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찮으신 어머니를 돌보던 때, 남편의 헤아림이 있어서 긴 세월 견딜 수 있었다. 내가 힘들어하면 어떤 꾀를 내서라도 활력소를 불어 넣어주려고 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날도 그는 고속도로를 바로 타지 않고 감포에서 동해까지 해안도로를 달렸다. 나는 운전을 하지 못하니 혼자서 긴 시간 운전하려면 피곤할 텐데도 굳이 그 길을 택했다. “자 봐봐. 이제 계속 바다가 보일 거야. 실컷 보라고.” 얼마 전 지방에 다녀오다가 본 동해안 해안도로 옆으로 이어지는 바다가 너무 아름다웠다고 하면서 나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동안 생일이며 기념일이라 해서 이런저런 선물을 받았지만 이렇게 통 큰 것은 처음이었다. 잘라서 가져올 수도 없고 쥘 수도 없지만, 받아보기 어려운 최고의 선물이었다. 짙은 군청색에서 남색으로 또 초록빛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광경을 보면서 감탄했다. 멋진 바다를 선물로 안겨준 그가 고맙고 행복했다.
그 후로도 내가 지친 눈치면 산소를 공급해준다면서 서해나 동해에 데려다주곤 했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를 바라보면 모든 힘듦이 사라졌다. 늘 1박 2일 짧은 일정에 서둘러 돌아와야 했고 현실은 편찮으신 어머니를 돌봐야 했지만, 여행에서 얻은 활력소로 한동안 나를 지탱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예 동해 가까운 곳으로 데려다 놨으니 그의 선물은 여기에 사는 한 유효한 셈이다.
부산 기장으로 이사 온 지 8년이 지났다. 이곳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서울로 가서 50년이 다 되도록 살았던 남편은 입버릇처럼 퇴직하면 자기 고향인 부산이나 근처에라도 가서 살겠다고 했다. 그랬어도 서울에서 태어나 60년이 다 되도록 살았던 내가 진짜로 낯선 곳으로 와서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오래도록 병석에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남편이 정년퇴직하자 우리 부부는 전국으로 여행을 다녔다. 괜찮은 곳이 있으면 살아보자는 것이다. 그중에서 이곳에 끌렸다. 그는 흥분해서 이곳이 마음에 든다면서 나를 꼬드겼다. ‘전원주택을 관리할 자신이 없다, 쥐도 싫고 벌레도 싫다, 지금껏 길든 대로 신도시 아파트에서 살자.’라는 말에 넘어갔다. 나는 볕이 드는 곳에 장독대를 만들어 된장, 고추장을 직접 담가 먹고 작은 텃밭을 가꾸는 꿈도 꾸어봤지만 접어야 했다. 그와 함께라면 포장마차라도 할 용기가 있는데 내가 그리워하던 바다 근처 마을로 가자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낯선 곳에 와서도 잘 적응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다. 여기가 좋은 이유 중 하나는 가까이에 바다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이사 와서 사흘쯤 지나서 이삿짐을 정리하다 말고 철부지 아이처럼 달려가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제 바다는 실컷 보겠구나.”였다. 그 말처럼 시간만 되면 보러 갈 수 있고 친구들이 오면 마치 내 것인 양 생색내며 바닷가로 데려간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통 크게 선심 쓰듯 나에게 바다를 안겨줬던 그가 좀 아프다. 원하던 고향 근처로 왔는데 병이 나면 안 되는데 안쓰럽다. 인생사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에 대한 실망과 회의로 당뇨합병증까지 와서 고생한다. 아픈 그를 걱정하다가도 공연히 속상하면 바닷가 마을로 밥 먹으러 가자고 한다. 묵묵히 운전하는 남편의 옆얼굴을 보면서 작은 일에도 고마워하고 설렜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하고 생각한다. 자신보다 나를 즐겁게 해주려고 애쓴 날도 많았는데 나는 무슨 불평을 그리했을까. 내가 한 일이라고는 노환으로 누워계신 어머니 돌봐드린 것밖에 없는데.
파도가 철썩철썩 밀려왔다가 하얀 물거품을 남기며 밀려간다. 바다는 평소엔 잔잔하지만, 바람이 거세면 무엇이든 집어삼킬 듯 무섭게 변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과 닮았다. 조금 큰 파도가 바닷가에 찍어놓은 발자국을 지우며 멀어져간다. 지금 거센 바람처럼 다가온 나쁜 일들을 거둬갔으면 하고 바라는 내 맘을 아는 듯이. 그리고 다시 큰 품으로 우리 부부를 안아주듯이 밀려온다. 앞으로는 내가 남편에게 바다가 되라고 가르쳐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