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바보

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65/ 덕경편 57장(1/3)

by 신아연


한 열흘 쉬었다 글을 쓰니 그새 뻑뻑해져서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 오래 걸렸습니다. 설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왜 글이 안 오냐고 물으신 분이 어젯밤, 정확히는 오늘 새벽, 한 분 계셨습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 같았지만(명절이라 며칠 글을 쉬겠다고 빨간 글자로 공지했음에도) 곧바로 저와 제 글에 대한 애정으로 바꿔 여겨졌습니다. 제가 뭐라고, 제 글이 뭐라고 기다려 준다는 게 어디인가요?


또 바꿔 생각되길 내쪽에서 아무리 분명히 말한다 해도 상대는 아예 듣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타인도 그럴 수 있다는 것에 어깨에 힘이 탁 풀리며 허탈해졌습니다. 제 일이야 별 일이 아니지만 정말 중요한 사안이라면 여간 낭패가 아닐테니까요.


이 세상은 언어의 세계입니다. 말과 글이 마치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처럼 얽혀 있지요. 각자 자기 언어가 길에 끌고 나온 자기 자동차라고 생각해 보세요. 소통이 원활하면 관계가 잘 흐르다가도 언어의 체증이 일어나면 일순간에 꽉 막혀버립니다. 뛰뛰빵빵, 여기저기 경적소리에 외마디 욕설까지 오간 후에 다시 진정되는 듯하다가 또다시 뒤엉킬 가능성이 늘 존재합니다.


저는 요즘 바보가 되어간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전에는 표현도 날카롭고 따지기도 잘 하더니 언제부턴가 영 멍청이처럼 되어 사람이 재미가 없다고들 하세요. 글쓰는 사람으로선 치명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펜이 뭉툭해지고 잉크가 흐려졌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점점 더 언어를 잃어가려고 합니다. 즐거이 바보가 되려고 합니다. 지난 연휴 내내 힘쓴 것도 '바보 되기'였습니다. 언어를 지우고 그 자리에 존재를 채우고자 합니다. 다른 말로, 혼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영이 온전해지면 혼도 새롭게 씻길테니까요. 뿌리가 튼실하면 가지와 잎이 저절로 윤이 나고 그 열매가 실해지는 것처럼.


영성으로 채우려면 우선 지성의 잔을 비워야 합니다. 여기 컵이 하나 있다고 해 보죠. 그 컵이 내 생각, 내 판단, 내 결심, 내 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도의 이치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내것으로 가득차 있던 컵을 비우느라 제가 요즘 바보가 된 거지요. 세상 즐거운 바보입니다. 바라옵기는 '아닥(아가리 닥쳐)의 지존'이 되어 '온전한 바보'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 도덕경 57장도 바로 그 지성의 한계를 들추고 있습니다. 언어의 수다함, 체계와 제도의 번다함, 조작적 인위의 정치(精緻)함 '그 너머의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 너머를 볼 수 있어야만, 즉 뿌리와 몸통을 북돋워야만 가지와 이파리들이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온전히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내가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고 하셨듯이.


같이 한 번 읽어보고 내일부터 한 구절씩 살펴보도록 하지요.

고맙습니다.


제 57 장


나라는 올바름으로 다스리고

군사는 계책으로 부린다지만

세상은 무위(함이 없음)로 얻는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세상에 금기가 많을수록

백성은 점점 등을 돌리고

날카로운 도구가 많을수록

나라는 더욱 혼란해지고

기교를 부릴수록

이상한 것이 점점 많아지고

법령이 복잡해질수록

도둑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말씀하시길


내가 무위하면

백성은 저절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를 좋아하면

백성은 저절로 바르게 되고

내가 일을 꾀하지 않으면

백성은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무욕하면

백성은 저절로 질박해진다고.




[출처] [신아연의 영혼의 혼밥 602] 하루보듬 도덕경 (57/1장) 온전한 바보|작성자 자생한방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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