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이 첫 만남
스포가 있음
일제 강점기 시대의, 화자의 증조모로부터 현재를 살아가는 화자까지, 4대에 걸친 여성들의 교감과 연대에 관한 이야기.
일제 강점기, 전쟁기, 피난기, 피난 이후 해방사회, 현대, 그리고 현재.
그 상황 속에서 편견과 차별과 억압, 불행을 겪는 여성들의 이야기.
가장 주요한 장면은, 나와 할머니가 만나 과거를 듣고 나누는 상황.
작품의 많은 부분이 과거의 증조모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현재의 할머니를 만나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소소하고 다감한 그 시간들의 세목들이 좋았다. 일과를 정리하고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와 만나는 느낌으로 독자인 나도 자꾸만 그 자리에 초대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두께가 꽤 있는 그 책 속으로, 화자인 나와 할머니가 만나는 그 방으로, 그곳으로 가고 싶어 읽기가 끊겼던 책을 다시 집어 들고는 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책의 처음부터 마지막을 관통하는 유일한 갈등은 화자와 엄마와의 갈등.
사랑하는 마음은 같지만 -가치관과 그것을 둥글게 표현하지 못하여- 어그러지는 대화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낸다. 책 마지막까지 두 세대는 화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조모와 화자의 엄마도 마찬가지. 조모와 엄마와의 갈등, 엄마와 나와의 갈등. 결국 엄마는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하고 이야기가 끝난다. (내가 읽은 바로는.)
한 핏줄이어 그런지, 엄마 제외한 증조모, 조모, 화자인 내가 비슷한 인물 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최은영 작가의 데뷔작 쇼코의 미소도 윗세대와 다음 세대의 교감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보다 더 어른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늘 포기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작가가 잘할 수 있는 긴 흐름의 인물 간 교감이 이 소설에서도 빛을 발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세비 아저씨를 제외하고 남성들은 다소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에 나온 여성들은, 일찍 죽은 세비 아저씨에게 사랑받은 세비 아주머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박복하고 남성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진배없는 삶을 살아왔다. 사랑 없는 삶이 그런 거라면. 그것은 그리고자 하는 여성연대를 돈독하게 해 보일지는 몰라도 쉬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불화하는 자녀와, 나의 어머니와의 화해 보다, 전쟁의 시대를 힘겹게 지나 스스로 독립하여 성공한, 결혼하지 않은 희자 이모와 만나는 장면이 더 의미가 있고, 방점을 찍을 만한 것인가에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전쟁 훨씬 이후 세대인 내게, 이북의 사투리는 항상 어떤 편견을 불러일으키는데, 책을 읽는 동안 공감하는 화자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그 어투가, 그 억양이, 전쟁 이전 우리와 한 민족의 언어였다는 것을 환기시켜 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 환기가 내 의식의 단단한 면을 어루만져 부드럽게 굴려주는 것이 좋았다.
단편이 아닌, 이 장편으로 최 작가를 처음 만나는 사람도 최 작가의 작품 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천착이 고스란히 전체 문장에 드러나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이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