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회어린 그 번호 '4435'

일상에 철학을, 철학에 일상을 27

by 신아연

4435번 버스.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번호. 그 번호는 예전의 친정 전화번호와 뒷자리가 같다. ‘856-4435’, 나는 9년 전 이맘때 이런 글을 썼다.


전화번호 따위가 뭐라고, 상황 따라 바뀔 수도 있지 할 테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번호 이상의 의미였다. 오래 가까이 해온 물건일수록 생명을 지닌 듯 정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조합에 불과한 추상적 번호에서조차 그럴 수 있다니.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집에 처음 전화를 들여놓은 후 한 번도 바뀌지 않았으니, 그 번호는 얼추 40년 간 가족의 대소사를 실어 나르며 집안의 지난한 역사를 지켜보았다. 우리 4남매의 대학 합격과 낙방 소식, 가슴 졸이며 기다리던 애인의 연락, 무기징역을 사시던 아버지의 하루 동안의 귀휴와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의 가석방, 형제들의 결혼, 조카들의 탄생, 45세 오빠의 암 선고, 그리고 1년 후의 사망, 아버지의 치매, 4년 후 돌아가심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이 수많은 사연들을 담아내던 ‘4435’는 가족과 떨어져 호주에 살고 있던 내게는 의미가 더욱 컸다. 4435를 누르기만 하면 언제나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어머니의 한결 같은 위로와 격려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내심 나는 그 전화번호와 어머니는 함께 소멸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4435의 부재는 곧 친정의 부재라는 결론도 미리 내려두었다. 오빠와 아버지가 먼저 떠난 친정에서 어머니가 안 계시면 더 이상 그 번호를 지켜 줄 이가 없으니… 신아연 「소중한 그 번호 856-4435」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당대


그랬던 전화번호는 어머니를 앞서 홀연히 세상을 버렸다. 약간 어이없는 연유로. 몇 년 후 어머니도 떠나셨다. 그때부터 나는 친정 전화번호와 어머니를 묶어서 추억하는 버릇이 생겼다. 지난 금요일, 감회 어렸던 그 번호의 버스를 탈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새삼 그리웠다. 더욱이 어머니는 내 글 중에서 이 글을 제일 좋아하셨기에...


keyword
작가의 이전글죽음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위대한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