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동창 카페에 올라온 사진에서 S를 보았다. 어린 시절 그녀의 집에 놀러 가면 그 애 할머니가 화롯불에다 계란밥을 만들어주시곤 했다. 초가을 무렵이면 그 애 엄마가 말리려고 울타리에 꽂아놓은 삶은 고구마 조각을 빼먹는 재미도 참 쏠쏠했다.
어려서도 그랬지만 그 애와는 아주 특별한 기억이 있다. 88올림픽과 청문회로 우리나라가 온통 난리였던 그때 친구의 권유로 책 판매를 했었다. 어머님이 혹시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실까 싶어서 화장은커녕 옷도 사 입지 못하면서도 매일 눈을 뜨면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으로 나는 그저 신이 났었다.
저녁은 내가 돌아와서 지어야 했으니 조금이라도 늦으면 전철 안에서도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바빴다. 그땐 손빨래를 했는데 밀린 빨래를 하느라 밤늦게 잠을 자야 했고 일찍 일어나서 아이들 간식까지 챙겨놓고 집을 나서면서도 난 그저 좋았다. 하지만 집을 나서는 그 순간만 좋았을 뿐 출근하는 버스에서부터 오늘은 어디를 가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내 주변머리로는 그냥 놀러 가서도 벨 누르는 것을 망설일 정도였으니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을 찾아다닌다는 것이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남의 아이들 교육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라는 교육을 받을 땐 그래 맞아 이거야 했지만, 막상 맞닥뜨리면 그게 아니었다. 회사에서 나오는 사은품을 내 돈 주고 사 들고 가서 내밀면서도 그저 미안스러웠다. 책 판매는 날이 갈수록 힘에 겨웠다. 하지만 네가 얼마나 하는지 두고 보자는 남편이나 어머니에게 얕잡아 보이긴 싫고 어디서라도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늘 다정하게 편안하게 나를 대해주고 도움을 주고 싶어 하던 이들이 나에게도 있었다.
내가 가면 밥부터 안치던, 언니 같았던 00 엄마는 고등어를 조려서 상추 쌈 싸서 먹으면 맛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분이다. 일부러 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오늘 약속이 있느냐고 묻고는 친구들을 불러 모으곤 했다. 바구니 가득 상추를 씻어놓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밥에 쌈장을 준비해놓고 기다리다가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해주던 그런 분이었다.
그때 시집살이하느라 소식 모르던 친구들을 찾아가서 만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었는데 나는 책을 팔아야 할 목적이 있으니 그것도 못 할 일이었다. 정작 책 이야기는 해보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때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S는 언제나 따듯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전기 관련 일을 했던 그녀의 남편도 자주 마주쳤지만 귀찮은 내색을 하지 않았고 선한 얼굴로 ‘놀다 가세요’ 하고 자리를 비켜주니 부담 없이 찾아가는 곳이었다.
그 애는 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맛있는 찌개를 만들거나 김밥을 말거나 해서 나에게 밥을 먹이던 친구였다. 어느 날인가 집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서 아침도 먹지 못하고 출근을 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그만두어야 하나 마음은 복잡한데도 그냥 집으로 갈 수는 없어서 S에게 전화하니 오라고 한다. 집에 들어가니 솔솔 풍기는 참기름 냄새, 김이 눅져서 그런다며 김밥을 말고 있었다. 둘둘 말아서 썰어주는 김밥은 꿀맛이었다.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남편은 일 년 동안 해봤으니 적성이 아닌 일을 이젠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 일을 갑자기 그만두고 나서 난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가 보았다. 나더러 부장으로 승진하라면서 도와준 이들에게 본의 아니게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은 자괴감과 나의 무능력이 새삼스럽게 느껴졌고 그래서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닫아 버렸다. 친구들과 전화도 하지 않았고 그들을 만나러 나가지도 않았다.
내가 필요로 할 때는 그들을 찾아가고, 필요 없다고 연락도 하지 않았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싹수없는 일이련만, 나는 나대로 홍역을 앓느라 그런 생각까지 할 여유가 없었다. 난 그네들에게 참 싹수없는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여전히 사람 좋게 웃고 있는 S... 넌 참 좋은 친구다.
뱀발-S와 연락을 주고받는다. 몇 번 만나서 맛있는 밥도 먹고 공연도 보곤 했다. 얼마 전 오래전에 쓴 이 글을 보여주니 그때 그 친구도 형편이 어려웠다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사준 그 책을 아직도 아들 방 책장에 간직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