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수업 11
엊그제 한 독자가 이런 카톡을 보내오셨습니다.
"저는 이생에서 포기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집을 샀어요. 읽는데 머리에 쥐가 나다가도 '이래서 고전이구나' 하면서 완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때가 바로 이런 때지요. 수준 높은 독자들이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제가 '의식의 고아'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도 바로 이런 때구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어떤 소설입니까. '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 이라는 평을 듣는 소설이지요. 인간 지성의 최고봉인 거지요.
이 책을 읽었다는 사람 앞에 우리는 한 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인간 존재의 극한인 죽음의 의식을 체험해 봤다는 사람 앞에 생의 자잘한 근심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듯이. 인간은 자고로 지성적이여야 합니다. 신의 본질이 영성이라면 인간의 본질은 지성이니까요. 남녀불문, 나이고하를 떠나 지적인 사람이 가장 매력있는 것도 그래서지요.
스위스에서 돌아가신 분과의 첫 대화도 이 소설에 관한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은 풍부하고 예민한 공상가적 인물로 사교계를 출입하며 사회적인 명성과 여인들을 동경합니다. 저의 젊은 시절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마들렌을 먹다가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가야할 길을 자각합니다. 시간의 위대함을 알게 되면서 그는 예술만이 시간의 파괴력을 이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저는 암이 발견되고 나서 시간의 흐름과 삶의 의미를 깨우친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시간 앞에서는 그저 덧없이 흘러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소설은 주인공이 동경했던 이들이 늙고 초라해진 채 게르망트가 파티에 참석한 모습을 길게 묘사합니다. 인생은 언제나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일 뿐입니다. 저도 지금 시간의 덧없음을 절감합니다."
떠나시기 두 시간 전 쯤, 그분은 우리에게 시계를 선물하셨습니다. 시계가 곧 시간은 아니지만 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지요. 우리에게 시계를 나눠주던 그 시각, 서서히 피가 식듯 그분의 시간은 멈춰져 가고 있었지요. 하필 시계의 나라 스위스를 택해 죽음의 세계로 떠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집니다.
사람에게는 살아있을 때는 별로 그렇지도 않았으면서 죽고 나서 그 사람과 엄청 친하고 가까웠던 것처럼 말하는 심리가 있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분이 그립습니다. 가슴팍이 뻐근하도록 그립습니다. 그분의 소년 같은 활달한 어투와 진솔하고 유려한 문장,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아름답던 그 향기가 사무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잃어버린 시간 속의 일입니다.
이 좋은 계절이 그 지독했던 여름을 '잃어버림으로써' 올 수 있었음을 알면서도, 마치 시간은 좋은 것을 다 앗아가고, 소중한 것을 다 잃게 만드는 괴물처럼 느껴집니다. 인생은 참으로 덧없습니다. 시간 속에 태어나 시간을 살다가 시간을 잃어버린 후 도대체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