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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Jul 31. 2023

솔직함, 치부를 드러내는 강함에 대하여

고집쟁이의 영화추천 (10) : 미치광이 삐에로 리뷰

제목 : 미치광이 삐에로

감독 : 장 뤽 고다르

연도 : 1965년

러닝타임 : 1시간 40분

국적 : 프랑스, 이탈리아

이런 사람에게 추천해요! : 스토리 없는 영화도 즐길 수 있는 사람, 자칫 현학적일 수 있는 상징적 대사 속 의미를 고민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 현대미술/행위예술을 좋아하는 사람, 솔직한 사람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있다. 어렸을 때에는 이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시작을 했다는 것만으로 그것조차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반이나 앞서나가 있다는 말처럼 들려서, 겁이 많은 나는 도전하는 고집쟁이의 당당함을 지향했다.

이제는 그게 플라스틱 봉투로 포장된 유리빨대를 사용하는 자칭 환경주의자만큼 얼마나 어린 생각인지 알겠다.

첫째, 시작이 반이라는 건 사실 반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과 동일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의 흥분과 열정으로 인해 어떤 프로젝트든 신나는 초반부보다는 마무리를 해야 하는 후반부가 고된 법이다. 나머지 1/2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가 더욱 의미 있다.

둘째, "시작"이란 출발점을 밟는 것이 아니다. 출발점에서 적어도 10 발걸음은 내딛어야지 출발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은 내 열 번째 브런치스토리를 올리는 날이다. 나의 첫 두 자릿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시네마와 좋은 친구였던 내가 2020년에 짝사랑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던 "미치광이 삐에로"의 리뷰를 작성한다.


시작... 시작은 설레는 단어다.

유부남 페르낭드는 아내, 아이들, 그리고 부르주아의 생활에서 옛 연인이었던 마리안느와 도망치게 된다. 마리안느는 자꾸만 페르낭드를 슬픈 광대라는 뜻을 가진 "삐에로"라고 부른다. 그럴 때마다 페르낭드는 "아니야, 내 이름은 페르낭드야"라고 반박한다.

책 속의 삶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이 슬퍼. 다르지 않았으면 좋겠어. 명확하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삶… 하지만 그럴 수 없지.
 그럴 수 있어. 다들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 않아, 삐에로.
 또 시작이다. 내 이름은 페르디앙이야.
 “내 친구, 페르디앙”은 안 어울리는걸?
좋아, 너 마음대로 해.


차를 탄 채 달콤한 사랑의 단어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OAS 테러리스트들로부터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차를 버리기도 하고 폭파시키기도 하며 돈을 잃어버린 둘은 할 일이 없어 전원적인 공간에서 철학하고, 사색하고, 집필하고, 대화한다.

위험한 사랑의 도피 중인 페르낭드와 마리안느

마리안느는 슬프다.


당신은 나에게 단어로 말하고, 나는 당신을 느낌으로 바라보니까.
당신 하고는 대화가 불가능해. 생각은 없고 느낌뿐이지.
틀려! 느낌이 생각이야!
좋아, 어디 한 번 심각한 대화를 해보자. 뭐든 말해봐 얘기하고 싶은 거 다. 나도 그럴 테니까. 그럼 시작하자.
꽃, 동물, 푸른 하늘, 시끄러운 음악 소리... 모르겠어, 뭐든 다! 당신 차례야.
야망, 희망, 사물의 움직임, 우연... 또 뭐가 있나... 뭐든지!
봤죠? 내 말이 맞았어요. 우린 절대 서로 이해 못 해


mbti가 nf임이 분명한 마리안느와 st임이 확실한 페르낭드

돈을 벌기 위해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할리우드의 오리엔탈리즘과 on-the-nose 전개 방식을 조롱하는 것이 분명한, 노란색으로 얼굴을 칠한 연극으로 미국인 관광객의 돈을 얻어내기도 한다.

마리안느는 틈날 때마다 친오빠를 언급하며, 그를 만나 돈을 받으면 함께 도망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계속된 도망자의 삶 중 마리안느의 다양한 돌발 행동(페르낭드를 두고 도망가는 일도 있다),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로 그녀에 대한 신뢰를 모두 잃은 페르낭드는 그녀를 계속해서 의심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의심의 끈을 놓고, 그녀는 진짜 남자친구인 프레드와 도망간다.

페르낭드는 마리안느와 프레드를 찾아내 "케네디를 암살한 총"이라고 언급된 긴 총으로 죽이고, 얼굴을 파란 물감으로 뒤덮은 후 다이너마이트를 머리에 칭칭 감고서 자살하기 위해 불을 붙인다.

자살하려는 페르낭드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며 황급히 불을 끄고자 하지만 실패하고 강렬한 폭팔음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 알록달록한 모습은 영락없는 삐에로의 광경이다.



이 영화는 40년 동안 김치만 담가왔던 종갓집 맏며느리가 처음 선보이는 파스타 같은 맛이 있다.

장인의 생소하고, 너무나 개인적이라 다루기 어려운 과제를 대하는 태도 말이다. 그리고 고다르는 명확한 해답을 알고 있었다. 바로 진실성, 솔직함이다.

초반에 파티에 참석한 페르낭드와 대화하던 미국인 영화감독은 이렇게 얘기한다,

영화는 전쟁터와 같아. 이건 사랑이고, 증오이고, 액션이고, 잔인함, 그리고 죽음. 한 마디로 : 감정.

누벨바그의 가장 뻔한 특징이기도 한데, 정말 불친절하다. 사실 그게 매력적이기도 한데, 할리우드 영화가 전형적인 '교회 오빠' 포지션이라고 생각하면 누벨바그 영화는 어쩔 수 없이 끌리는 '나쁜 남자'같다.

의도를 명확하게 표시하고 (이제부터 널 울게 할 거야, 좀 있으면 점프 스케어가 나올 거야) 눈이 즐거운 액션과 제작비를 쏟아 넣은 뮤지컬 넘버를 만드는 할리우드 블락버스터도 좋지만, 차를 타다가 제4의 벽을 넘어 카메라를 쳐다보며 “이 여자는 완전히 미쳤어요!” 하거나, 연인 간 대화 중 다큐멘터리 클립과 피카소 작품을 보여주는 등의 뜬금없는 편집 방식은 예상할 수 없어서 설렌다.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을 수 없으니 자꾸 곱씹어야 하는데, 특히나 나같이 도전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그 과정이 흥미로운 것이다.


고다르의 어려운 과제는 여러 개가 있었다. 마리안느 역을 맡은 여배우이자 자신의 전 아내인 안나 카리나에 대한 증오, 당시의 베트남 전쟁과 따라 자행된 의미 없는 희생과 죽음에 대한 회한, 그리고 고다르가 죽을 때까지 놓지 못했던 존재와 진실에 대한 의문.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꼭대기에 서 있는 영화는 미국인 작가 리오넬 화이트의 "Obsession"이라는 책을 각색한 영화다. 원작에서는 중년 이상의 남성이 사춘기 소녀에 대한 사랑, 내지는 집착을 한다. 둘은 여러 모험에 떠나는데, 사춘기 소녀는 주인공을 마음껏 이용하고, 결국 분노한 남성은 소녀와 그의 남자친구를 살해하는 내용이다. 고다르도 처음에는 나이가 많은 남성을 캐스팅하고자 했지만, 염두에 뒀던 두 배우가 거절한 이후 어쩔 수 없이 젊고 아름다운 장 폴 벨몬도를 페르낭드 역에 캐스팅하게 된다.

부드러운 매력이 있는 누벨바그의 얼굴, 장-폴 벨몬도

이로 인해 고다르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는 이야기 전개가 많이 달라진다. 완성본의 마리안느도 소설 속 여자 아이처럼 벨몬도를 이용하지만 클래식한 팜므파탈보다도 잔인하다. 페르낭드를 떠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역작인 소설을 망가뜨리고 떠난다. 심지어는 페르낭드가 쏜 총에 맞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삐에로, 미안해..."라고 얘기하며 끝까지 본인의 의중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숨을 거두며 그녀에 대한 증오라는 마지막으로 하나 부릴 수 있는 자존심까지 빼앗아간다. 고다르는 결혼 생활 중 안나 카리나가 본인의 커리어를 망치려고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가 반영된 대목이다.

한 장면에서 페르낭드는 불안한지 마리안느에게 거듭 묻는다, "날 떠나지 않을 거지?" 지나치게 클로즈업되어 화면 전체를 채우는 마리안느는 "네, 정말이에요"라고 말을 하지만, 또 제4의 벽을 넘으며 카메라를 쳐다본다. 그도 두 번이나.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마리안느

그녀의 눈에 서려 있는 감정은 양심의 가책, 날카로운 꾀, 순수하고 잔인한 즐거움?

이 영화의 정신없는 편집 방식이 불필요하고, 현학적이고, 예술가 프레임에 집착하는 것 같다는 비판을 들은 적도 있다. 확실히 페르낭드가 계속해서 발자크를 인용하는 것, 셀린느 소설을 읽는 것, 원색과 흑백을 이용해 포스트모던 그림 같은 이미지를 줬던 점, 모차르트의 음악이 반복되는 것 모두 현학적인 몸부림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마리안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처럼 캐릭터의 내면을 나타낼 때에는 이 방식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이 장면을 어떻게 찍었을까? 아마 질문하는 페르낭드와 마리안느의 옆모습을 촬영하다, 보이스오버로 마리안느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이 계획을 감행해야 했다"처럼.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렇게 간추린 감정은 진실이 아니다. 대체 누가 그렇게나 자신의 감정을 깨끗하고 명확하게 한 줄로 요약할 수 있겠는가, 이 영화에서 고다르는 증오도 사랑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을 너무나 당당하게 고백한다. 페르낭드의 독백에서 볼 수 있듯이.

독백하는 페르낭드
우리는 모두 닮은꼴을 하게 되었어.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 거울을 볼 필요가 없어졌지. 마리안느가 날씨가 좋다고 하면 난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져. "날씨가 좋아"라고 말하는 그녀의 이미지만 볼뿐이야. 그게 다야. 이해한다는 건 뭐지? 꿈은 우리를 만들고 우리는 꿈을 만들지. 날씨가 좋아, 내 사랑. 꿈 안에서, 언어 안에서, 죽음 안에서. 날씨가 좋아, 내 사랑. 날씨가 좋아...


이는 베트남 전쟁, 그리고 이어진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감정에도 적용된다.

할리우드의 액션과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한 조롱이 몇 번이나 등장한다.

처음 커플이 차를 타고 도망칠 때 싸우게 될 일이 생기는데, 세상에서 가장 엉성하고 우스꽝스러운 액션 신을 볼 수 있다. 할리우드처럼 적절한 클로즈업과 팬닝을 섞지 않고 연예인 전체 직캠을 보듯 관찰자의 관점에서 1분 넘게 싸우는 장면을 보여주기에 극대화된다. 페르낭드와 남자는 팔과 다리를 파닥대며 껑충껑충 주먹을 휘두른다.

싸우는 페르낭드

뮤지컬 같은 장면들도 그렇다. 노래로 의미를 전달하는 부분이 두 번 등장하는데, 안무라고는 흙을 던지거나 함께 걷는 것에 불과하다. 또 노래 가사도 어이없다.

나의 운명선, 나의 운명선은 너무 짧아
당신의 다리 선은 더 좋아
나의 운명선
내 품에 담고 싶군, 당신의 다리 선을!

할리우드 영화의 액션 씬이나 뮤지컬 신을 영화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보면 정말 이렇게 보이지 않을까? 유튜브에 널리 퍼져 있는 "아이돌 뮤직비디오 음악을 제거하면?"같은 패러디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영화의 언어를 따른 작품을 다른 시각으로 보면 너무나 포장된 것일 수도 있다. 고다르는 미국 영화들을 조롱하는 것과 동시에 상쾌하고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

또, 베트남전의 직접적인 인용은 물론이고 배신당한 페르낭드가 몸에 다이너마이트를 휘감고 자살하는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불필요한 희생에 대한 거부감 또한 드러난다.


중년의 고다르는 이렇게 예술성과 정치성을 영화에 녹여내기도 했지만, 개인적인 나약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솔직히 얘기하면, 아직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대사들도 많다. 3년 전에 봤을 때와 최근에 봤을 때 이해의 범위가 달랐기에, 또 몇 년이 지나고 봤을 때가 기대된다. 내가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만 이야기하면 안나 카리나와의 5년의 결혼생활동안 고다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는데, 그동안 느낀 사랑, 사랑의 죽음, 나이 듦이 관계와 심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석했다.

처음에는, 서로에 대해 가장 싫어하는 부분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름답다.

그땐 잠시 미쳤던 거야. 아니, 사랑에 빠진 거야.
그게 그거지! 난 다시는 사랑 같은 거 안 해. 역겨운 습관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10분 전만 해도 온통 죽음뿐이었지만 이제는 그 반대야. 좀 봐봐, 바다, 파도, 하늘... 삶은 슬프지만 늘 아름답지. 갑자기 자유를 느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봐!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자동차 핸들을 돌리며)
이 남자는 미쳤어요! 길을 벗어나서 달리고 있어요!
그래? 어디 보자! (자동차를 바다로 몬다)

그런데 둘은 언어가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삶의 단계가 다르다. 늘 사랑한다고 맹세하고 노래하는 감정적인 마리안느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너무나도 차갑게 돌아선다. 그런데 고다르는 배신감에도 안나 카리나의 심정을 이해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의 독백에서 느낄 수 있듯이.

화요일에 난 전축을 사고 싶었어. 하지만 그가 책 사는 데 돈을 다 써버렸지. 사실 난 상관없어. 그는 그 책들을 보지도 못해. 난 책 따위는 관심 없어. 레코드도 돈도 관심 없어. 단지 살고 싶을 뿐. 그는 절대 이해 못 하겠지. 난 살고 싶어.

이해하려는 노력에도 괴로움은 사라질 리 없다. 고다르는 깨달았다. 관계 속에서 "나"는 사라지고 "우리"만이 남은 것. 문제는, 상대방은 "우리"가 아닌 "나"를 원한다는 것.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끌여당 겨지고, 오른쪽으로 끌여당 겨지면 왼쪽으로 밀려나는 면도날 균형 위에 서 있었다는 것 말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만 나는 없다. 나는 도착해서 방으로 들어간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당신을 위해 존재한다. 나는 그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고통 속에서 살아갔다. 문제는 당신에게 내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진실의 가치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껴야 하는 것

결국 고다르는 최선과 최악의 무게를 재기보다 진실에 충실하기로 다짐한다.

뭔가 모르겠다. 하늘의 색깔과 우리 관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봐, 난 내 손을 당신 무릎에 올려. 행위 자체로 아름답지. 삶은 그런 거야. 공간과 느낌. 이제 당신과 같이 가겠어, 격렬한 분노의 이야기 속으로. 이젠 더 이상 상관없어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지만,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다. 스토리상으로만 봤을 때는 분명 나쁜 여자와 불쌍한 남자, 둘 다 죽음에 다다르는 이야기지만 둘이 보여준 날 것의 솔직함만이 감동으로 남는다.


24살이 그런 나이인가?


정말 나답지 않았던 1년, 방황 후 복학을 한 뒤 내 목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보다도 가변적이었다.

"넌 어떤 사람이야?"를 물어보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그 발화가 얼마나 날카로웠는지에 따라 내 대답은 천차만별이었다.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자는 나였음에도, 내게서 그 질문을 받으면 미지근한 울화가 치밀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자를 열고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하기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나 미운 상태에서 상자를 열면 틀림없이 고양이가 시체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그저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불확정성 원리의 영역으로 내 불만족스러운 현재와 기대되지 않는 미래를 떠넘기고 싶었다.

그래서 올해 목표는 간단했다. 솔직해지자, 용기를 갖자! 내가 정말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는 남들이 아는 나로 규정지으려는 어떠한 내외부적 세력에도 페르낭드처럼 답을 해야겠다.

난 당신을 알지만 당신은 몰라.
동감이야, 난 지중해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물음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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