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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편한 대로, '라쇼몽 효과'

금요단상 1

by 신아연


오늘은 금요일, 제가 글을 쓰지 않는 유일한 요일입니다. 물론 예정에 없던 청탁이 오면 써야 하지만 제 루틴 상엔 금요일은 휴업입니다. 정리를 겸해 블로그를 뒤적이다 2014년에 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제 책 <내 안에 개있다>에 묶은 글이기도 하지만 저는 이 글을 좋아합니다. 내가 써 놓고 내가 좋아하니 '자뻑' 같지만 다른 사람, 다른 경우도 그렇듯이 제게도 애정이 가는 글이 있기 마련입니다. 7년 전 내용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저의 수양부족인지, 평생 이러면서 사는 건지 모르겠네요. 함 읽어봐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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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인연의 끈’을 끊어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탯줄처럼 질기고도 질긴 ‘징한’ 것부터 투박하고 튼실했던 노끈 같은 연의 끈, 갓 자은 명주실처럼 고이고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애틋한 인연에 이르기까지. 군데 군데 끊어진 거미줄을 한 올 한 올 바느질로 이어주는 예술가도 있다는데, 부부의 연부터 일생 가장 오래 묵은 친구와의 그것에까지 무지막지한 가위질을 한 제 자신이 섬뜩합니다.


이유는 서로 안 통했기 때문입니다. 소통에 절망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해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진실이 나의 진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편한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앞으로도 그렇게 할 겁니다. 어차피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미화하고 심지어 기억을 각색까지 하도록 ‘생겨 먹은’ 존재니까요.


동일한 나무 한 그루에 대한 감상과 평가도 타고난 천성, 자라난 환경, 살아온 경험, 훈련된 신념, 현재의 조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무의식 등이 작용해서 이루어 집니다. 그러니 본질 자체를 쌍방이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고, 본질은 이미 내 속에서 재구성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혹은 여럿이 함께 겪은 경험, 객관적인 현상일지라도 그것을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판단하는 것은 제각각입니다.


인연을 자꾸 끊어내고 정리하다보니 새삼 ‘라쇼몽 효과’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사람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사고의 주관성에 관한 철학 및 심리학 인용 이론이지만,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나 ‘'네 말이 옳고, 네 말도 옳고, 또 네 말도 옳다”고 한 황희 정승의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라쇼몽 효과’는 영화 제목에서 유래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봤습니다. 등장인물의 대사와 표정, 움직임을 통해 매 순간 인간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기에 볼 때마다 무릎을 치면서 제 자신을 비춰 보곤 합니다. 위키백과사전을 참고하면 이런 내용의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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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羅生門, 영어: Rashomon)은 1950년 일본에서 흑백으로 제작된 범죄 미스테리 영화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1951년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최고 영예인 황금 사자상 수상작이다.


일본 헤이안 시대, 헤이안쿄 지방 (지금의 교토 지방)의 폐허가 된 라쇼몽에서 폭우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세 남자가 대화를 나눈다. 그중 한 사람은 나무꾼으로 사흘 전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한 사무라이의 시체를 발견한 뒤 관청에 신고한 바 있다. 또 한 사람은 승려로 역시 같은 날에 그 사무라이와 사무라이의 아내가 길을 지나는 것을 목격했다. 나머지 한 명은 두 사람에게서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들은 관가에서 차례차례 진술을 한다. 사무라이를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된 한 산적과 산적에게 겁탈을 당한 사무라이의 아내도 진술을 한다. 하지만 사무라이의 죽음에 대한 두 사람의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무당을 통해 죽은 사무라이의 영혼을 불러와 그의 말도 듣게 되지만 산적과 사무라이, 사무라이의 아내 등 세 사람이 한 장소에서 직접 연루된 사건이건만 세 사람 모두 말이 제각각이다. 거기다 네 번째 진술자까지 등장, 딴소리를 늘어놓으니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든다.


같은 사건을 겪고도 인물마다 진술이 다른 이유를, 진실은 분명 하나인데 사람마다 달리 기억하는 연유를, 영화는 자기 입장을 유리하게 포장하려는 인간 심리 탓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짓, 욕망, 허위, 허영, 공명심, 비열함 따위의 인간 본성이 동일한 사건에 대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게 만들고 그 각각이 그럴 듯한 개연성을 갖는 것도 그런 연유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자기중심성, 탐욕이 진실과 기억을 왜곡시킨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등장인물 중 승려는 사람끼리 믿지 못하는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합니다.


“무서운 얘기요, 이 일로 인해 난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될지도 모르겠소. 그건 도적떼보다도, 전염병보다도, 기근과 불, 전쟁보다도 무섭고 나쁜 일이오.”


이에 대한 대답은 또 다른 등장인물을 통해 “라쇼몽의 귀신들도 인간이 무서워서 모두 달아나 버렸다”는말로 돌아옵니다.


제가 미련 없이 인연을 싹둑싹둑 자르는 것도 지옥을 택하기로 마음 먹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면 이미 지옥이라지만 나는 '나의 최선'을 다했고 상대는 '상대의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서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함께 몸 담고 있는 곳이 지옥이라면 하는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영화 <라쇼몽>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인간의 다른 조건’을 보여 줍니다.크게 보면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겠지만, 더 크게 보면 인간은 규정 자체가 불가능한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맺었던 인연을 스스로 잘라 낼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처지가 앞설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게 변함없는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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