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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미 Jun 10. 2024

아무튼,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잘못된 만남

ㅂ리 시골 초등학교에 선생님이 새로 왔습니다. 서울에서 온 젊은 여선생이었습니다. 소문은 삽시간에 마을에 퍼졌고 첫 부임지에서 젊은 여선생이 하숙을 묶은 집은 우리 할머니댁 윗집이었습니다. 여선생은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는 중에 작은 얼굴에 곱상한 미소년 외모를 지닌 아랫집 청년과 마주쳤습니다. 여자는 과묵한 청년이 자꾸 신경 쓰였습니다.


청년도 세련된 말씨의 여자에게 관심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여선생과 청년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선을 넘어 버렸죠. 빤한 시골동네에서요.


두 사람에겐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부모는 시골 청년과의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고 둘째도 낳았습니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부모님이 보고 싶다던 여자는 서울 친정에 다녀오겠다고 둘째를 업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네요.


아버지는 졸지에 첫사랑에 실패한 애 딸린 총각이 되었습니다.     




엄마는 속아서 결혼했습니다. 아버지의 과거를 몰랐고 아이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5년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죄인처럼 숨죽이고 살던 겨울밤 아버지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네요. 여태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딸이 있는데 곧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고, 친자식처럼 키워줬으면 좋겠다고. 불쌍히 여기고 넓은 마음으로 받아 달라고.


엄마는 뒤로 넘어갔습니다. 꼭지가 돌았죠. 단숨에 친정으로 달려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시집간 딸이 집에 돌아와 울며불며 털어놓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돌려보냈습니다.


이 일로 엄마는 할아버지를 두고두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설득을 당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엄마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거든요.      


젊은 시절 엄마는 집 근처 예배당에 다녔습니다.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음성이 좋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노래를 잘하니 가수 하라는 주변 사람들 말에 들떠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할아버지께 가수가 되고 싶다는 말은 안 통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엄하고 고지식한 사람이거든요. 여자는 배움도 필요 없고 시집가서 아들 낳고 남편 봉양 잘하면 된다는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배당에 다니며 이지가지로 눈을 뜬 엄마는 어떻게 해서든 꿈을 찾고 싶었습니다. 서울로 함께 가자는 사람을 만나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동생이 줄줄이 있는 첫째 딸, 몸부림쳐도 부모의 그늘밑에서 살기 쉬운 숙명을 타고났지요. 반란을 일으켜도 오래가지 못했고 곧 부모님 말씀에 순응했습니다.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고 할아버지의 뜻을 따라 만난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럴듯해 보였던 남자는 망나니였습니다. 엄마는 못살겠다고 뛰쳐나왔죠.


그렇게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인생이 되었고 아버지와 결혼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지만 눌러앉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마는 두 번 갔다 온 여자가 되기는 부끄러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귀한 집 장손이었습니다. 가문의 대를 잇고 가문을 일으키며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삶의 무게를 지고 사는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엄마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에 맘고생을 했습니다.


정안수를 떠놓고 기도했는지, 무당을 불러 굿을 했는지 여러 노력 끝에 엄마가 낳은 건 딸, 둘째도 딸이었습니다.


엄마가 셋째도 딸을 낳았을 때 아들을 간절히 바랐던 할머니는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후불’이라는 이름을 받아옵니다.


 ‘후불’ 이란 이름을 붙이면 남동생을 볼 거라고요. 졸지에 셋째 언니는 누구도 원치 않을 촌스럽게 이상한 이름을 얻게 됐고, ‘호불’ ‘후불’ 등 이름으로 불리며 형들에게 ‘호떡집에 불났다’ 놀림을 받았습니다.


 어쨌거나 셋째 언니는 자신의 첫 번째 생일날, 시커면 홍두깨를 잡았습니다. 좋은 것도 많았을 텐데 취향 참 특이하죠. 그리고 3년 후 오빠가 태어났으니 이름값은 확실히 했습니다.     

 

넷째 아이를 밴 엄마는 꿈에 무를 뽑았습니다. 유난히 크고 실했던 무를 뽑고 기분 좋게 돌아서려는데 옆에 무가 하나 더 있었다더라고요. 탐이 났고 유혹에 못 이겨 한 뿌리 더 뽑아 올렸습니다. 다만 그 무는 처음 것보다 조금 작았다고 해요. 그래도 무가 실해서 기분이 좋았답니다.


이번엔 쌍둥이를 얻으려나보다 예상했지만 쌍둥이는 아니었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기분이 좋았던 엄마는 아들을 하나 더 얻을 꿈이라 확신했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래서 기분이 째졌죠. 4년 후 모두의 기대를 왕창 깨고 나온 아이가 납니다. 여자아이였죠. 실망한 엄마는 내 얼굴을 손으로 눌렀다고 하네요.    

 

“아휴, 야가 가나? 많이 컸네. 많이 이뻐졌다야. 딸이라고 얼굴을 꽉 눌러서 시커멓더니.”     


주책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어쩌자고 나이 먹고 푼수 없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어린아이를 울게 한 걸까요.


엄마 치마폭에 매달려 한참을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상처가 됐습니다.


엄마는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 땠지만 엄마 말보다 주책바가지 아줌마 말에 믿음이 갔거든요. 괜히 그럴리는 없잖아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냐고요. 아무튼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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