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은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를 괴롭힌다. 그중 하나의 조각을 꺼내어 보았다.
고등학교 때. 우리 동네에 독서실이 생겼다. 타이밍 좋게도. 당시 주변에 독서실이라곤 그곳뿐이었고 차량 운행도 하기 때문에 여러 동네에서 학생들이 많이 왔다.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고 독서실만 다녔다. 어차피 여러모로 학원에 다닐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도 여러 학교의 친구들과 함께 다녀서 더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휴식 공간에서 같이 라면도 먹고 수다도 떨면서. 그때 먹었던 라면은 진짜 잊지 못할 정도로 맛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독서실.
그곳은 내게 즐거움과 불안감을 함께 주는 공간이었다.
수능을 잘 보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도 당연히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건 다른 불안감이다. 우리 독서실 근처에는 큰 병원이 있어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밤에 공부하다가 그 소리가 들려올 때면 몸의 감각이 굳어지면서 긴장을 한다. 혹시나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닐까 하는 과도한 걱정에 휩싸이며.
시험 기간이라고 해서, 고3이라고 해서,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환경 속에서 자라나지 않았다. 아빠는 언제나 '술'이었다. 그나마 줄이려고 노력하는 시기는 있을지언정. 그조차 엄마가 보약까지 해주면서 엄청난 노력을 퍼부어야만 했고. 술을 마시면 집이나 밖에서 어떤 불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많았다.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 보니 우리 가족은 늘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미래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이 아니라 하루하루 무사히 넘기는 게 우선이었던 날들이었다.
어느 시험 기간이었다. 독서실 안에서 공부하고 있던 나는, 누군가의 말에 밖으로 급히 뛰쳐나갔다. 동네 친구 한 명이 "밖에 너네 아빠 오신 것 같아."라고 말해준 것이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미친 듯이 계단을 내려가는데,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가 분명하다.
남학생 3~4명을 앞에 두고, 설교를 퍼붓고 있는 아빠가 보인다. 술에 취한 아빠가 또 한 번 부끄러운 순간이다. 속으로 열이 뻗쳐 오르고.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것만 같다.
"뭐 하는 거야. 얼른 집으로 가."
아빠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 상황에서 차마 남학생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기는 어려웠지만, 슬쩍 살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기에. 그나마 다행인 건, 그 학생들의 얼굴에는 그저 당황한 눈빛뿐이었다. 만약 그 순간 그 아이들의 눈에서 경멸이나 분노의 눈빛을 보았더라면 나는 더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황스럽고 억울했을 것이다. 공부하러 왔다가 아무 잘못도 없이 술에 취한 모르는 아저씨에게 설교를 들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괜히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닌데 말이다. 그땐 그걸 구분하는 게 어려운 나이였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아빠 잘못이 내 잘못인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아빠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를 보내고 곧바로 가방을 챙겨 집으로 갔다. 창피하고 화가 나서 잠시도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가지 않았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미치도록 울고 싶었던 그 마음을.
예민한 10대에게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
그땐 그 남학생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았다. 마치 감추고 싶은 비밀 같은 걸 누군가에게 들키고, 모두가 알아버린 느낌이었달까. 그런 마음을 품게 한 것도 아빠였는데, 그걸 깨트린 것도 아빠인 것이다. 그래도 공부하려면 다시 가야 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많이 하거나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공부에 집중할 환경이 아니었다는 당당한 핑계를 대본다.)
"다신 찾아오지 마!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가만 안 있을 거야!!!" 아빠한테 버럭 화를 냈다. 미안하거나 부끄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져보긴 했을까? 적어도 미약하게는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 다신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정말이지, 얼마나 창피스럽고 화가 났는지 모른다.
아빠 때문에 창피함을 겪어야 하는 상황은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 일은 유독 자주 떠오르면서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
학창 시절의 나는 목표도 없고 환경도 엉망진창이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그러나 엄마를 생각하며 꾹꾹 참았다. 고생 많이 한 우리 엄마. 행복하게 해주고 싶고 웃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 소망과 희망을 품고 있었기에 열심히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기억의 조각을 들여다보며 깨달았다.
나를 오랜 시간 괴롭혔던 기억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서 돌아봤을 때 초연해지는 경우도 있다는 걸. 20대까지 10년 간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혔던 기억인데,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괴로워할 필요 없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당시에는 왜 그렇게 크게 분개했을까.
10대 후반은 여러모로 중요한 시기다. 가뜩이나 여러 불안을 안고 있던 나는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상황인데, 또 다른 불안과 괴로운 기억을 하나 더해준 사실에 화가 났던 게 아니었을까.
나쁜 기억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발버둥 치지 않아도, 내면의 성장을 거듭한다면 자연스럽게 치유가 된다는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도, 내면의 성장을 거듭해도 치유되지 않는 기억도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삶에는 상처입을 날이 수두룩하다.
치유할 수 있는 기억이라면 하나씩 천천히 치유해 가는 게 '지금'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그렇게 치유가 계속되다 보면 가장 아픈 기억의 상처도 조금씩은 옅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