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솜씨가 좋다는 소문에 힘 입은 엄마는 근처 산업단지 안에 있는 자동차 회사 식당에 취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공장 식당에서 일한 덕분에 급여는 많아지고 대우도 좋아졌습니다. 사실 이 대목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엄마 음식 솜씨가 좋다는 말이요. 엄마는 맵고 짠 음식을 못먹었거든요. 식당에서 조리된 음식은 대부분 짜고 매운 것이 특징이잖아요. 자극적이라야 또 찾게 되니까요. 식당에서 슴슴하게 간을 하면 금방 쉬거나 물리고 맛있다는 느낌을 주기 어려운게 사실이고.
음식 솜씨가 좋다고 소문난 건 엄청난 노력과 센스를 겸비했거나 음식 맛 이외의 어떤 부분도 능력으로 인정 받은 것일까요. 어쨌든 어릴 땐 알지 못했던 엄마 식성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라면을 끓이다 알았습니다.
“내껀 끓이지 마. 니들것만 끓여.”
“왜. 다 같이 먹을 건데.”
“하여튼 냄비에 물 따로 올려 놔,”
라면 스프는 1/3만 넣으라고 했습니다. 매운것도 못먹고 짠 것도 싫어하신다고 하셨지요. 엄마가 해 준 음식이 싱겁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우린 다 맵고 짠 거 잘먹었거든요. 두 아이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싱겁게 먹는 엄마가 다른 사람에게 맞춰 음식을 했다는 걸요.
엄마가 공장 식당에서 일하면서 할머니가 다시 집으로 오셨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무서웠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무엇을 하든 역정을 내셨거든요. 가끔 회초리도 들고요. ‘하지 말라. 가만히 있어라.’는 말만 하셨습니다. 나는 나무 타기, 전쟁 놀이. 싸돌아다니기 등 활동적이고 과격한 놀이를 좋아하는 데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였어요. 친구들과 산과 들, 먼 바다와 강가로 놀러 다니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얌전히 있길 바라는 할머니 눈을 피해 몰래 다녔습니다. 들키면 혼 날게 뻔하니까요.
작은 얼굴에 허리가 꼿꼿하고 곱던 할머니는 엄마가 온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마련한 마당 넓은 집에서 내가 여섯살무렵 돌아가셨습니다. 무뚝뚝하기만 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유난히 할머니를 따랐던 둘째 언니가 엉엉 울면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몸이 허약해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던 둘째 언니를 할머니가 특별히 아꼈거든요. 둘째 언니는 너무 슬펐다고 하더군요. “할머니 돌아가셨어. 어뜩해. 엉엉”
나도 울었습니다. 할머니의 죽음이 슬퍼서는 아니었습니다. 할머니가 나를 귀여워하거나 이뻐하지 않아서도 슬프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죽음이나 슬픔이 뭔지 잘 몰랐거든요. 게다가 할머니는 내게 화난 얼굴일 때가 많아 정도 없었고요. 언니가 울어서 덩달아 울었습니다. 우니까 슬퍼졌고요. 그렇다고 내 슬픔이 가짜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려서 뭘 잘 몰랐고 할머니를 미워하진 않았으니까요. 아버지가 무서웠지만 미워하진 않았던 것처럼요.
사진 속 오빠가 할머니 영정 사진을 들고 있네요. 상여 앞에 섰고 햇살에 눈이 부셔 찡그린 얼굴입니다. 상여꾼들이 댕그렁댕그렁 종을 울리며 “이제가면 언제오나 어허야 데야”노래를 부르며 마당을 지나 거리로 나섰던 그날이 기억납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침감도 곶감도 더는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빠도 잘 보이지 않았고 엄마도 바빴고요. 대신 엄마는 찜솥처럼 생긴 전기 오븐에 빵을 만들어 주었죠.
엄마가 잘 부풀린 빵반죽을 오븐에 넣고 스위치를 누르면 오븐 옆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이제나 저제나 빵이 익길 기다렸습니다. 오븐에서 아래 부분이 짙은 갈색으로 익은 둥글고 커다란 빵은 고소한 냄새를 풍겼습니다. 시내 빵집에서 파는 카스테라처럼 폭신폭신 하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다 맛있었으니까요.
어린이의 세계는 단순합니다. 부모란 존재는 신과 같고, 어떤 환경에서든 그저 순응합니다. 백지와 같은 아이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은 세상 전부고 첫 수업이니까요. 마냥 노는 게 좋고 배부르고 등 따시면 주어진 것에 대해 결핍을 크게 느끼지 못끼는 나도 다른 집들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먹든지 상관없이 내 손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고된 식당 일을 마치고 퇴근한 엄마 가방에선 음식이 들어있는 까만 봉다리가 나올때가 많았습니다. 떡이나 전 또는 소세지 같은 것들이었죠. 엄마는 유독 분홍소세지를 자주 가져왔는데 엄마가 가져온 분홍소세지를 계란물 묻혀 반찬으로 구워 먹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엄마 손바닥에서 어른 손가락 두마디 만큼씩 잘려진 소세지를 받아들면 그대로 깨물어 먹었더랬죠. 제 몫을 받아 오빠, 언니들 것과 크기를 비교해가며 한입 베어물어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얼마나 황홀한 맛이던지요.
요즘도 가끔 분홍소세지를 삽니다. 남편과 아이들은 도대체 그걸 왜 사냐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지만 나는 분홍소세지를 좋아합니다. 대부분은 달걀에 입혀 구워먹지만 싹뚝 잘라 그대로 입안에 넣기도 합니다. 장을 보다가 분홍소세지를 만나면 퇴근한 엄마가 가방을 뒤지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이로 돌아갑니다. 소세지를 집어든 내 얼굴엔 만족스런 미소가 번집니다. 분홍소세지를 산다는 건 추억을 사는 것이니까요. 냉장고에 진열된 엄마 마음을 꺼내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