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가르쳐준 적응의 시간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시리즈 9 (13)

by 이민자의 부엌


이민을 온 뒤, 나는 계절을 다시 배웠다.


한국에서의 계절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익숙한 리듬이었다.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매미 소리가 들렸으며, 가을이면 낙엽이 쌓였고, 겨울이면 눈이 내렸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굳이 나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계절은 배경이었고, 나는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숨 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의 계절은 달랐다.
이곳의 계절은 풍경이 아니라, 나를 시험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특히 겨울은 길고 깊었다. 해는 일찍 저물고, 공기는 날카롭게 폐 안으로 들어왔다. 눈이 내리면 도시는 조용해졌지만, 그 고요함은 따뜻하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왔던 해, 나는 해가 지기 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걷곤 했다. 미끄러운 길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내가 정말 이곳에 서 있는 사람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묻던 저녁들이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하루 종일 침묵했던 날들.
사람들의 농담에 웃어야 할지,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몰라 애매한 표정을 지었던 순간들.


그 겨울은 나를 단단하게 했을까. 아니면 그저 무뎌지게 했을까.
지금도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시간 동안 나는 나를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누구의 기대도 닿지 않는 낯선 공간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과 마주했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그 질문은 눈처럼 조용히 쌓였고, 쉽게 녹지 않았다.


눈이 녹기 시작하던 어느 날,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작은 연두빛 싹을 본 적이 있다. 겨울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는데, 그 작은 생명은 이미 땅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적응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결심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래 준비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고.


봄이 오자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읽히기 시작했다. 언어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았지만, 침묵이 더 이상 나를 위축시키지는 않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감각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스며들었다.


여름이 되면 하늘은 믿기지 않을 만큼 높아졌다. 저녁 아홉 시가 되어도 밝은 거리에서 사람들은 웃고, 아이들은 뛰어다녔다. 그 밝음 속에서 나는 문득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실수해도 괜찮았다.
문장이 어색해도 괜찮았다.
조금 느려도 괜찮았다.


나는 완벽해지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정했다.


가을은 짧지만 솔직했다. 숲은 붉고 노랗게 자신을 드러냈고, 숨길 것 없이 계절을 통과했다. 나는 그 나무들을 바라보며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흔들렸던 선택들, 포기해야 했던 것들, 그리고 쉽게 말할 수 없었던 외로움.


회복은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때 배웠다.
회복은 변한 채로 균형을 다시 찾는 일이라는 것을.


한국에서의 나와 캐나다에서의 나,
엄마로서의 나와 한 사람으로서의 나.


이 얼굴들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았다. 때로는 서로 충돌했고, 때로는 어색하게 겹쳤다. 나는 오랫동안 그 충돌을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이민자의 정체성은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겹쳐진 채로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어디쯤 서 있는 사람일까.
한국에서도 완전히 예전의 내가 아니고, 캐나다에서도 완전히 이곳의 사람이 아닌 채로.


어쩌면 나는 계절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겨울과 봄 사이, 여름과 가을 사이처럼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 지점에서.


하지만 이제는 그 경계가 두렵지 않다.
계절이 가르쳐준 것은 안정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나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겨울의 고독이 없었다면 나는 질문하지 않았을 것이고,
봄의 흔들림이 없었다면 희망을 쉽게 믿지 못했을 것이며,
여름의 밝음이 없었다면 자유를 허락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없었다면,
나는 변한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이 도시에서 누군가의 낯선 시간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을 한다. 그들을 바라보며 가끔 생각한다. 나 역시 한때는 그렇게 길고 깊은 겨울을 통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사실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다만 조금 더 조용하게, 조금 더 오래 견딜 수 있게 할 뿐이다.


오늘도 나는 계절의 언어를 배우며 살아간다.
완전히 익숙해지지도, 완전히 낯설지도 않은 자리에서.


그리고 가끔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여전히 변하고 있는가.


아마 그렇다고 믿는다.
계절이 멈추지 않듯, 나 또한 멈추지 않을 테니까.


계절처럼, 나도 변한다.
그 변화 속에서 나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나다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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