서 헤매다 만난 유랑극단에서 자신의 인생을 연극에 비유하는 3장은 "반추, " 어머니와 재회하고 끔찍한 일을 겪는 4장은 "붕괴"라는 테마를 가진다.


스포일러 있어요!





1. 그래서 이 영화는 도대체 무엇에 대한 걸까?


이 영화는 대대로 이어온 트라우마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에 영향받은 사람이 삶을 느끼는 방식을 끔찍이 솔직하게도 표현한다.

유전적인, 세대를 거친 트라우마는 이 영화의 뻔한 안타고니스트인 어머니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숨겨진 악당인 아버지로부터도 온다.



1. 어머니 : 죄책감


나는 주변의 친구들, 특히 신기하게도 여자아이들을 보며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거의 모든 딸의 어머니는 딸이 자기와 같은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멋진 커리어를 쌓은 엄마들은, 딸의 조그만 결점도 유년기 중 자신의 부재와 연결 지으며 꼭 딸이 자식을 낳으면 옆에 붙어 있으라고 당부한다. 전업주부로 평생을 산 엄마들은 딸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경제권은 가져야 한다고 설득한다. 아마 모성애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 그리고 아무도 자기 인생에 만족하지 않는 슬픈 현실이 합쳐진 결과인 것 같다.

그런데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기하게도 엄마의 운명을 딸이 닮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다.

가장 자주 보고 자라고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 엄마이기 때문일까?


영화의 오프닝에서 우리는 보의 출생을, 아직 자궁 속에 있는 보의 관점에서 경험하게 된다. 보의 어머니는 보가 태어난 순간부터 산부인과 의사에게 "왜 내 아기인데 나한테 안 주고 다른 곳으로 들고 가냐"며 보에게 집착한다. 그 이후에도 보와 어머니의 관계가 비정상적이라는 증거는 자주 보인다. 사십을 훌쩍 넘은 대머리 아들에게 "baby, sweetie"라며 어린아이에게나 쓸 법한 표현을 쓰기도 하고, 집에 올 수 없다는 소식을 듣자 과민반응한다.


영화 전반적으로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인상을 받지만 2장에서 WASP 부부의 딸에게 협박받아 여러 종류의 마약이 섞인 무언가를 피우기 전까지는 현실의 범위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듯하고, 그 이후에는 완전히 상상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 전반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조금의 비현실이 가미되어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회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년기에도 어머니의 집착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는 상태인데, 거기서 "어머니의 집 초대"라는 트리거로 인해 주인공이 미쳐가는 과정, 그리고 내 의견으로는 자살에 다다르는 과정을 그린다.


"빨간 구두"의 주인공이 죽을 때까지 춤을 췄다, 아니면 "신데렐라" 속 새 언니들은 유리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발 앞과 뒤를 잘라냈다, 하는 잔혹동화의 뒷이야기처럼 이 영화의 진짜 실제만을 걸러서 다시 스토리텔링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보는 어머니의 집에 너무 가기 싫어서 가상의 사건(열쇠가 도둑질당한 일)을 만들어낸다. 일부러 차에 치이기까지 하며 "어쩔 수 없이 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언제나 보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는 (그리고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 어머니는 맞수를 둔다. 자신의 죽음을 연출하고 장례식을 치른다.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보를 차로 친 부부는 온전히 선한 사람들이고 그를 돕고 싶어 하지만 보는 과거의 사건들로 인해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상태이다. (첫 섹스를 마친 후 죽어버린 일레인이 시사하듯, 보는 그 누구와도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부부의 사춘기 딸 토리도, 그들이 거둔 군인도 보의 시선에서는 위협이다. 남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본인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셀프 사보타주(self-sabotage)를 해서 자신의 믿음이 맞다고 증명하고 싶어 할 때가 있다. 그래서 토리에게 위해를 가하고 그 집에서 탈출한다.

페인트를 마신 토리를 살리려다가 보를 비난하는 WASP 아내

숲으로 도망치고 그는 자신의 지난 인생을 조용히 곱씹어본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의 집에 왔다.

어머니는 영화에서 표현된 만큼 부자이지는 않을 것이다. 보는 어머니의 권력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머니는 완전히 마음의 상처를 후벼 파는 행동이나 말을 하고, 흥분한 보는 어머니를 죽인다. 어머니에 대한 거대한 사랑과 죄책감, 후회, 평소에 가지고 있던 불안감으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진 주인공은 머릿속으로 과거에 했던 조그마한 행동까지도 비난하고 증오하며 자살한다. 마지막 재판 장면은 본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한다면, 주인공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어내고 실제로 믿는 영화 속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섬뜩하게 느껴진다.

특히 마지막 재판 장면에서 아주 사소한 흑역사로 자신을 판단하고 재단한다.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만 내재된 비난의 목소리에 묻힌다.


뒤틀린 모성애라는 주제는 봉준호의 "마더"에서 우아하게 다뤄진다. 어머니의 사랑이 집착으로 이어져 자신에게서 독립하려는 모습에 불안감을 느끼는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다룬 다른 영화이다.

영화에서 보는 자신이 어머니와 관계가 없는 새로운 열정이나 취미를 갖고자 할 때마다 어머니가 배신감을 느꼈다고 언급하는데, 예측하건대 보는 그럴 때마다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저 이번에는 집에 가기 싫어요"라는 말을 죽어도 못 하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지어가면서 본인을 점점 사지로 몰아넣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보의 할머니도 딸과 비슷한 관계를 가졌다는 대사가 나온다. 결국 상처의 순환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일까...



2. 아버지 : 사랑의 부재


어머니가 주인공에게 가한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 중 하나는, 보가 사정을 하면 죽을 거라는 거짓말이다.

보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모두 처음으로 사정하며 죽었다며 겁을 준다. 그래서 보에게 사랑을 나누는 것은 죽을 만큼 (리터럴리!) 두려운 일이다. 과학적인 근거는 불확실하지만 2장에서 의사 남편이 보에게 고환이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두 번째 관람했을 때 난 이 거짓말 또한 보가 지어냈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된 버림받는 데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아버지를 위해 스스로 변명을 지어낸 듯하다. 특히나 어머니를 사랑한 동시에 증오했기 때문에. 아버지에서 비롯한 트라우마도 어머니 탓을 하다니, 주인공도 그의 어머니처럼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4장에서 어머니가 아버지의 행방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겠다며 다락방 문을 열고, 보는 아버지의 실체를 보게 된다. 처음에는 바닥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 노쇄한 남성으로 보였던 존재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거대한 성기 괴물이 된다. 보의 인생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남성의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보에게, 또 그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그저 성기일 뿐이다.


영화 내내 보는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그것을 얻을 수 없는 데에 대한 절망감을 자주 표출한다. 특히 어머니를 닮은 여자로부터의 사랑이 아닌,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고 가족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을 갈구한다.

3장에서 자신의 인생을 연극으로 상상할 때 자신의 세 아들을 품에 안으며 오열한다. 한참 포옹을 한 뒤에야 "너희 엄마는?" 하며 묻는다. 가면을 쓴 천사 캐릭터는 의미심장하게 그 장면을 바라본다.


연극 내 가면을 쓴 천사

아들을 안으며 자신이 사정을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하게 보를 바라본다. "사정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저희를 가졌어요?"

그때 보는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면 영원히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꿈은 끝난다.


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버지를 성기로만 인식하듯, 자신의 아이들이 자기를 성기로만 인식하는 일이다. 다락방에서 성기 괴물을 보자마자 오열하고, 탈출 후 어머니의 발에 키스를 퍼붓고 용서해 달라고 비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보가 기적의 연속으로 아이를 갖게 된다면 결국 성기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아버지로부터 대대로 이어온 트라우마로 보는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3장에서 보는 임신한 여인을 따라 유랑 극단에 들어가게 되는데, 상상 속 연극에서 자신의 아내를 그 여인으로 설정할 만큼 끌림을 느꼈다.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석고 모형을 그녀에게 줄 정도였다. 하지만 4장에서 붕괴할 때, 그는 그 선택에도 죄책감을 느낀다.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우연히 만난 헤픈 여자에게 줘 버렸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어머니가 아닌 타인에게 베푸는 일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온전한 사랑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순수한 첫사랑의 상징인 일레인과 몇 십 년 만에 다시 만나서 사랑을 나누게 되었을 때 보는 당연히 겁에 질린다. 사정을 하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게 잘 마무리되고 보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기쁨에 차지만, 정신을 차리고 일레인을 보자 일레인은 눈이 뒤집힌 상태로 죽어 있다. 이는 보가 누군가와 진정한 관계를 이루기 어렵다는 점을 상징한다. 보는 이 관계의 사망 또한 어머니가 계획하고 연출한 것이라고 믿고, 어머니의 탓으로 돌린다.




2. 이 영화가 왜 현학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아리 아스터는 이번 작품으로 공포영화의 라이징스타였던 과거에서 벗어나 오디세이적인 스토리텔링과 코미디를 시도했다. 그래서 먼저 부담감이 굉장히 컸던 것 같다.


뉴욕은 위험한 곳이다. 하지만 1장에서 뉴욕이 표현될 만큼 위험한 곳은 아닐 것 같다. 나체의 남자가 칼로 묻지 마 폭행을 하고 다니고, 눈동자를 포함한 온몸을 문신으로 덮은 거지가 무작위로 위협을 가하며, 집 열쇠를 잃어버려서 문을 잠깐 열고 나온 사이 길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방으로 쳐들어와서 살인을 포함한 파티를 열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이다.

1장에서 묘사된 뉴욕 슬럼가는 마치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는 외동 + 고명딸의 보수적인 부모님이 상상하는 미국의 모습 같다. 아, 일주일 동안 인종차별과 총기 난사에 대한 기사만 읽은 채로 말이다.


사실 이런 장면들은 감독이 그저 잘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플렉스... 하는 느낌이 들었다. 불안감과 공포심이라는 감정을 정확히 계산된 타이밍과 미장센을 통해 점프 스케어 없이 관객의 상상력만으로 유발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오히려 너무 잘 그것을 수행해서 1장이 끝나면 조금 갑갑한 감정까지 든다.

하지만 히치콕 이후로 아리 아스터만큼 이걸 잘 수행할 수 있는 감독은 없기 때문에 난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 외에도 정확히 칭찬을 받을만한 자신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런 요소를 전략적으로 삽입해 실패 가능성을 줄이려고 하는 안전한 시도들이 곳곳에 보였다. 이 과정에서 어떻게 보면 너무 길고 너무 복잡하기에 실패할 수 있는 이 영화를 스코세이지나 데이비드 린치의 느낌을 많이 차용해서 거장의 향기를 내려고 노력했는데, 본인의 경쟁적 에지가 많이 사라진 인상이 느껴진다.


두 번째 이유는 또, 아리 아스터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힘들어 보였다.

뒤틀린 모성애가 주제 중 하나이기 때문에 어머니를 악당으로 그려내야 했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이 영화에서 어머니는 거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의 마녀 새엄마처럼 지나치게 악당의 캐리커쳐로 그려진다.

보의 어머니, 모나

그의 세 영화 "유전, " "미드소마, " 그리고 "보 이즈 어프레이드"까지 모두 관통하는 코드가 있다면 가족과 그들로부터 받는 상처다. "유전"은 모계로 흐르는 유전적 정신병을 다루고 "미드소마"의 여주인공은 가족이 한꺼번에 죽어서 우울증을 얻게 된다.

이 이야기는 감독이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지 않았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 그래서 더 자세하고 솔직하게 풀어낼 수 있는 부분들도 대충 예술적인 표현이나 비유, 또는 뒤틀린 유머코드로 가볍게 짚고 넘어간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때문에 잘 만든 작품은 아니라고 결론 냈다.


하지만 풀어나가는 방식이 매끄럽지 않았을 뿐, 연출력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강렬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완전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소감문을 쓰게 되었다.






죽음을 포함한 작품들은 대게 삶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마련이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사형 직전 죽음을 마주하며 가볍게 여겼던 삶의 무게를 깨닫는다.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의 악인은 희생으로 회생되어 입체적인 캐릭터가 된다.

이 영화에서는 보를 죽임으로써 한 방울의 희망도 남겨두지 않고 그의 인간성을 묵살한다. 단 한 번도 행복할 기회도 없었고, 그 누구에게도 행복을 주지 못했던 불쌍한 인간.

아리 아스터는 특유의 어두운 유머감각으로 절망적인 결말을 희화화한다. 영화 내용은 물론이고, 그것의 표현 방식에서 대대로 판도라의 상자처럼 전해져 내려온 세대 간의 트라우마는 끊을 수 없다는 감독의 판단을 볼 수 있다.

세 시간 동안이라도 그의 감정과 고통을 느껴보고 싶다면 추천하지만, 이 영화는 마음 약한 사람들이 보면 안 된다.

작가의 이전글 견딜 수 없는 후회, 멈출 수 없는 합리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