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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혜경 Dec 11. 2023

그냥 그렇다는 말

 다시 쓰는 고부일기


2004. 10. 11     

매일 같이 창문을 열면서 내다보면서도 모르고 지나쳤는데 오늘 보니 산 아래 은행나무에 노랗게 물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니 산 위에도 모르는 사이 울긋불긋 물이 들기 시작했다. 메마른 감성 탓인가 새싹이 돋아나는 것도 푸르게 녹음이 짙어지는 것에도 무심했다가 벌써 가을이구나 화들짝 놀랐다.     

지난 일 년간은 어머님의 병환으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작년 이맘때도 식사를 못 하시는 어머님을 위해 죽을 끓이다가 결국 입원했었다. 지금도 녹두죽, 팥죽, 밤죽, 잣죽, 좁쌀죽, 옥수수죽 등 입맛이 없다고 해서 재료를 바꿔 두 번 정도 드실 분량으로 끓여놓은 죽이 자꾸 밀리고 있다. 엊그제 농협에 갔다가 호박이 탐스러워서 사 왔는데 저 호박을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엊그제부터는 죽도 싫다고 하시는 바람에 사과나 토마토에 죽을 조금 넣고 갈아서 주스라고 속이면서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야 하나. 남편이나 시누님도 노환인데 입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하는데 안 보면 몰라도 지켜보는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혹시라도 다시 입원하게 될지 몰라서 서둘러 배추 12포기를 사들여 김치를 담그고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심란해진 마음에 자꾸만 단풍이 든다.   


  

 2005.10.25     

작년 가을엔 아주 많이 심란했었는데 올해는 그래도 무난하게 지나간다. 오늘은 어머니가 정기 진료받으러 가는 날, 혈액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어제도 이모님이 전화로 어머니의 안부를 물으셨다.  그냥 그러세요... 해놓고 나면 참 이상한 말이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 하지만 그냥 그렇다. 어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은 지 4년째 접어들었고 병원에 입원해서 곧 세상을 떠나실 것처럼 힘들었던 게 2년이다. 외출도 못 하시고 누워 계신지 1년이 넘었으니 그냥 그렇다는 것은 그저 살아 계신다는 것일 것이다.     

매끼 애를 먹이며 싫다고 하던 죽을 아무 말 하지 않고 비워주시니 고맙고 화장실에 스스로 다녀오시니 고맙고 우리 곁에 계시니 고마울 뿐이다. 남편이 어머니가 딱 2년만 더 살아주시면 고맙겠다고 했던 것도 2년 전이다. 어머니가 하도 돈 쓴다고 잔소리하시니 우리끼리 몰래 놀러 다녔던 게 마음에 걸려서 2년간은 원도 한도 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다니고 싶다고 했다. 편찮으시기 전 10년간은 어머님도 친구들과 관광도 자주 다니셨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위안 삼는다.     

지금 저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저렇게 곱게 아프시니 더 고생하지 않을 때 효도 받으시면서 돌아가시면 좋겠다고 남편은 말한다. 그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나도 더 고생은 말고 이 상태로만 계시다가 평온하게 떠나셨으면 하지만, 며느리인 나는 혹시라도 나중에 그 말이 내 가슴에 옹이가 될까 싶어서 빈말로도, 생각으로라도 어서 세상 떠나시길 바라는 것은 못 하겠다. 어제는 예쁜 홈드레스를 사다가 입혀드리니 뭐하러 샀느냐면서도 환하게 웃으시며 좋아하시던데 내가 빨리 죽어야지 하시던 그냥 그런 어머니가 우리의 이런 마음을 알면 서운해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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