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의 온도> 시리즈 10 (3)
익숙한 것들과 작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늘 사용하던 말투, 친구들과 나누던 소소한 대화, 계절마다 돌아오던 가족 행사, 그리고 나를 지켜주던 일상의 루틴. 이 모든 것이 새로운 땅에서는 어느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진 듯 느껴졌다. 캐나다에 사는 지금, 모든 것이 낯설고 나의 익숙함은 잠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20년 전, 내가 처음 캐나다 땅을 밟았을 때를 떠올린다. 길 위의 풍경, 슈퍼마켓 진열 배치, 동네 사람들의 인사 방식까지, 모든 것이 생경하고 압도적이었다. 익숙함의 부재는 불안을 만들었고, 불안은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한국에서는 눈치로 자연스럽게 줄을 맞추던 내가, 여기서는 모두가 정해진 방식대로 차분히 줄을 서 있었다. 그 작은 장면에도 ‘내가 알던 세계’와 ‘지금의 세계가 다르다’ 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났다.
서점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이민 초기, 소설 “The Notebook” 을 찾고 있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직원에게 물었더니, 그가 가리킨 곳은 소설 코너가 아니라 실제 노트들이 놓인 진열대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더 노우트북 (t가 약해진 발음)” 이라고 해야 했는데, 한국식으로 “더 노트북”이라 발음해 오해가 생긴 것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음이 작아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익숙함이 사라진 자리의 허전함은 생각보다 넓고 깊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작별이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만나는 과정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익숙했던 한국어가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아도, 엄마의 음식이 그리워 마음 한켠이 허전해도, 나는 조금씩 이 땅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적응하고 있었다.
익숙함과 작별하는 과정은 마음의 연습이 필요했다. 하루하루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서툴러도 돼. 낯설어도 괜찮아.”
그 말은 외로움 속에서 나를 붙잡는 밧줄이 되었고, 낯선 일상 속에서 내 중심을 지켜주는 작은 힘이 되었다.
익숙함을 놓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쌓아온 경험과 기억은 여전히 나의 일부였고, 이곳에서 새로 배우는 언어, 문화, 사람들과의 관계는 또 다른 나를 만드는 재료였다.
눈길을 걸으며 문득 깨달았다. 익숙함의 부재는 단지 두려움만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주는 순간이었다. 익숙했던 삶을 내려놓는 순간, 나는 나만의 속도로 세계를 다시 읽고, 다시 느끼며,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작별은 상실이 아니라 나를 다시 발견하는 연습이었다. 그 연습 속에서 나는 내 목소리를 조금 더 깊이 듣고, 내 마음이 원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낯선 환경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만의 루틴을 만들었다.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 한 잔, 동네 공원을 천천히 산책하는 시간,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준비하며 나누는 짧은 대화들. 이 작은 순간들이 쌓여, 나는 이곳에서의 삶을 ‘내 삶’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함을 놓는 일은 때로 아프고, 때로 그리움이 차오른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나를 잃지 않고, 오히려 더 온전하게 살아간다. 한국에서의 나는 여전히 내 안에 있고, 캐나다에서의 나는 그 위에 천천히 쌓여가고 있다.
어떤 날은 여전히 한국의 냄새가 그립다. 비 오는 날의 흙냄새, 엄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의 구수한 향, 친구들과 늦게까지 웃으며 걸었던 골목길의 공기.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리움이 있다고 해서 내가 이곳에서의 삶을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익숙함과의 작별은 떠남이 아니라, 확장의 과정에 가까웠다. 내가 가진 세계가 넓어지고,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이 깊어지며, 품을 수 있는 삶의 형태가 다양해졌다.
나는 떠났지만, 내 안의 기억과 뿌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 뿌리가 있었기에 낯선 땅에서도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찾을 수 있었다.
오늘도 나는 익숙한 것들과의 작별 연습을 이어간다. 때로는 놓아야 하고, 때로는 붙잡아야 하며, 때로는 뒤돌아보고, 때로는 앞으로 걸어간다. 이 땅에 살아가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다양한 이민자들의 문화 속에서 이별과 포용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모든 과정이 나이듦의 온도를 조금씩 따뜻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속삭인다.
“나는 떠나지만, 나의 기억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이 작별의 시간, 익숙함을 놓는 과정, 모든 낯섦의 경험이 나이듦의 온도를 만들어가는 또 하나의 장면임을 이제는 천천히 받아들일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이 낯선 땅에서 조금씩 익숙함을 만들어가는 나의 이야기를 이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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