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철학을, 철학에 일상을 5
주말이면 나는 주로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시간을 보낸다.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이따금 공연도 보고 주변도 산책한다. 엊그제도 일찌감치 로비로 들어섰는데 한 중년 남성이 쓰러진 채 구급대원의 응급처치를 받고 있었다. 브런치를 먹다 탈이 난 걸까.
1년 전쯤에도 비슷한 일을 목격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목격이 아니라 내가 현장 가운데 있었다. 시내 중심가의 한 영화관, 영화를 보고 막 나왔는데 로비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얼른 달려가 그 사람의 상태를 살피고 안정적인 자세로 눕힌 후, 매점 직원에게 119에 연락하라고 하고는 주변에 흩어져 있는 핸드폰 등 소지품을 끌어모았다. 경황없는 몇 분이 그렇게 흐른 후 고개를 들자, 이 무슨 광경인가. 좋이 백 명은 됨 직한 사람들이 뺑 둘러서서 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이거 몰래 카메라 같은 설정 상황인가, 그럼 이 남자도 지금 연기 중?’ 이런 생각이 퍼뜩 스쳤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떻게 한 명도 함께 돕지 않고, 붙박인 듯 서서, 보고만 있을까 말이다. 마침 남자의 의식이 돌아왔기에 극장 직원에게 나머지 일을 부탁하고 머쓱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그때까지도 꼼짝 않고 서 있다가 내게 길을 터주는 사람들의 시선을 등 뒤로 의식하며.
‘그 시추에이션 뭐였지? 현실감이 너무 없잖아. 어떻게 구경만 하고 있지? 되레 내가 이상한 건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몇 걸음을 옮기는데 그제야 오싹한 현실감이 찾아왔다. 막 경험한 사실로 예단컨대,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을 거라는 현실감. 비상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모호한 불안과 공포가 정서적 미세먼지처럼 잠재되어 있다가 그날 내게 구체적인 얼굴로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는 허황된 믿음과 착각 위에 서 있는지 모른다, 나는 안전할 것이란. 하긴 삶 자체가 거대한 허상이지만.
신아연『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