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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혜경 Oct 08. 2023

우거지와 오이소박이


  사십몇 년 전 결혼해서 처음 살았던 아파트 옆집 104호에 나와 동갑내기 아기 엄마가 살았다. 고향이 전라도였던 그녀는 음식을 맛깔스럽게 잘했다. 나는 새댁인데다 직장에 다니느라 별로 왕래가 없었지만, 둘째 아기를 가져 만삭인 그녀가 집안일을 하는 사이에 맨발로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는 아이를 우리 어머님이 봐주는 모양이었다. 고맙다며 가끔 동태찌개며 김치, 오이소박이를 가져오곤 했는데, 별다른 양념이 없이도 참 맛이 있었다.

  “서울로 와야 먹고살 것 같아서 무턱대고 올라와서 애 아빠는 철공소에서 일한다더라. 젊은 여자가 억척스럽기도 하지. 그렇게 부른 배에도 시장에서 우거지를 주워 와서 찌개를 끓였다는데 맛있더라. 고춧가루하고 마늘은 아끼질 않고 팍팍 넣더라.”

  어머니는 나에게 그 여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둘째를 낳고 아이 아빠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해외 취업을 나갔다. 어느 날 아이 엄마가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며 찾아와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기가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농사를 돕느라 학교에 다니지 못해서 글을 모른다고 했다. 남동생은 학교에 보내면서 여자라고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안일을 도우라고 했단다. 아무리 궁리해도 부탁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면서 미안하지만 자기 남편에게 편지를 써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몇 년간 나는 그녀 대신 편지를 써줬다.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근처 작은 아파트를 사 이사를 했고, 후에도 3년이 넘도록 나의 대필 편지는 계속되었다.

  성실했던 아이 아빠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고 그녀는 여전히 우거지를 주워 국을 끓여 먹으면서 알뜰하게 돈을 모아  더 큰 아파트로 이사했다. 우리도 다른 동네로  이사하게 되어 가끔 전화만 주고받다가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 어느 날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아이들이 크면서 자신을 무시하고 엇나간다며 울먹였다. 지금이라도 글을 배우면 어떻겠느냐는 내 말에 “글쎄...” 하고 말꼬리를 흐리며 전화를 끊었고 그 뒤론 소식이 없었다.

 


다음에 104호로 이사를 온 중년 부부에겐 고등학생인 딸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입양한 딸로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부부 사이에 아기가 생기지 않아서 입양을 했나 보았다. 그 딸은 그때 한참 사춘기를 겪는 데다 입양 사실을 알고 가출해서 속을 썩였다. 아저씨는 오래전 경찰공무원이었는데 5·16 이후에 무슨 일로 그만두고 나서는 놀고 있다고 했다. 매일 술만 마시고 신세 한탄을 하던 아저씨 대신 아주머니가 남의 집에 일하러 다녔다.

  아침에 일하러 가기 전 상을 차려놓는데 저녁때 와서 보면 밥상은 그대로인 채 술병만 널브러져 있는 걸 보면서 속상해했다. 가끔 다툴 때도 있는데 목소리도 크지 않고 행동도 조용조용한 아주머니는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중얼거리듯 아저씨에게 대들다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면 오히려 내가 더 화가 났다. 가끔 아저씨의 술친구들이 몰려와서 이것저것 다 꺼내놓고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여름이면 104호에선 자주 오이소박이를 담갔다. 우리 어머니는 오이의 맛있는 물을 먹어야 한다며 물기가 흥건하게 담으시는데 그 아주머니가 담근 것은 꼬들꼬들했다. 가만 보니 소금에 절인 오이를 베보자기에 싼 뒤 돌을 몇 개나 얹어서 물기를 쏙 뺀 뒤에 소를 넣는 것이다. 심심하면서 꼬들꼬들한 오이소박이를 가져오시면 말라비틀어졌다며 남편도 어머님도 좋아하지 않아서 대부분 내가 먹었다. 하지만 오이소박이 하나라도 얼마나 정성을 기울여서 담던지 지금도 오이소박이를 보면 그 아줌마가 떠오르곤 한다.

  가끔 그 아주머니의 친정어머니가 다니러 왔다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속내를 털어놓았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더니 일류여고 출신인 데다 예쁘고 공부도 잘하던 딸이어서 기대가 많았는데 내 딸이 이러고 살 줄 몰랐다며 속상해했다. 경찰이었던 나이 많은 사위가 세상 이치도 모르는 나이 어린 딸을 데려다가 평생을 죽어라 고생만 시킨다며 서운해했다.

  그때 아주머니의 친정어머니에게 들었던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은 만나는 남자에 따라서 여자의 팔자가 바뀐다는 말이겠지만 어디 여자뿐이랴. 요즘엔 남자도 때에 따라서 뒤웅박 팔자라서 서로 잘 맞는 사람을 만나야 별문제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임을...

  밥은 먹지 않고 술만 먹고 말라가던 아저씨는 어느 날 응급차에 실려 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이사하던 날 같이 오셔서 정리를 해주고 가셨다. 그 후에도 가끔 통화를 했는데, 딸이 결혼해서 할머니가 되었다고 했다. 같이 살자고 하지만 혼자 사는 게 편하다면서 여전히 남의 집에 일하러 다닌다고 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비록 잘못된 결혼으로 인해 힘들게 살아야 했지만, 남은 생은 모쪼록 편안하시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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