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존재한다. 그 선생님들은 고등학교 때 내게 가장 좋은 영향을 주셨던 두 분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 담임이셨던 이창준 선생님과 도서부 동아리 담당이자 국어 선생님이셨던 홍정의 선생님. 너무너무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그곳에 계시단 걸 알고 있었다. 선생님을 찾아뵙자고 친구들과 말로만 계속했다. 20살, 21살까지만 해도 학교로 바로 찾아갔는데 말이다. 막상 왜 쉽지가 않은 걸까.
당시 반장이었던 김진숙이 선생님께 여쭤봤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도 기억하시는지.
"선생님, 유선이는 기억하세요?"라는 물음에,
"새침데기!"라고 바로 말씀하셨단다. 엉뚱한 짓을 많이 해서 선생님이 왠지 나를 기억하실 것 같으면서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당연히 기억하지 못하실 거라고도 생각했다. 선생님을 좋아했지만 살갑게 다가가는 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나와 홍은정은 기억해 주신 것이다. 너무나도 감동이었다. 기억하지 못했어도 괜찮았다. 우리가 기억하니까.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무조건 찾아뵐 작정이었다.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친구가 잘 전했나 보다. 선생님들이 같이 한 번 보자고 말씀해 주셨단다. 교사가 된 친구 덕분에 이렇게 선생님들과 다시 인연이 닿았다. 너무나도 고맙다. 우리는 즉시 날짜를 잡았다. 만나기 3주 전부터 얼마나 떨리고 설레고 울컥했는지 모른다. 지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지만 실감은 아직 나지 않았다.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하고 식당을 예약했다. 꽃다발은 당일 날 사는 걸로.
드디어 그날이 왔다. 오늘을 위해 기꺼이 반차까지 낸 홍은정 차를 타고 선생님들이 계신 학교로 향했다. 아. 그동안 선생님들 보고 싶다고 얼마나 노래를 불렀던가. 꽃다발을 들고 선생님들 찾아뵙는 상상을 얼마나 했던가.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구나. 잔뜩 부풀어 있는 마음을 안은 채로 학교에 도착했다. 하교 중인 학생들이 보인다. 선생님들은 어디 계실까. 많이 변하셨을까. 그대로이실까. 얼른 보고 싶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예정보다 조금 일찍 왔더니 김진숙은 아직 정리 중이다. 하는 수 없이 홍은정과 둘이서 선생님들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떨린다. 선생님이 우리를 알아보실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예상외로 긴장한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말이야. 긴장된다. 야 일단 화장실부터 가자."
화장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다. 드디어 교무실 앞.
두근거리는 마음을 뒤로하고 문을 열었다. 엇. 장신의 이창준 쌤이 바로 앞에 등장했다. 이제는 교감 선생님이 되신 선생님의 자리가 가운데에 딱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 그래. 유선이, 은정이."
우리가 올 것을 알고 계신 덕분인지 바로 알아봐 주셨다.
바로 선생님들의 회의가 있어서 잠시 인사만 나누고 교무실을 나왔다. 알아봐 주신 게 이렇게 기쁠 줄이야. 긴장이 조금 가라앉는 듯하다. 나중에 선생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만나서 대뜸 "선생님 저 기억하세요?"라고 묻는 건 예의가 없는 거라고 했다. 기억이 나는 학생이 있고 아무리 기억하려고 애를 써봐도 기억나지 않는 학생이 있는 건데 말이다. 선생님 입장에선 무척 난처한 상황인 게 당연하다. 긴 시간 교직에 계시면서 무수히 많은 학생들을 만나실 텐데. 그 학생들을 다 어찌 기억하리. 누구라도 무리다. 우리도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선생님이 알아봐 주신 게 무척 기쁜 일로 다가왔다. 감격스러운 기분이랄까. 선생님을 다시 만난 것도, 기억해 주신 것도. 모두 꿈같고 영화처럼 느껴졌다.
이번에는 홍정의 선생님이 계시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친구가 외친다. "선생님!!" 계단 아래로 익숙한 얼굴이 등장한다. 반가움에 나도 소리를 질렀다. 교무실 밖에서 이렇게 갑자기 마주치니 더 반가웠던 걸까. 그 옛날 표정과 말투, 태도 모두 그대로셔서 더 반가웠던 걸까. 친구와 나는 한껏 흥분된 목소리다. 나와 다르게 홍은정은 평소 차분한 친구인데도 불구하고, 오늘은 다르다. 많이 반가운 모양이다.
예약해 둔 고깃집에서 다 같이 모였다. 선생님 두 분과 마주 앉은 우리 셋. 그 상황이 되니까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기분이 묘하다. 선생님들과 마주 앉아 술을 마시다니. 술잔을 부딪치며 옛 추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어 본다. 홍정의 선생님 댁에 놀러 갔을 때 책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감탄했던 기억, 교실이나 도서관에서 몰래 짜장면 시켜 먹다가 두 선생님께 걸린 이야기, 한 친구가 넘어져서 무릎이 많이 다쳤을 때 선생님이 직접 약국에 가서 약을 사다 발라주신 일, 소풍에서 있었던 이야기 등등. 당연한 말이지만, 선생님들은 우리만큼 그날들을 기억하지 못하신다. 그래도 괜찮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니까. 이날의 감동과 환희를 최대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이창준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아직 30대여서인지 눈빛에 젊음과 열정이 가득하네. 얼굴도 딱 고등학교 때의 얼굴에서 AI로 약간만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일 뿐 그대로다. 그만큼 너희가 잘 살아냈다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된다."
이 말이 반가우면서도 왜 그렇게 울컥했을까.
소중한 제자들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깊은 마음이 느껴져서일까. 이 이야기 말고도 몇 번 울컥했는데 참느라 혼났다. 고등학교 때도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다. 진심으로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이 가득 전해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