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미취학 아동인 나는 집에 혼자 있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버지는 공사 현장을 따라 객지로 다니며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은 데다 엄마는 저녁 늦게 퇴근했거든요. 하는 수없이 아버지가 타지로 일하러 갈 땐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처음 차를 탄 건지 멀미를 했던 순간이 생각나네요. 어디가 아픈 건지 약을 먹여주던 아버지 모습도 떠오릅니다. 숟가락에 가루약을 털어 올리고 물약을 섞어 새끼손가락으로 저어 내 입에 갖다 댔죠.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날카로운 꾸지람을 듣고 나서야 눈물을 찔끔거리며 입을 벌렸죠. 쓰디쓴 약이 입에 들어가자마자 게워내면서도 울진 못했습니다. 무서운 아버지 앞에선 얌전히 없는 듯 있어야 탈이 없거든요.
경북 풍기에 머물렀던 때가 기억납니다. 그곳의 기억은 매우 선명합니다.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이 좀 있었거든요.
낯선 동네, 낯선 집에서 친구도 없이 혼자 심심했던 날, 아버지가 일하는 현장에 갔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주변 풍경이며 노선도 또렷이 기억났습니다. 대문을 나서면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말없이 대문을 나와 무작정 길을 나섰습니다. 현장 주변에 기찻길이 있었으니까 기찻길만 나오면 곧 닿을 것 같았거든요.
얼마큼 걸었을까요. 기찻길은 나오지 않고 다리는 아프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할 때쯤 길가에서 서로 욕지거리를 하며 싸우는 동네 아이들 곁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두 패로 나뉜 무리들 중간쯤을 지날 때 어쩐지 집에 갈 결심을 했고 가던 길을 되돌렸습니다. 순간 ‘딱’ 무언가 단단한 것이 날아와 뒤통수를 때렸고 통증이 몰려왔습니다.
피가 흐르는 채로 울면서 집에 왔고 오래 앓았습니다. 깨어났을 때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죽을 줄 알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계속 아버지와 객지로 다닐 수도 없고 엄마는 나를 유치원에 보내기로 합니다. 오빠가 다니는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이었죠. 지원자가 많아 뽑기를 통해 원생을 선발했는데, 뺑뺑이를 돌리던 날. 나는 뒷집 순희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갔습니다.
교탁 앞에서 선생님이 둥근 뽑기 통에 손을 넣었다 뺄 때마다 나는 맛있는 걸 앞에 둔 것도 아닌데 침이 꼴딱꼴딱 넘어갔습니다. 100미터 달리기를 1등으로 들어온 사람처럼 심장이 뛰었습니다. 마지막 번호가 불릴 때까지요. 그리고 끝까지 내 번호는 불리지 않았습니다.
집에 가는 내내 자꾸만 발이 땅에 끌리고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눈물이 찔끔 났지만 꾹 참았습니다. 내 옆에 선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서 기댈 수 없어 슬펐던 것 같기도 하고 운다고 달라질 일도 없다는 걸 알아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더는 아버지를 따라 객지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혼자 집을 지키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부스스 일어나 보면 머리맡에 놓인 밥상이 조각보 덮개에 덮여있었습니다. 조각보를 들추면 밥과 김치가 있고 내가 싫어하는 멸치도 있었습니다. 가끔 아버지가 좋아하는 취떡과 흰 절편이 놓여 있는데 누군가의 이빨 자국이 있을 때도 있었고요.
아마 우리 동네 개구쟁이 중 한 명이 몰래 들어와 잠든 내 머리맡에 놓인 밥상에서 풍기는 참기름 냄새를 맡은 게 분명했습니다. 떡을 한입 훔쳐 먹고는 달아난 것이죠.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버린 토끼처럼 나랑 놀러 와서는 떡만 훔쳐 먹고 간 겁니다.
가끔은 마당에서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내 그네를 훔쳐 타면서 서로 먼저 타겠다고 싸우는 거죠. 나는 방문을 벌컥 열고는 “그네 타지마” 라며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동네 애들은 요란스럽게 떠나보냈고 밥 생각은 없습니다. 그대로 마당으로 나가 그네를 타는 게 아침 루틴입니다.
때때로 나는 학교 운동장과 놀이터에서 나처럼 유치원엔 안 다니는 친구들과 놀았습니다. 8살이 되면 1학년으로 입학하게 될 학교 운동장에서 말이죠.
그날도 순희와 운동장 한편에서 돌멩이를 잔뜩 모아놓고 공기놀이를 했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렸습니다. 정글짐에 올라갔다 내려오며 수돗가에 물을 마시러 갔습니다. 그때 남색 반바지에 멜빵을 하고 노란 망토를 두른 유치원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습니다.
기겁을 하고는 얼른 수돗가 아래로 몸을 낮췄습니다. 무슨 잘못이라도 한양 몸을 숙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 집으로 왔습니다.
유치원에 못 간 내 처지가 부끄러웠습니다. 마치 뭔가 부족하거나 못나서, 지지리 복이 없는 아이라서 그렇게 된 것 같았거든요. 그깟 뺑뺑이, 고작 확률이 운명을 결정했는데도 말입니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아이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날 유치원생 추점에 뒷집 순희 엄마대신 우리 엄마가 갔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처음 열등감이라는 걸 느낀 것 같습니다. 운동장에서 느낀 열등감은 학구열이 되었는지 이때부터 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때를 썼습니다. 조기 교육에 스스로 눈을 뜬 셈이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언니들은 학교에 가면 배우게 될 거라며 한글을 가르쳐주지 않고 양치질이나 똑바로 하라며 이 닦는 훈련만 시켰습니다. 다섯 번도 넘게 퇴짜를 놓아 계속 이를 다시 닦게 하면서요. 퇴짜를 맞을 때마다 나는 울상이 되어 이를 다시 닦았고 언니들은 신나게 웃고 자지러지며 나를 바라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