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익어가는 부엌

<이국땅에서 피어난 밥상의 기억> 시리즈 3 (7)

by 이민자의 부엌


가을 바람이 창문을 스치며 부엌 안으로 스며든다.
그 바람 속에는 오래된 기억 하나가 조용히 깨어난다.
오늘은 고추장을 담그는 날이다.


이국의 부엌, 낯선 공기.
그러나 내 손끝은 오랜 세월을 지나온 듯 익숙하다.
이 일은 단순한 집안일이 아니다.
나를 나로 이어주는, 조용한 의식 같은 일이다.


재료를 준비하는 일부터가 작은 여정이었다.
고춧가루와 매실청은 한국에서 공수해왔고,
메주가루와 엿기름, 쌀조청, 찹쌀가루는
한인마트를 몇 군데나 돌아다닌 끝에야 구할 수 있었다.
엿기름은 어제부터 물에 담가 오늘을 기다리고 있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신다.
창밖에는 낙엽이 흩날리고,
이웃집 개가 천천히 산책을 나선다.
고요한 이 시간, 내 마음은 이미 붉은 고추장 통 속으로 스며든 듯하다.


불려둔 엿기름을 체에 바쳐 맑은 엿기름물만 남긴다.
그 물을 큰 곰솥에 붓고 찹쌀가루를 넣어
중불에서 천천히 저어간다.
시간이 흐르며 냄비 속에서 달큰한 향이 피어오른다.
그 향이 부엌을 가득 채우는 순간,
나는 오래된 기억 하나를 꺼내 본다.


두 시간 넘게 팔을 저으며 불 앞에 서 있으면
어깨와 허리가 묵직해지고, 이마에는 땀이 맺힌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
이 붉은 반죽은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나의 뿌리이자, 그리움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불을 끄고 나면, 쌀조청과 소금을 넣고
식어가는 냄비 속을 천천히 저어준다.
식혀진 반죽에 메주가루와 고춧가루, 고추씨,
매실청과 소주 한 방울을 더한다.
주걱으로 섞을 때마다 고추장의 숨결이 살아나는 듯하다.
그 안에는 세월의 맛과 그리움의 향이 함께 녹아든다.


마지막으로 굵은 천일염 한 줌을 넣고, 삼베천으로 덮은 항아리 뚜껑을 닫는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기다림.
시간이 천천히 맛을 익혀줄 것이다.
그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사랑과 기억이 다시 발효된다.


문득 생각한다.
왜 나는 이 고된 일을 스스로 택했을까.
마트에 가면 고추장이 얼마든지 있고,
손 하나 더럽힐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오늘,
이 붉은 반죽 앞에 서 있다.


그 이유는 맛 때문만은 아니다.
손끝의 감촉, 땀방울의 온기,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되살아나는 ‘집’의 냄새.
그것이 나를 이 낯선 땅에서도 살아있게 만든다.


어머니도, 할머니도 이렇게 하셨다.
손길의 기억이 내 몸 안에 흐르고,
그 기억이 오늘의 나를 부엌으로 불러냈다.
이 고추장은 단순한 양념이 아니다.
이 먼 땅에서도 잃지 않은 나의 이야기이자, 사랑의 증거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로,
어머니에게서 나로 이어진
따뜻한 시간의 실타래가 오늘, 이 항아리 속에 다시 이어진다.


그리움이 익어가는 시간,
이국의 부엌 한켠에서 나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고추장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담그는 하루였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여러분에게도 부엌에서 스며드는 추억이나 손끝으로 느낀 그리움의 순간이 있나요?
문득 떠오르는 장면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질 때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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