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겨울 햇살 아래, 전통의 숨결을 담다

<햇살과 바람 사이, 나의 계절> 시리즈 2 (4)

by 이민자의 부엌


첫 서리가 내린 아침, 백야드는 고요했다.
전날 정리해둔 텃밭에는 빈 땅이 드러나 있었지만,
그 자리는 노력과 감사의 흔적으로 따스하게 남아 있었다.


계절은 떠났지만, 햇살은 여전히 포근하게 나를 감싸주었다.
그 햇살 아래, 몇 주 전 내가 직접 쑤어낸 메주는
햇볕을 머금은 채 3차 발효의 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이국의 땅 캐나다에서 우리 전통의 향기를 잇고 있다는 사실
가슴 깊이 다가왔다.


메주는 하루에도 여러 번 위치를 바꿔
햇볕을 고루 받게 한다.
하얀 곰팡이가 피어나며 숨 쉬는 그 장면은
마치 생명이 깃든 예술처럼 느껴진다.


자연의 손길과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발효의 과정은
단순한 음식의 숙성이 아니다.
그건 시간이 빚어내는 삶의 철학이자
세월을 견디는 인내의 미학이다.


한달 전 한인 농장에서 직접 따온 붉은 고추는
깨끗이 씻어 햇살 좋은 날에 바짝 말려
고운 가루로 변신했다.
이 고추가루는 곧 김장 때 사용될 예정이다.


친정엄마가 전해준 손맛이 담긴 김치속 재료들은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세대를 잇는 사랑의 기억이다.


그 속에는 가족의 온기, 집의 냄새, 그리고 시간의 깊이가 녹아 있다.


생강차 한 잔을 곁에 두고
햇살 속에서 익어가는 고추와 숙성 중인 메주를 바라본다.
고요한 오후의 공기 속에서
나는 삶의 깊은 숨결을 느낀다.


그 순간, 어린 시절의 풍경이 문득 떠오른다.
부엌에서 된장을 뒤적이던 할머니의 손길,
고추를 다듬던 어머니의 모습.


두 세대의 온기가
지금 내 손끝에 이어져 있는 듯하다.
나는 그분들이 남긴 향기와 손맛을 이 먼 캐나다 땅에서 이어가고 있다.



할머니, 어머니.
당신들이 남겨주신 전통의 향기와 삶의 지혜를
오늘도 이국의 햇살 아래에서 되새깁니다.


그리움이 시간의 향으로 익어가듯,
당신들의 사랑이
내 하루를 따스히 덮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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