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 속에 담긴 작은 한국

<우리 부부의 캐나다 일상> 시리즈 7(6)

by 이민자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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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아침, 집 안에 고요가 내려앉을 즈음 우리는 장바구니를 들고 문을 나선다. 평일과는 결이 다른 공기가 현관 앞에 서 있다. 늘 걷던 길이지만, 그날의 풍경은 언제나 조금씩 다르다. 밤새 내린 눈이 나뭇가지를 더 하얗게 감싸 안고 있을 때도 있고, 어떤 날은 햇살이 유난히 따뜻해 공기 속에 은근한 반짝임이 떠다니기도 한다.


이민자의 삶은 아마 이런 길 위를 걷는 일일 것이다. 익숙함과 낯섦이 겹겹이 쌓인 풍경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이곳에서의 삶이 남긴 흔적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천천히 발을 옮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
낯선 땅에서의 시간이 어느새 ‘생활’이 되고, ‘하루’가 되었음을 이 길은 말없이 알려준다.


길가 빵집에서 새어 나오는 고소한 냄새가 잠결의 기억처럼 코끝을 스친다. 과일 진열대 위의 사과와 오렌지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마치 “오늘도 잘 왔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낯선 이름의 치즈에서 풍겨오는 향은 여전히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 낯섦마저 이제는 우리의 일상 안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문득 이런 평범한 장면이 언제부터 이렇게 소중해졌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젊은 날의 나는 아마 이런 순간을 서둘러 지나쳤을 것이다. 목적지만을 향해 걷느라, 길 위에 놓인 풍경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삶은 점점 커지는 대신, 작고 분명한 것들로 수렴해 간다.


장보기는 단순히 필요한 것을 사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돌보고 있는지를 가만히 비춰보는 시간에 가깝다. 무엇을 담고, 무엇을 내려놓는지에 따라 우리의 하루가 결정된다.


우리가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코스트코다. 넓은 매장 안으로 들어서면 늘 약간의 설렘이 앞선다. 10년 전만 해도 이곳에서 한국의 이름을 찾기란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진열대 곳곳에서 고향의 흔적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김치, 김, 라면, 만두, 떡볶이 소스, 요즘에는 한국 화장품까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고향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었다.


남편은 굴 코너에 도착하면 언제나 표정이 밝아진다. 뉴브런즈윅 주산 굴을 들고 “이건 바다의 향이야.” 하고 웃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민 생활의 고단함이 잠시 물러난다. 장보기의 즐거움은 어쩌면 이런 순간에 있다. 누군가의 취향을 기억하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 그것만으로도 하루는 조금 단단해진다.


계산을 마치고 차에 오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목적지를 이야기한다.
“갤러리아 갈까?”
“응, 고추장 떨어졌잖아.”
짧은 대화 속에는 우리가 이곳에서 쌓아온 생활의 리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갤러리아 쏜힐 한인마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한국어가 들린다. “이거 세일이에요.” “오늘 배추 좋아요.” 그 익숙한 억양은 오랜만에 만난 친척처럼 마음을 풀어놓게 만든다. 한국에서 직수입된 식재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군가가 이 먼 거리를 건너 우리의 식탁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격표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도, 결국 장바구니에 담게 된다. 그 안에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시간과 거리, 마음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남편은 한인마트에 오면 늘 장바구니를 먼저 들여다본다. “이건 당신 좋아하는 거잖아.” “이건 지난번에 맛있다고 했지.” 그의 손길은 늘 나를 먼저 향한다. 나는 그 마음을 읽으며 오늘은 그의 취향을 하나 더 담아본다. 함께 살아온 시간은 이렇게 서로의 작은 기호를 기억하는 일로 조용히 쌓여간다.


장보기가 끝나면 우리는 한인농장 ‘우주농장’으로 향한다. 비닐하우스 문을 여는 순간 흙냄새가 먼저 우리를 맞는다. 배추와 대파, 열무를 손으로 만져보고 고르는 일은 마치 한국의 계절을 한 줌씩 담아오는 일 같다. 농장 주인은 늘 덤을 얹어준다. 그 작은 호의는 이국의 삶을 조금 덜 외롭게 만든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는 채소 냄새와 함께 잔잔한 대화가 흐른다.
“오늘 저녁 김치찌개 어때.”
“굴은 오늘 바로 먹자.”
소소한 계획들이 쌓이며 하루는 천천히 저물어간다.


젊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옆에 있는 존재의 소중함이 이렇게 선명해진다는 사실을. 장바구니 속에 담긴 것은 배추와 고추장, 밤과 굴만이 아니다. 그 안에는 서로를 향한 배려와 함께 살아온 시간,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하겠다는 말 없는 약속이 담겨 있다.


오늘도 우리는 장바구니를 들고 작은 한국을 집으로 데려온다. 이민자의 삶은 때로 낯설고 고단하지만, 이렇게 함께 만들어가는 작은 순간들이 우리를 다시 삶으로 묶어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 길은 충분히 걸어볼 만한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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