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뽕도 다 되었나 보다. 아이를 위해 남편이 들어 놓은 피아노 스쿨도, 동영상 강의 미꽃체 필사도, 일본 여행을 위해 야심 차게 준비한 일어 회화도, 도서관에서 이 분야 저 분야 가릴 것 없이 빌려다 놓은 책 탑도 이제 보기에 시들시들하다.
연말을 앞두고 3일, 연초가 지나고 일주일 가까이 가열차게 달렸으니 힘이 빠질 만도 하다. 일인용 소파에 오토만, 식탁 의자까지 붙여 만들어놓은 휴식 자리에 길게 누워 발을 까닥까닥하며 낮잠 속으로 잠시 피할까 생각하지만, 아침 루틴으로 마셨던 캡슐 커피 카페인이 아직은 유효한 시간 오전 열 한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책상 앞에 붙들려 지박령처럼 이 쓸 궁리 저 쓸 궁리를 하고 있을까. 샤워하면서 낮게 뇌까려보지만.
훠이 훠이 생각을 물리치고 씻고 나와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점심을 차린다.
냉동실 삼겹살 두 장에 신김치로 김치찌개를 만들고, 꽃 맛살을 잘게 다진 뒤 다섯 알의 달걀 탁, 파를 송송 썰어 계란말이를 부친다. 식사 후 남편이 들이미는 패드 속 도쿄 가스 광고를 보며 ‘엄마들 특’에 대해 설전을 벌여본다.
‘한국 엄마들은 왜 밥 먹으라고 해놓고 와서 보면 밥상에 밥은 하나도 안 차려져 있는가. ’
‘그러니까 네가 엄마의 마음이 아닌 거야. 식은 밥 먹지 말라고 그런 거잖아.’
밥 다 되었다고 하면 재깍 앉아 밥을 먹는 아이와, 잠자리에 붙들려 도대체 일어나지를 못하는 남편 사이에서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새는 식사 차리기 중간쯤 아이에게 아빠를 깨우라 이른다.
이게 아니면
쌀 앉히기 전 남편한테만 전화로 닦달해 깨워 거실서 뒹굴게 만들고, 밥 다 차리고 아이를 부를까?
우리의 난제는 언제 해결될까.
지겹다.
씻고 싸고 밥먹고 치우고 차리고 밥먹고 치우고 차리고 밥먹고 치우고 씻고 자고 다시 씻고…. 이것만은 만국 공통 만인이 하는 기본적인 일일 것이다(차리고 치우고는 빠질 수 있겠지만)
그러나 내 마음의 중심은 항상 글쓰기에 있다. 마음에도 심지가 있다면 그 흑심은 창작이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도대체 어디에 쓰겠다고...
김 현 선생이 문학은 무용하기 때문에 우리를 억압하지 않으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거늘, 이 무용함에마저도 억압당하는 나의 마음은 무엇인가.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역시 나는,
‘무엇이든 즐기는 자를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노력보다 즐거움이다. 즐겁지 않으면 때려치워! 그것이 정답.’
조용히 중얼 중얼 스스로를 위안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어느덧 오후 4시 30분.
이 지겨운 다람쥐 쳇바퀴(미디어 시대, 이 단어만 떠올려도 정말 내 머릿속에서는 다람쥐가 귀엽게 쳇바퀴 돌고 있는 영상이 플레이된다_ 곧 내 인스타에도 광고로 뜨겠지) 같은 일상을 생각하며, 안톤 체호프의 수 백 편되는 단편들을 떠올린다. 그 단편 속 지겹도록 반복되는 인물들의 일상. 마흔 몇 살밖에 살지 못한 양반이 진료를 보면서 엄청 바빴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지리멸렬한 인간 군상들을 질려하지도 않고 열심히 묘사하셨었는지.
다시 저녁을 부스럭거리며 준비하며 나는 에어팟을 귀에 꽂는다. 윌라 오디오북에서 스토너를 재생한다.
“모르겠나 스토너군?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쎄!”(성우의 연기가 대단함)
이게 누굴 향한 일갈일까. 페이지 속 스토너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되었다. 이제 다시 되었다.
‘당분간은 또 재미있겠군.’
내일의 불씨를 발견하고 슬며시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