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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미 Jul 19. 2022

말할 수 없는 비밀

정(情)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전화번호인데 이름이 안 떴다. 낯익은 목소리, 다짜고짜 물 쏟듯 말을 쏟아놓는데, 한숨 섞인 걱정이 함께 쏟아져 나왔다.   


 고구마 수확을 아직 못했다고 했다. 오기로 한 일군들이 펑크를 냈덴다. 며칠 동안 비가 내려 날이 갠 오늘이나 내일 안 하면 고구마 다 썩는단다. 도와달라 요청이 온 거다. 나도 바쁜 몸인데....

   


 십여 년을 반백수로 살며 몇 해 전부터 고구마 농사를 시작한 우리 형부는 삐돌이다. 도대체 어느 시점에 삐진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전화를 해도 안 받거나, 심지어 집에 찾아가도 없는 척을 한다. 사람을 면전에 놓고도 대답을 안 하고 말을 안  때도 있다. 한 두해 일이 아니다.

 

 그런 연유로 자주 한동안은 연락 없이 지내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꾸준히 연락하고 비위를 맞추며 살아왔다.  형부 마음이 풀리면  안도하면서.

   

 이번에도 몇 년 만에 연락을 하고 몇 주 전 같이 밥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해서 고구마를 수확하는데 도와달란다. 너무 난감했다. 때때로 그냥 무시하고 살고 싶다. 그럼에도 뒤돌아서서  험담하고 씩씩거리더라도  어렵게 다시 이어진 관계를 거절로 망가뜨릴까 걱정도 되고 짜증도 났다. 


 마침 사회복지관에서 아르바이트 중이라 곤란했지만, 그 밤  팀장에게 전화해 집에 일이 좀 생겼다고 연차를 썼다.


 친구 한 명을 꼬드겨 아침 일찍 고구마 밭으로 향했다. 맥모닝을 입안에 욱여넣으며 내어 달려 도착한 안중 밭에는 여전히 깡마르고 담배에 찌든, 은발을 휘날리며 어울리지 않는 모자를 눌러쓴 키만 큰 남자가 서있다.


 웃음기 없는 얼굴에 여전히 담배를 뻐금거리고 서있는 모습이 영락없다. 노인네다. 왔냐는 인사도 없이 그저 멀뚱이 서서 담배 냄새만 풍기며 자기 할 일만 한다. 칫~ 뭐야 인사도 안 하고...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서늘한 알맞은 날에 굽은 등과 마른 몸으로 담배를 피우는 형부를 다시 한번 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이 시큰해진다.


 며칠간 내린 비로 인해 장화에 흙이 많이 묻어난다. 황토밭을 가로질러  다니며 호미질을 시작했다. 언제 이 넓은 밭의 고구마를 다 캘까 싶어 힘에 부친 신음소리만 새어 나온다. 그래도 색깔 좋은 꿀고구마, 황금고구마, 적당한 크기의 호박 고구마가 줄기를 따라 흙을 달고 튀어 오를 때면 어디선가 힘이 나온다.


 고구마를 실은 외발 구르마를 힘차게 굴려본다. 온몸에 열감이 몰려오고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선크림을 잔뜩 발랐지만, 가을 햇살에 홍시 익어가듯 얼굴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붉게 변하고 있는 팔뚝 살을 보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못했다. 무거워지는 팔이 놀려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해야 형부가 고생을 덜한다.


 나는 원래 부지런한 사람이 못된다. 좀 느리고 굼뜨기도 하고, 게다가 육체노동만큼 싫어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내게 어디서 힘이 나오는지 자꾸 먼산만 바라보는 친구를 채근할 여유도 없다.


 그저 묵묵히 내가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급함에 숨을 고른다. 다 못해주고 갈까 아쉬워 내 육체를 보채는 모습이 스스로도 이상스럽다. 예전에도 몇 번 왔지만, 이렇게 열심히 한 적이 있었나 싶다.

     

 탐스럽게 매달린 감나무에서 홍시를 따 내 손에 들려주는 형부의 무심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양볼 가득 불러오게 털어 넣고, 나도 무심히 지나간다.     


 외발 구르마를 밭두렁으로 몰아서 밀며 내내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 모를 뿌듯함이 올라왔다. 신명이 났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주는 마음이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인가 싶다. 우러나온 열정으로 열심을 내어 꾀부리지 않고 일했을 때 오는 보람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러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김남조



 형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생이었다. 어려서였는지는 몰라도 형부는 나를 무척 이뻐해 주었다. 놀이공원도 데리고 가고 민속촌에도 데리고 가고 용돈에, 여행에 언니보다 나를 더 챙겨주는 한결같은 처제사랑에 감사도 모르고 그저 무심하게 받기만 했다.

          

 매년 방학이면 형부네 집에서 지냈다. 서울에서 화원을 하던 형부 따라 지방으로 배달도 다니고, 꽃바구니 배달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함께 지낸 시간이 많았다. 그렇게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정이 들었던 것 같다.   

  

 언니만 셋이나 되지만, 아픈 가족사에 제대로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둘째 언니와 오빠뿐이었다. 감정표현도 서툴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은미야 은미야"부르며 늘 달고 다니면서, 챙겨준 건 둘째 형부뿐이었다.     


 그때는 잘 몰랐다. 너무 어렸고, 철없었고, 고마운 줄도 사랑인 줄도 몰랐다. 그러나 함께 한 시간들은 어느 순간부터 삐돌이에 밉상인 늙은 형부에게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왜 저러나 싶어 이해가 안 되다가도 만나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이미 깊이 그 모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드는 게 사랑이라면, 그렇다면 꾹꾹 참고 흘려보내야 할 일이 많다. 미운 것도 정이 되는 순간까지. 사랑하며 살고 싶은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비밀로 해야겠다. 반백수라고 했다고 형부가 또 삐질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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