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법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시리즈 9 (14)

by 이민자의 부엌


이민을 온 뒤, 나는 타인의 시선을 이전보다 훨씬 자주 의식하게 되었다.
낯선 언어를 쓰는 사람들, 다른 억양을 가진 사람들, 그 문화 속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한 나. 그들의 시선은 때로 호기심이었고, 때로는 친절이었으며,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이었다.


이민자는 늘 ‘보이는 존재’ 이자 동시에 ‘보이지 않는 존재’ 다.
사람들 속에 서 있지만 어딘가 투명해진 것 같고, 또 어떤 날은 지나치게 또렷해져 숨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서 조용히 방향을 찾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할까.
어디쯤에 나를 놓아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처음부터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낯선 언어 속에서 말을 꺼낼 때마다, 내가 살아온 삶의 결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설명은 했지만 설명이 다 닿지 않은 느낌. 웃으며 넘겼지만 어딘가 남아 있는 얇은 막 같은 거리감.


입사 초기, 회의 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준비해 간 의견을 말하려고 손가락 끝에 힘을 주고 있었는데, 문장이 입안에서 한 박자 맴도는 사이 대화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 누군가 가볍게 농담을 던졌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웃었다. 나도 함께 웃었지만, 그 웃음은 반 박자 늦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왜 늘 타이밍을 재고 있어야 하지.”


누구도 나를 배제하지 않았고, 모두는 여전히 친절했다.
그럼에도 나는 알았다.
이곳에서 중심을 잡는 일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기의 흐름을 읽고, 말의 온도를 맞추고, 관계의 리듬을 타는 감각이 필요했다.


그 감각을 익히는 동안 나는 자주 스스로를 의심했다.
억양 하나로 판단받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고, 문화적 차이로 의도가 다르게 전해지기도 했다. 상담 현장에서 건넨 한 문장이 예상과 다른 반응으로 돌아왔던 날, 나는 밤늦도록 그 장면을 되짚었다.


내가 부족한 걸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타인의 시선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시선에 나를 맞추기 시작하면, 내 삶의 중심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작은 연습을 시작했다.


말이 막히면, 그 순간을 인정하기.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천천히 다시 설명하기.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에게 말해주기.


“괜찮아. 너는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 한마디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들을 무시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그 시선보다 내 안의 목소리를 조금 더 신뢰하는 일이었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완벽한 이민자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내 방식대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이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되었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낯선 땅에서 언어와 문화, 관계 속에서 흔들리는 이들의 마음을 마주한다. 그들의 눈빛 속에서 과거의 나를 본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본다.


우리는 쉽게 타인의 평가 속에서 작아진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다 보면 깨닫게 된다.
사람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자기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작은 용기들이라는 것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늘 주변을 살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너무 가까워지지도, 너무 멀어지지도 않은 거리에서 숨을 고른다.
말이 서툴러도 괜찮고, 한 박자 늦어도 괜찮다.


길을 걷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나는 더 이상 시선에 갇힌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 중심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20여 년의 캐나다 생활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타인의 눈으로 나를 재단하지 않는 법,
내 안의 목소리로 나를 판단하는 법,
그리고 그 목소리와 함께 삶을 만들어가는 법을.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결국 나를 회복하는 길이었다.


오늘도 서로 다른 억양이 오가는 거리 위를 걷는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엇갈린다.
그 사이에서 나는 더 이상 숨지 않는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말한다.


나는 이제,
내 방식대로
내 속도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오늘의 나를 단단하게 세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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