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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혜경 Oct 03. 2023

꽃눈이 내리는 날(2023 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2023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수필부문 선정작

 

  바람이 불자 꽃눈이 하르르 날린다. 온천지를 화사하게 밝혔던 벚꽃이 지고 있다. 금세 꽃눈이 쌓인다. 요 며칠 투석하지 않는 날이면 남편과 벚꽃이며 배꽃이며 꽃구경하러 다닌다. 운전하는 그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으면 괜찮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꽃이 언제까지 있는 것도 아니고, 곧 질 거 아니야? 내가 운전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다녀.” 그의 말이 가슴에 확 박힌다. 자기의 기력이 자꾸 떨어지고 있음을 알고 하는 말이다.      

  남편이 입원한 병실에선 밤마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고성이 들렸다. 병실 바로 앞 치료실에서 났다. 어느 날은 낮에도 들렸다. 가끔 누구누구야 하고 부르거나 "엄마, 엄마.” 하기도 했다. 목소리가 비슷해서 같은 사람인가 했다. 얼마나 아프면 저럴까. 그래도 그렇지, 어른이 계속 저러는 건 일반 사람이 아닌가 보다. 혹시 치매에 걸린 건 아닐까. 여기가 병원이라는 걸 잊고 크게 저럴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다 싶었다.

  우리가 퇴원하기 전날, 옆 침대에 환자가 들어왔다. 딱딱한 보조 침대에서 일주일이 넘게 자면서 가뜩이나 약한 허리가 그날은 구부리지 못할 만큼 아팠다. 너무 아파서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데 엄청나게 크게 울리는 벨 소리가 거슬렸다. 나이 든 환자와 보호자들이다 보니 진동으로 해 놓질 않았다. 그 며칠간 크게 거슬리지 않더니 몸이 아프니 잠이 들 만하면 벨이 울리는데 짜증이 났다. 몇 번을 참다가 진동으로 하라고 싫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

  잠시 후 의사가 와서 문진하는데 아픈 곳이 많은 환자였다. 보호자인 부인도 지쳐 보이는데 내가 괜히 짜증을 부렸다 싶어서 미안했다. 옆 침대 남자는 당뇨가 심하다는데 며칠 전부터 발가락에 상처가 생긴 걸 몰랐다고 했다. 늦은 밤 그 남자가 치료실로 간 다음 ‘아이고’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우리 병실 앞에 있던 치료실의 정체를 알았고 주로 밤에 울부짖던 목소리가 각자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뼈를 잘라 낸 후 고통의 소리였다.

  몇 년 전 남편도 당뇨 발로 고생했다. 운동하다가 신발에 뭐가 들어갔는지 생긴 작은 상처는 낫지 않았다. 마침 손녀의 첫돌과 닿아서 그날이나 지나고 병원에 가겠다는 고집에 나도 동조했다. 당뇨 발이라는 건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자마자 입원했고 운이 좋아 발가락을 절단하지 않고 나았다. 그때를 떠올리면서 감정이 이입돼서 가슴이 아려 왔다. 미안함과 안쓰러움으로 나는 밤새 마음으로 오한을 앓았다. 그 남자는 다음 날 우리가 퇴원 수속을 마치기까지 병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허리가 계속 아팠다. 남편이 다시 입원을 앞두고 있어서 가능하면 집안일은 하지 말라는 딸의 권유대로 공주처럼 지냈다. 딸은 아빠 보살피는 일만 하라고 했다. 엄마가 괜찮아야 우리 집이 편한 거라며 집안일은 신경 쓰지 말고 누워 있으라고 한다. 퇴근해서 늦도록 집안일 하는 것을 모른 척하려니 종일 일하고 온 딸한테도 미안했다. 

  다시 입원한 병동에도 치료실이 있다. 이곳에선 지난번 병동처럼 “아이고.”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치료할 환자들을 위해서 치료실이 있는 듯했다. 가끔 지나가다 보면 열린 커튼 사이로 누워 있는 환자가 있었다. 어느 날 전화가 와서 통화하려고 병실 밖으로 나갔는데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치료실로 들어가는 여자가 보이더니 곧이어 통곡이 들려왔다. 누군가 떠났구나. 이곳은 위중한 환자가 많은 병동이었다. 

  남편은 지난겨울 위기의 순간을 맞아서 갑작스럽게 입원하고 투석을 시작했다. 투석 한 가지로도 견디기 힘들어하는데 간에 나쁜 게 있다고 했다. 색전술 시술하고 나서 자꾸 구토하고 까부라지는 그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나 역시 아무 일에도 대처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 누워 있던 환자는 남편이고, 통곡하는 여자는 나일 수도 있다는 걸 실감하면서 딸에게 살림을 맡기고 아껴 왔는데도 허리가 못 견디게 아팠다. 괴로워하는 환자 앞에서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끙끙 앓았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같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난 순서대로 떠나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그가 아프지만 내가 먼저 잘못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죽음을 떠올리며 삶에 연연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잘 치료받고 나은 사람이 더 많을 터, 치료실 앞을 지나면서도 차츰 마음이 편해졌다.     

   온천지에 꽃들이 피어서 아름다운 봄날이다. 아직 허리가 아파서 복대를 해야 하지만, 나가겠느냐고 물으면 행복한 표정으로 외출한다. 혹독한 시련의 겨울을 이겨 내고 맞은 봄은 찬란했다. 무뚝뚝한 그이도 참 예쁘게 피었다고 감탄을 한다. 해마다 남편은 운전할 줄 모르는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 꽃들이 핀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올봄 꽃 나들이는 어느 해보다 소중하고 오래 기억될 것이다. 언젠가 그이거나 나거나 남은 사람이 오늘을 기억할 때 마음이 아프기보단 이렇게 예쁜 꽃들을 같이 볼 수 있었던 추억으로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는 꽃들조차 아름다운 이 봄날, 소리 없이 꽃눈이 내리고 있다. 


<꽃눈이 내리 날>은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수필부문 선정작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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