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도 않게 차에서 내려 평범하게 걸어보려 했지만 어쩌면 조금 흔들렸을까요. 이쁜 막내를 보고도 감흥 없는 표정은 심장을 움켜쥐게 했으니까요. 백발이 성성한 모습의 엄마는 낯설기만 합니다. 예쁜 옷을 입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활짝 웃는 엄마가 더 좋거든요.
“아버지가 가수 된다고 했을 때 보내줬더라면, 시집 안 간다 할 때 말리지만 않았더라면 이렇게는 안 살 텐데.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가요무대를 즐겨보던 엄마는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눈물을 찍어내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엄마는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 짓는 미소도 일품이었죠. 마음에 드는 노랫말을 베껴 달라며 내게 종이와 연필을 내밀기도 했습니다. 가사를 외워 계모임에 가면 부르려고 준비하는 것일까요.
사진: Unsplash의sq lim
‘미스 고’란 노래를 잘 불러 계꾼들 사이에서 ‘미스 고’란 별명으로 불렸던 사람.
나는 계모임에 불려 간 적이 있었습니다. 바닥이 시멘트라 깔끔했던 마당과 흑갈색 벽돌이 세련되어 보였던 2층 양옥집. 계단을 올라가자 반쯤 열린 문틈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엄마가 보였습니다.
엄마가 그곳에 나를 부른 이유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둘러앉은 사람들 틈에서 노래를 부르며 수줍은 미소를 짓던 엄마 모습만 떠오릅니다. 정확한 음정, 깔끔하게 뽑아낸 곱고 가는 고음이 방안을 메우고 주변에서 추임새를 넣던 소리만 생생합니다. 반주 없이 노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목소리엔 자신감이 묻어 있었습니다. 자신을 추켜 세워주는 그 자리를 즐기는 듯 보였고요.
“어서 와 너 이번에 시험 잘 봐서 1등 했다며”
“아~~ 네~”
집 안으로 들어서는 내게 친구분이 건네오던 인사말이 귀에 쟁쟁합니다. 뜬금없는 소리에 당황해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못하고 우물거렸습니다. 사실이 아니었으니까요. 공부를 못하진 않았지만 1등을 해본 적은 없었거든요.
우리 자매들을 공립학교에 다니지 않고 사립학교에 다녔습니다. 교복 자율화가 된 후에도 고고하게 교복을 고수한 학교.
셔츠 깃을 세워 목둘레에 귀족들만 쓴다는 자주색 리본 타이를 두르고 감색 버버리 체크 랩스커트가 유난스럽던, 공부를 잘해야 들어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랜 전통과 지역 특수성을 내세운 학교.
엄마는 딸들이 명문 사립고에 다니는 걸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교복을 입고 나란히 걷는 연년생 딸들을 보며 흐뭇해했듯이 마냥 아이였던 내가 그 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기뻐했거든요.
아마 그런 이유였는지도 모릅니다. 외롭고 지치는 일상. 예쁜 옷을 입고 계를 하러 가서 교복 입은 딸을 불러내 자랑삼으면 으쓱해졌을 테니까요. 거기서 만큼은 기 안 죽고 없는 티 안 내고 적당히 거짓말을 섞어 자식 자랑을 해도 알아차릴 사람이 없고 멋들어진 노래 한 소절로 인기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을 테니까요.
사진: Unsplash의Mariia Chalaya
식당 찬모였다가 세탁부였다가 남의 집 살림을 하고 가게 점원으로 사는 퍽퍽한 삶. 둘이 꾸려도 힘든 살림을 혼자 꾸려가는 것은 머리에 짐을 이고도 바위를 밀며 언덕을 올라가듯 고단하기만 했을 겁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나이 든 여자가 받는 대우도 빤하고요. 적은 급여에 돈 들어갈 일 많은 생활은 벌어도 벌어도 구멍 뚫린 전대 같고 아버지는 양육비를 주지 않았으니까요.
그 시절엔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삶을 헤아려봅니다.
모임을 통해 사람들과 어울리면 삶이란 막연함이 꽉 붙들린 희망이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품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약점인지 알면서도 사람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인간이니까요. 위로가 됐을 겁니다. 떠밀리듯 나와 구수한 노래 한 곡조를 뽑아내고 받는 박수 소리에 묻혀 한없이 불쌍한 자신을 잊고 외로움도 시름도 잊었을 테니까요.
어김없이 해는 뜨고 졌으니 삶이 열어 놓은 길 위에 위태롭게 서서 괜찮은 척했을지도 모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