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줄 때 언니는 나를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좁은 셋방으로 데려갑니다. 그보다 더 좋았던 시절이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인간의 기억력이란 좋았던 시절보다 그렇지 못했던 때를 더 잘 기억해 내는 것 같습니다.
언니가 들려주는 옛날 얘기를 들을 때 나는 제멋대로 집 주변 풍경과 방 크기를 정하고 벽지색을 상상하곤 합니다. 시멘트 벽이 특징인 다세대 가옥으로요. 내 기억에는 없는 집이니까요.
기억 속에서 어린 내가 서있는 풍경은 마당 넓은 한옥입니다. 툇마루에 앉으면 마당이 훤히 내려다 보이고 오른쪽 앞엔 크고 작은 장딴지들이 즐비한 장독대와 수돗가, 그 곁에 앵두나무도 보입니다. 마당으로 올라오는 계단 입구엔 커다란 감나무 한그루가 섰고 그 옆엔 닭장과 개집이 있네요. 감나무는 두께가 굵어 숨바꼭질을 할 때 작은 아이의 몸을 숨기기에도 적당합니다. 팔을 벌린 듯 길게 뻗은 가지에 그네가 출렁이고 있고요.
사진: Unsplash의 J Shim
자주 꽃핀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그네를 타다가 마당을 헤집고 다니면서 흥얼거리듯 이 노래로 불렀는데 누가 가르쳐 줬는지 모릅니다. 다만 해마다 우리 밭에 피었던 감자꽃이 이뻤더랬죠. 몇 안 되는 아는 꽃이름 중 익숙하지만 낯선 감자꽃이 동요의 주제라서, 우리 밭엔 하얀 감자꽃만 가득했는데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가 난다는 것을 새롭게 안 감격 때문에. 어쩌면 감자꽃노래가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부르고 다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엌엔 커다란 솥이 걸린 부뚜막, 아궁이 속에서 장작이 타들어 가며 내던 소리와 불냄새. 뜨겁게 얼굴을 달구던 선홍빛 장작불, 불이 잦아든 아궁이 안에 넣어둔 감자를 부지깽이로 꺼내어 껍질을 까주던 손길. 저녁이면 불 때는 엄마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불 멍을 하노라면 “너 그러다 콧구멍 굴뚝된다.”며 별 볼일 없다는 듯 방으로 들어가던 언니 목소리가 선명합니다.
여름밤엔 마당 평상에 둘러앉아 온 식구가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몇 년 전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살게 되면서부터 마당 넓은 고향 집에 살 때처럼 마당에 밥상을 차립니다. 모기떼의 습격에 정신 못 차리고 박박 손으로 연신 긁어가면서도 말입니다.
참다못해 모기장도 샀습니다. 모기장을 폈다 접었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는 기어이 마당에 밥상을 차립니다. 아이들은 굳이 여기서 밥을 먹어야겠냐고 불평하지만 그럴 때 나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던 고향집 마당에 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알까요.
마당가에 하얀 감꽃이 우수수 떨어지면 알이 굵어지길 기다렸다가 아버지는 감나무를 탔습니다. 곶감을 만들 때가 된 거죠. 감껍질을 둥글게 돌려 깎아 꼬챙이에 하나씩 끼워 넣어 처마 밑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요즘 마트에 파는 곶감은 대부분 꼭지째 말려서 감에 구멍이 없고 주황색으로 말랑한 것이 많습니다. 어릴 때 장에 팔던 곶감이나 우리 집에서 만들어 먹던 곶감은 꼬챙이에 꽂혀 있는 꾸러미 형태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감을 꼬지에 끼워 곶감을 만드는 것이 강원도 사람들의 전통인지 세월이 지나며 곶감 말리는 방법이 달라진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우리 집 처마에 매달린 곶감들은 어김없이 꼬챙이에 꽂혀 있었습니다. 단단했던 감은 해가 뜨고 지며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말랑해지고 주홍빛을 띕니다. 곶감이 처마에 걸리면 아침마다 툇마루로 나와 턱을 괴는 것은 내 일상이 되고요.
감이 흐물흐물하게 살짝 아래로 늘어지면 간혹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기도 하거든요.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내 임무랍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떨어진 곶감은 주워 먹는 일. 떨어진 감을 먹는 건 야단맞지 않거니와 곶감을 너무 좋아했거든요.
얼마간은 떨어진 감을 먹거나 떨어지려 하는 곶감을 뜯어먹었지만 점차 꾀가 나고 용감해졌습니다. 간혹 흐물거리며 익어가는 곶감을 만지작 거리다 일부러 빼먹기도 했거든요.
엄마는 감을 깎아 그저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주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가 봅니다. 감을 깎고 나온 껍질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잘 말려둔 감껍질은 겨울 간식으로 그만이었습니다.
간혹 감껍질 자루에서 감 삐친 걸 발견한 날은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자루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감 삐짐을 뒤지다 발견하지 못한 날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작은 항아리에 따뜻한 소금물과 감을 넣어 군불 땐 아랫목에 몇 날이고 이불을 덮어 삭힌 달콤 짭조름한 침 감은 또 어떻고요.
찬바람이 불어올 때 아버지는 대나무를 쪼개고 다듬어 살을 만들고 한지를 오립니다. 오빠는 꼬리가 긴 가오리 연을 좋아했지요.
12월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오빠는 언 손에 입김을 연신 불어넣어가며 하루도 쉬지 않고 언덕에 올라 연을 날렸습니다. 털귀마개를 꼈으니 코가 빨개지는 것쯤은 개의치 않는 씩씩한 아이였죠. 오빠가 연을 날리면 동네 아이들은 너도 나도 연 줄을 늘리며 바람 부는 언덕에 나란히 섭니다.
연이 하늘 위에 춤추듯 떠갈 땐 칼바람이 불어도 고개를 숙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빠 껌딱지였던 나는 사시사철 오빠를 따라다녔는데 오빠가 하늘 높이 연을 날리는 걸 넋 놓고 바라보다 한 번만 날려보자고 징징거리다 한 대 얻어맞곤 했습니다.
사진: Unsplash의Anna Kolosyuk
오빠는 자주 연줄을 끊어먹었습니다. 원래는 정월 대보름날 액막이로 연줄을 끊어 날려 보냄으로써 연날리기를 마감하는 것이지만 오빠는 단지 친구보다 멀리 날려 보내려는 욕심에 경쟁하다가 연 줄이 얽히거나 연이 나무에 걸렸던 것입니다.
날려버린 연을 영영 찾지 못할 때 오빠는 눈이 뻘겋게 되어 코를 훌쩍이며 집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또 잃어버리면 다시는 연을 안 만들어 준다.” 아버지는 혼을 내면서도 연 만들 채비를 하곤 했습니다.
정월이 되면 분주합니다. 쥐불놀이를 하러 언덕에 올라가야 하거든요. 깡통을 주워다 못으로 구멍을 뚫습니다. 바람이 잘 통해야 불이 잘 타니까요. 긴 쇠줄도 겁니다.
어른들은 달집을 태우며 소원을 빌지만 동네 아이들은 뉘엿이 해가 지기 시작하면 아궁이에서 꺼낸 숯과 장작 조각을 챙겨 언덕에 올라 불이 가득한 깡통을 돌렸습니다.
누가 누군지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어둠이 깊어가도 어디선가 아이들은 하나, 둘 언덕에 모여들었습니다. ‘쉑쉑’ 소리를 내며 둥글게 원을 그리는 불덩이들. 밤하늘을 수놓는 꼬리가 긴 불은 아름다웠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간혹 아무리 원을 돌려도 불이 살지 않는 친구의 깡통에 자신의 숯을 나누어 담아 주었고 힘세고 요령 좋은 친구가 대신 돌려 꺼져가는 불을 살려주기도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재밌는 건 혼자보다 여럿이 해야 맛이잖아요.
논물이 꽝꽝 얼어 빙판이 되면 옷을 껴입고 썰매를 탔습니다. 썰매는 두 대였지만 멀쩡한 썰매는 한 대뿐이라 오빠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기억이 나네요.
동작도 빠르고 노는 데 도가 튼 오빠는 썰매를 선점하는 것도 모자라 양보도 안 합니다. 썰매를 타고 저만치 달려 나가는 오빠 뒤를 넘어질 듯 위태롭게 쫓아다니며 “오빠, 나도 태워줘” 칭얼댔었더랬죠.
아버지가 망가진 썰매를 손봐 주신 후 더는 오빠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속상해하지 않아도 되어행복해하던 순간이 아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