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문은 하루에도 여러 번 열립니다. 배뇨통을 호소하는 분, 건강검진 결과지를 들고 오신 분, 요로결석으로 밤새 뒤척였다는 분. 저는 그 많은 얼굴들 사이를 지나, 늘 같은 일을 합니다. 증상을 듣고, 검사를 고르고, 치료를 설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끔, 정말 가끔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날이 있습니다. 손을 꼭 잡고 오기도 하지만, 대개는 공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조용하고, 다른 한 사람은 화가 나 있습니다. 앉자마자 질문이 튀어나옵니다.
“원장님, 이거… 무슨 일인지 밝혀주세요.”
그쯤 되면, 저는 마음속으로 아주 오래된 단어 하나를 떠올립니다.
‘베네리얼(venereal).’
한때 성병을 부르던, 조금은 기묘하고도 우아한 옛 이름입니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Venus)의 이름을 빌려 만든 말이지요. 그리고 저는, 늘 현실적인 대답을 꺼냅니다.
“저는 의사이지 탐정은 아닙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옮겼는지까지는, 검사로도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대신 지금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치료할지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이 대목이 이 장의 출발점입니다. 사랑의 여신이 남긴 이름이 왜 ‘병’이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그 이름을 버리고 더 건조한 약어를 쓰게 되었는지요.
비너스의 이름이 ‘병명’이 된 사연
‘venereal’은 라틴어 venereus에서 왔고, 뜻은 “비너스의, 성적 사랑의”에 가깝습니다. [1] 처음부터 병을 의미한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성적인 것’과 관련된 모든 분위기, 온도, 행위를 둘러싼 말이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성적 접촉으로 옮는 질환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 부르게 됩니다. 그때 붙은 이름이 ‘venereal disease’, 말 그대로 “비너스와 관련된 병”입니다. [2] 직접적으로 ‘sex’라고 말하기 어렵던 시대의 우회로였을 수도 있고, 반대로 말하면 은근한 낙인도 함께 묻어 있던 표현이었을 겁니다.
결국 이 표현은 두 글자짜리 약어로까지 압축됩니다. VD. 발음하기 쉽고, 표어로 만들기 좋은, 아주 차가운 약어입니다. [3]
VD라는 두 글자가 전쟁 포스터에 실리던 시절
VD가 가장 크게 울린 곳은 의외로 전쟁터였습니다. 2차 대전 시기의 공중보건 캠페인에는 VD 경고 포스터가 쏟아졌고, 그중 미국 국립의학도서관(NLM)에 보존된 유명한 포스터는 이런 문구를 내겁니다.
“겉보기엔 깨끗해 보여도… VD에 걸리면 추축국을 이길 수 없다.”[4]
‘비너스의 병’이라는 돌려 말하기는 이쯤에서 사라집니다. 대신 국가, 전투력, 생산성 같은 단어가 앞줄을 차지합니다. 사랑은 여전히 인간의 일이지만, 전쟁은 사랑조차 “관리 대상”으로 만들었지요. 그 시대의 포스터는 지금 보면 다소 거칠고 편견도 묻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또렷합니다. 성병은 오랫동안 ‘도덕의 문제’로 취급되기도 했고, 동시에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도 다뤄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VD에서 STD로, 다시 STI로
오늘날 우리는 VD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미국의 CDC(질병통제예방센터)도 VD를 “지금의 STD를 가리키던 오래된 용어”라고 정리합니다. [3] 대신 STD(Sexually Transmitted Disease), 즉 “성적으로 전파되는 질병”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지요. 그런데 최근에는 STD보다 STI(Sexually Transmitted Infection), “성적으로 전파되는 감염”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씁니다. CDC는 그 이유를 아주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감염은 있어도 아직 질병 상태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고, 공중보건의 목표는 증상이 생긴 뒤가 아니라 그 이전 단계에서 감염을 찾아 치료하고 전파를 막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5][6]
말이 바뀌면 시선도 바뀝니다.‘질병’은 눈에 보이는 고장 같고, ‘감염’은 아직 조용한 상태까지 포함합니다. 이 단어 하나의 차이가 진료실에서는 꽤 큽니다. 증상이 없다고 안심하던 사람이, 검사에서 양성이 나오는 경우가 실제로 적지 않으니까요.
진료실의 추적극과, 제가 할 수 있는 일
다시 그 커플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한쪽이 화가 나 있을 때, 그분의 질문은 보통 이렇습니다.
“원장님, 잠복기가 며칠인데요? 이게 최근에 걸린 거예요, 예전에 걸린 거예요?”
저는 그 질문의 마음을 압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질문이 ‘의학’이 아니라 ‘관계’의 언어라는 것도 압니다.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삶의 퍼즐을 맞추고 싶어서 진료실까지 온 것이겠지요. 하지만 의학의 답은 생각보다 건조합니다. 검사 결과가 알려주는 것은 ‘무엇이 있느냐’이지, ‘누가 원인인가’가 아닙니다. 어떤 감염은 증상이 없다가 나중에 발견되기도 하고, 서로의 시간표가 겹치기도 하고, 기억은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부드럽게, 그러나 방향은 분명하게 잡아드립니다.
“지금은 판결보다 치료가 우선입니다. 두 분 중 누구 탓으로 정리하려고 하면 치료가 늦어지고, 그 사이에 염증이 악화되거나 재감염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검사와 치료 계획을 먼저 세우고, 필요한 경우 파트너 치료와 재검 시점을 같이 정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개는 조금 조용해집니다. 완전히 화해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싸움의 주제’가 잠깐 내려 놓이는 겁니다. 그 틈에서 의학이 들어갈 자리가 생깁니다. 제가 잡을 수 있는 범인은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균입니다. 마음을 추궁하는 일은 법정과 상담실의 몫이고, 제 몫은 재발을 막고 합병증을 줄이며 앞으로의 건강을 지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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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nline Etymology Dictionary. Venereal.
[2] Merriam-Webster. Venereal disease.
[3]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 Venereal Disease Program. David J. Sencer CDC Museum.
[4] U.S. National Library of Medicine. She May Look Clean—But[poster].
[5]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 About sexually transmitted infections (STIs).
[6] Workowski KA, Bachmann LH, Chan PA, et al. Sexually transmitted infections treatment guidelines, 2021: summary and introduction. MMWR Recomm Rep.2021;70(4):1-187. doi:10.15585/mmwr.rr7004a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