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까지 걸어서 15분 거리인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원래 새벽 5시 30분 정도에 끝나면 해가 솟아오르고 있어서 환해지는 시간에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다음날 나의 일정 때문에 사장님께서 특별히 배려해 주셔서 갑자기 일찍 끝나게 되었다.
새벽 2시.
주변이 온통 깜깜했다.
가방은커녕 지갑도 없었고, 심지어 휴대폰 배터리마저 없었다. 지금은 충전을 쉽게 할 수 있지만, 당시에 쓰던 폴더폰은 배터리를 따로 꽂아서 충전해야 했다. 그냥 집에 얼른 뛰어서 가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게가 있던 번화가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면, 공원과 공원 사이 차 다니는 도로와 도보가 길게 이어진다. 그 길을 쭉 지나고 나면 우리 동네가 나오고,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횡단보도를 건넜는데. 나 혼자가 아니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건너기 전에 편의점에서 한 남자가 나오는 걸 봐서 그 사람인가 보다 싶었다.
달렸다. 집에 얼른 가고 싶어서.
하지만 슬리퍼를 신고 있다 보니 계속 달리는 게 불편해서 다시 걸었다. 그 순간. 이상한 느낌이 감지됐다. 발자국 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분명 어느 정도의 거리를 뛰어 왔는데. 순간 등골이 오싹할 만큼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그냥 뒤에 있는 저 사람도 집에 빨리 가려는 거겠지, 하고 다시 힘껏 달렸다.
그렇게 걷고 뛰기를 반복하며 갔다.
열심히 달리고 나서 다시 걸으면 금방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이상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느껴졌다. 그날처럼 심장박동이 선연하게 느껴지는 적은 드물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경험을 했다.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와. 진정 소름이 쫙 끼친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무서워서 차마 뒤는 돌아보지 못했다.
그냥 힘껏 달려서 드디어 우리 동네에 진입했고, 우리 아파트 단지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때. 아파트 건너편에 문을 연 가게가 딱 한 곳 보이는 게 아닌가. 가게 앞의 야외 테이블에는 성인으로 보이는 4명이 앉아 있었다. 젊은 남성 두 분과 중년 여성 두 분. 나중에 알고 보니 모자 지간이었다. 사람이 있는 걸 보니 괜히 조금 안심이 되면서 갑자기 뒤를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내서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그 남자 역시 우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역시나. 아까 편의점에서 나오는 걸 봤던 그 남자다. 정말 잠깐 돌아서 확인만 하고 다시 앞을 보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들었던 생각은 '우리 아파트 사는 사람인가?'였다.
바로 그 순간. 일이 벌어졌다.
내가 다시 앞을 돌아보자마자, 그 남자가 달려와서 내 뒷머리와 앞 얼굴을 주먹과 가방으로 동시에 세게 쾅 친 것이다.
3초 정도. 기억을 잃고 쓰러진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슬리퍼 한쪽은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나를 안을 것처럼 행동을 하고 있었다.
여중, 여고를 다니면서 선생님들께 새겨 들었던 말이 나도 모르게 스쳤던 걸까.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큰 소리를 지르라던 말씀이.
"꺼져!!!" 하며 그 남자를 밀치고 일어서서,
내가 낼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있는 힘껏 큰 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위기의 순간 튀어나오는 단어는 엄마,였다.
잔뜩 당황해 뒷걸음치던 그 남자의 얼굴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나를 만만하게 봤던 게 분명하다.
다행히도, 내 소리를 듣고 건너편에 있던 젊은 남성 두 분이 바로 달려와주셨다. 그 남자는 줄행랑을 쳤고. 그분들이 쫓아가 보았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동네여서 그런지, 아주머니 두 분 중 한 분이 나를 알아보시고는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해주셨다.
무조건 소리 질러야겠다는 생각만 하느라 미처 몰랐는데. 흰 티셔츠에 피가 범벅이었다.
그 새벽에, 전화받고 바로 달려 나온 우리 엄마.
피범벅이가 된 딸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진다.
엄마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걸어가는데, 놀란 내 몸이 떨리는 건지. 놀란 우리 엄마의 몸이 떨리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으나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엄마 몸이 떨리고 있는 걸.
내 잘못은 아니지만,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죄송했다.
딸 키우는 게 죄도 아니고 우리 엄마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되는지.
몸의 온 근육이 다 놀랐는지, 자다가 경련을 일으키며 괴로워했다. 새벽 5시쯤. 결국 병원으로 갔다.
이후로 그 날 일을 떠올릴 때마다, 그 남자를 떠올릴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위기 속에서 나를 구해준 그분들께. 정말 감사했다.
그날 그분들이 그곳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면 너무도 아찔하다.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사하다. 덕분에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만 하지 않고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을 했다. 이 감사한 마음을 평생 간직하고 살 것이다.
그리고. 그날의 끔찍한 기억은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내 뒤를 따라다녔다. 뒤에 있는 사람이 여자나 학생이라 해도. 오전이나 대낮이라 해도. 뒤에서 발자국 소리만 들리면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는 과연 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 주변에는 마음이 아픈 사람이 무수히 많다.
살면서 트라우마가 한 번도 없었던 사람이 과연 있을까.
누구나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트라우마는 큰 정신적 충격을 준 사건으로 인해 겪는 심리적 외상을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사고나 폭행, 학대, 전쟁 같은 극단적인 경험이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보다 더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 이별, 상실, 수치심을 느낀 경험, 심각한 질병이나 신체적 장애, 실패, 심한 좌절, 관계에서 오는 상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잡하다.
결국 모든 인간은 트라우마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회복할 능력을 갖고 있다.
심리학 제3의 거장 '아들러'의 심리학을 이야기하며 장시간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던 책 <미움받을 용기>에서 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한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인간은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청거릴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닐세. 목적론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생활양식을 자신의 손으로 고르는 걸세.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있네."
살면서 무서운 일을 많이 겪었지만,
트라우마는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 사건들과 21살에 겪은 그 사건으로 여태 '불안증'을 안고 살아왔다. 그 기억들은 나를 오랜 시간 동안 괴롭혔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더 이상 '과거에 붙잡혀 살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서 배우고 성장할 것인가. 과거에 갇혀 살 것인가.
트라우마는 치유할 수 있다. 고난과 역경에 현명하게 맞섬으로써 고통을 치유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을까?
우선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 자체가 치유의 시작이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말한다. "치유는 상처를 없애는 게 아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끔찍해서 기억 저편에 꼭꼭 숨겨놓았던 것,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납치될 뻔한 그날 내가 느꼈던 감정과 오롯이 마주하고, 또 우리 엄마가 받았을 정신적 충격과 오롯이 마주했다. 얼마나 놀랐을지. 얼마나 무서웠을지.
그날 일을 내 머릿속에서 얼마나 많이 재생시켰는지 모른다. 가장 많이 떠오르는 감정은 '공포'와 '분노'였다.
그리고 지금. 그때를 떠올리면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더 많이 든다. 그날 내가 소리칠 수 있게 알려주셨던 선생님들. 용기를 낸 나 자신. 도움 주신 이웃분들. 그리고 우리 엄마. 덕분에 무사히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이후로 내가 그 일을 더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걱정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남동생이 한동안 나를 데리러 나와 주었고, 같이 그 남자를 찾아보자는 친구들도 있었고,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많이 놀라고 무서웠을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공감해준 그들은 나에게 소속감을 느끼게 해 주었고 혼자가 아니란 느낌을 들게 해 주었다. 큰 위로가 되었다.
이렇듯 그 트라우마를 직접 대면하고, 터놓고 말하면서 치유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를 지지해 주고 온전히 함께해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치유의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2021년 올해의 책 중 하나로 꼽혔던 소설 <불편한 편의점>에서 주인공 독고 씨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도 결국 '관계'였지 않은가.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 일을 견뎌내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나 자신이 대견하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참혹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성공한 인물이 떠오른다.
미국에서 '방송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흑인 여성 오프라 윈프리. 1986년부터 25년 간 전 세계 140여 개국 사람들이 시청한 '오프라 윈프리 쇼'의 진행자이자 제작자였고, 2004년 UN이 주는 '올해의 지도자상'을 받았다. 2005년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인물로 선정됐고, 2007년엔 포브스의 역대 미국 여성 부자 10인에 선정됐다.
그런 그녀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40년이 걸렸다고 털어놓았다.
오프라 윈프리는 저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에서 가슴속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면 도대체 뭐가 잘못 됐나가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나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어났던 일'이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한 행위를 직시하고, 우리 삶 속의 트라우마를 덮고 있는 겹겹의 층들을 벗겨 내고, 우리의 과거가 지닌 날것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치유가 시작됩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걸 그만두고, 앞으로 어떨 수 있을지로 생각을 돌려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역경•실망•상실•트라우마는 견디기 힘든 한편으로 타인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로와질 수 있는 역량을 키운다고.
트라우마로부터 치유하는 여정은 느리고 고통스럽겠지만, 그것이 우리 자신만의 강점과 역량을 기르는 과정이라는 걸 기억하고 성장해 가면 좋겠다.
기억하면 숨이 답답하고 심리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고통을 주는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 사건들. 이 또한 온전히 마주하고 치유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길 바란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리더라도.
살다 보면 트라우마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게 해주는 힘 '회복탄력성'이 필요하다. 인생의 크고 작은 트라우마 속에서도 희망과 긍정적 의미를 찾고, 더 단단해지고 강해져야 한다. 끊임없이 일어나고 성장해 나가기 위해.
'자기 자비' 또한 필요하다.
자기 자비는 자신을 친절하게 대하고 존중하는 데 중점을 두는 마음가짐이다.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그런 힘.
그밖에 독서, 명상, 운동, 산책, 여행 등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찾고, '지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원하는 것에 집중해보자.
오프라 윈프리도 이렇게 말했다.
"음악, 웃음, 춤, 뜨개질, 요리. 무엇이든 자연스럽게 위안을 주는 일을 찾는 것은 당신의 마음과 정신을 조절해 줄 뿐 아니라, 자기 만의 선함과 세상의 선함에 늘 열린 자세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답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라는 아들러의 말처럼,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것.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한다.
고난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더 이상 과거의 트라우마적 사건이 내 인생을 망치도록 내버려 두지 말고, 행복한 미래로 걸어가자.
때로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용감하게 현재를 살아가다 보면 더 건강하고 충만한 삶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듣다 자기를 만나면 버선발로 뛰어나가서 반겨야 한다. 내 지난 세월을 누군가에게 다시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도 동시에 공감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를 공감하는 일과 내가 공감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땐 항상 내가 먼저 공감받는 일이 먼저다. 내가 공감받아야 비로소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너를 제대로 공감할 수 있다. 타인을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을 공감하는 일이다."
_정혜신, <당신이 옳다>.
"트라우마는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트라우마 때문에 삶 전체를 망가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조건 아픈 기억을 잊어버리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는 사건을 받아들이고, 상처를 인정해야 합니다."
_김선현, <누구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동안,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지금 여기 당신이 살아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신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희망은 분명 존재한다는 것도요. 신시아가 썼듯이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해지는 일은 가능합니다. 그 일은 한 번에 한 순간씩, 한 걸음씩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