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나를 다시 읽다
풍경을 지나며 마음이 정돈되는 순간들
사람이 스스로를 읽는 일은
어쩌면 책장을 넘기는 일보다 어렵다.
내가 나를 오래 들여다본다고 해서
곧장 이해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까이 있을수록
문장의 윤곽은 흐려지고,
삶은 너무 익숙해서 낯설다.
그래서 나는 길을 걷는다.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보기 위해서.
내 마음에서 잠시 떨어져
풍경 속에서 나를 다시 읽기 위해서.
길 위에는 책갈피처럼
하루하루가 끼워져 있다.
아침의 고요한 안개,
정오의 반짝이는 그림자,
늦은 오후의 늘어진 나뭇가지처럼
시간이 감정을 표시하고 지나간다.
나는 늘 바쁜 도시의 걸음에 치이며
생각 없이 목적지를 향해만 걸었다.
시간은 흘렀고, 일상은 반복되었고,
나는 점점 내가 누구인지
잊어갔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어딘가로 가는 길이 아니라,
그냥 ‘어딘가에 있고 싶어서’ 길을 나섰다.
조금은 지친 얼굴로,
조금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날의 길은 조용했다.
도심을 비켜난 골목에는
사람보다 바람이 먼저 걸었다.
담벼락 위의 이름 모를 풀잎,
낡은 카페의 유리창 너머 책에 잠긴 사람,
의미 없이 마주친 풍경들이
내 안의 문장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말들,
삼켜버린 감정들,
“괜찮다”라고 말하며 눌러두었던
수많은 표정들이 조용히
내 걸음에 올라탔다.
풍경은 말이 없었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네가 너무 복잡할 때는
밖을 먼저 읽어보라”라고.
걸으며 나는 나를 다시 읽었다.
‘왜 그렇게 서둘렀던 걸까?’
‘무엇을 지나치며 살아왔지?’
‘이 감정은 언제부터 내 안에 있었을까?’
거리에는 대답이 없었지만
풍경은 질문을 품게 했다.
어쩌면 삶이란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우는 일이 아니라,
쌓인 것들에서
필요 없는 문장을 하나씩 덜어내는 일인지도.
나는 한참을 걸었다.
길은 나를 이끌지도, 밀어붙이지도 않았다.
그저 함께 있어 주었다.
말없이 옆을 걸어주는 누군가처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는 날이 있다.
무거운 생각이 발바닥까지 내려와
땅과 맞닿으며 조금씩 사라졌다.
마음이 천천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꼬였던 문장들이 풀어졌고,
무의식에 감춰두었던 의도들이
조금은 명확한 언어로 떠올랐다.
길은 거울이었다.
창밖의 풍경이 아니라
내 안의 풍경을 비춰주는 투명한 거울.
그리고 나는 거기서
그간 놓치고 있던 나를 다시 읽었다.
늘 강한 척했던 문장,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는 단호한 표현,
속으로 울면서도 웃는 이모티콘 같은
모순된 단락들.
그 모든 걸 천천히 다시 읽었다.
걷는다는 건
내 안의 소음을 정리하고
조용한 문장을 꺼내는 일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감정과
소홀히 여긴 기억들을
다시 주워 담는 일이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마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살고 있다’고 느꼈다.
그저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라
조금은 나 자신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길 위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람이 꼭 무언가를 해야만
스스로를 회복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저 걷는 것,
조금은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는 것,
마음이 알아서 따라오게 내버려 두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회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따금 문득 길을 걷는다.
아무 이유 없이.
단지 나를 읽을 시간이 필요해서.
풍경은 매번 달라지지만
그 안에서 읽히는 나는
조금씩 단정해지고, 조금씩 투명해진다.
삶이 엉킬 때마다 나는 다시 길 위로 나선다.
왜냐하면 나는 안다.
길 위에서 나는
조금 더 나를 잘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