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가깝게 살게 된 친정집에 갈 때면 빈손으로 가는 법은 잘 없다. 동네에서 맛있다고 하는 빵집, 추어탕 집, 떡집, 고깃집의 음식들을 여력이 되는 한 챙겨 들고 간다. 거기에 지난번에 가지고 간 반찬통이나, 마트에서 1+1로 산 티슈나 생필품까지 한 짐 가득 들고 올라가면 영락없는 거주자 모양새다. 아니면 가사를 도와주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활짝 열어젖힌 뒤 큰 소리로 외친다.
"00이 왔다! "
라거나,
"둘째 공주 왔다!" 라고.
일전에 어느 유튜버의 브이로그를 보는데, 아내인 유튜버가 퇴근 후 집에 들어갈 때 제 이름을 힘껏 부르며 들어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다 티브이 프로그램의 오은영 박사가, 어느 초등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현관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자존감이 높다_라는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 가정에서 아이가 생각하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고 했던가_ 유투버의 현관 리츄얼이 그래서였을까, 내 맘에 남아있었던 것은?
친정이 가까이 이사 오고 나서부터 나는 나도 모르게 친정집에 들어갈 때면 어릴 적 내가 되곤 한다. 어릴 적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던, 할 수조차 없었던 일을 하게 된다. 나는 크게 내 이름을 부르고 들어선다. 소파에서 낮잠을 주무시거나, 식탁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있던 엄마가 반가운 얼굴로 나선다. 나는 엄마를 한 아름 껴안는다.
“잘 있었어?” 엄마에게 묻는다.
생전 포옹하는 법, 다정한 제스처를 취하는 법을 모르던 엄마는 수십 번 이어진 나의 허그에 손사래 치더니 이제는 익숙(체념)해지셨다. 나는 엄마도 껴안고 아빠도 뒤에서 안는다. 이런 변화는 어릴 적 우리 집 분위기를 떠올려 보면 놀라운 것이어, 엄마가 만약 서로 안아 준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랄 것이다.
최은미의 작가의 장편 ‘마주’를 보면, 작중 화자가 자신이 걸렸을지도 모를 결핵의 연원을 되짚고 헤집는 모습이 나온다. 십수 년 전 어떻게 하다가 자신이 결핵에 걸렸을지. 그러다가 너무도 큰 상처여서 자기 방어적으로 닫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의 한 장을 열게 된다.
엄마가 마음이 매우 아팠을 때, 엄마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때를 떠올렸다. 그 사람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을 아줌마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입에 올렸다. 가닿을 곳 없는 그 마음이 안타까웠다. 엄마는 내게도 잘못했다고 했는데, 내 잘못을 묻지는 않으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당시 엄마의 회한이 ‘자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편 소설 ‘마주’는 아삭아삭한 사과 맛이 나는 작품이다. 작품 속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만조 아주머니가 사과 장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과가 굴러다니고, 사과가 빛나고, 사과가 나무에서 따지고, 사과가 술로 빚어지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인간의 관계를 다룬 소설이기에, 인간의 내면을 깊이 가르는 소설이기에 주제는 사과처럼 아삭하고 그럴 수는 없지만.
작품을 읽으며 과거의 연원을 찾는 화자의 모습에서 나는 나와 엄마의 모습을 본다.
어제 아이는 아빠에게 고민 상담을 신청했다.
엄마가 약을 왜 먹지 않느냐고 버럭 하는 상황(그제의 글 ‘이완의 자세’ 참고)에서 자신이 엄마에게 대거리를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자꾸 상상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엄마의 버럭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고, 사춘기 호르몬으로 자신이 자꾸 대들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참다 보니 마음이 무거워, 꽤 객관적이고, 엄마에게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아빠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듯했다.
(순둥이인 줄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
셋이 모인 자리에서, 아이가 이런 고민을 자신에게 털어놓았다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그런 상황에서 참았던 자(큰언니)와 참지 않았던 자(나), 그리고 그런 상황을 일으킨 자(엄마)에 대해 이야기해 줬고, 이런 일들이 수십 또는 수백 번이 반복되면 세 명 모두 불행하게 된다고 했다(역시 그제의 글 참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런 마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 볼 만한 가치가 있으며, 이런 상황이 촉발되기 전 서로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해 주어 정말 고맙다고도 했다.
단둘이 있을 때 내렸던 남편의 처방법은 의외로 심플했는데, 아이에게 ‘엄마의 그런 잔소리와 꾸중이, 너의 입장에서는 귀찮은 것이 아니니?’ 하고 물었다고. 그랬더니 아이의 대답은,
“네.”
“귀찮다’의 어원은 ‘귀하지 않다’에서 나왔으니, 엄마의 그런 관심과 사랑이 귀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구나.”
도덕책에서나 볼법한 남편의 해법이 웃음이 나오면서도 우리 셋의 말은 모두 정답이면서 정답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아침에 두 번, 저녁에 두 번 시간을 달리해 약을 먹는다. 하나는 시간을 꼭 지켜 먹어야 하는 것이고, 아이의 상태와 직결되는 것이기에 나는 신경이 곤두선다. 약 복용 여부는 중요해 잘 먹었겠거니, 하고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내 몸 건강해지라고 하는 것도 귀찮아서 어른들도 잘하지 못하는 마당에 시켜서 해야 하는 것이니 아이도 귀찮을 만하다.
이것을 생활 자체를 확대해 놓고 생각해 보면 삶은 매 순간 그런 것들의 연속이다.
그러니 너도나도 반보씩 마음을 물러나 앉힐 수밖에.
모든 반복될 잘못들을 마주 보며 다독이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