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멍든 하늘을 등지고 아버지는 퇴근한 엄마를 다짜고짜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모와 고모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어른들 몇몇이 구경하듯 아버지 주위에 빙 둘러서 있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둘째 언니는 집 앞에서 갑자기 픽 쓰러졌습니다. 실신한 언니를 부축하여 집으로 들인 사람이 누군지, 길가에 쓰러진 둘째 언니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내가 어떻게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지, 언제부터 어른들 틈에 비집고 서서 엄마가 아버지에게 맞는 장면을 목격했는지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성난 아버지의 불끈 쥔 주먹이 세차게 엄마의 얼굴을 가격했습니다. 아버지를 똑 닮은 얼굴이 작았던 이모가 “맞아도 싸다.”라 내뱉는 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귓가를 철썩 때렸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맞고만 있는 무기력한 엄마의 부어오른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습니다.
“안돼 그만 때려”
크게 소리 지르며 엄마 가슴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성난 주먹이 내 뒤통수를 가격했지만 엄마를 더 세게 끌어안았습니다. 두 번째 주먹이 날아왔습니다. 놀란 고모부가 서둘러 나를 엄마 품에서 떼어냈고 나는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때리는 걸 멈추지 않아서 울었습니다. 나라도 아버지를 말리면 그만 때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버지의 화를 돋우던 친척들이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엄마를 쳐다보며 한 마디씩 던졌지만 폭력이 몰고 온 고통을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되었는지 드디어 아버지를 말렸습니다.
“그만해라. 이러다 사람 죽겠다.”
그날 밤 아버지는 고모부와 나갔고 고모는 우유를 사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고모가 엄마를 안쓰럽지만 한심한 듯 바라보다 무어라 몇 마디 하면서 우유를 건네는 게 보였고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으며 돌아누웠습니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이 따뜻했지만 이전과 달리 감흥이 없는 아침을 맞았습니다. 폭풍우가 사납게 휘몰아치는 것 같은 밤을 우리는 어떻게 견딘 걸까요. 엄마가 누군가의 위로나 치료를 받았는지 처량하게 울기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스스 일어났을 때 엄마는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왜 안 깨웠어. 지각하면 어떡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학교에 늦었다며 부산을 떨었습니다. 언니, 오빠는 이미 학교에 가고 없었기 때문에 불안했거든요. 가방을 메고 마루로 나왔을 때 엄마는 힘없는 모습으로 내게 우유를 건넸습니다. 고모가 사다 준 우유였습니다. 하얀 우유는 한바탕 폭력이 할퀴고 간 자리에 던져준 고모의 위로였습니다.
“싫어. 안 먹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엄마 손을 뿌리치며 말했습니다. 신발을 꿰차며 마당으로 내려서는데 엄마는 내 손에 우유를 꼭 쥐어주었습니다. 씩씩거리며 둔탁하게 걸었습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 더는 닿지 않을 만큼 멀리 갔을 때 힐끗 뒤돌아 본 후 땅바닥에 우유를 쏟아부어 버렸습니다. 밤새 마음에 알 수 없는 미움과 원망이 들어찼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득한 분노를 우유와 함께 땅에 쏟았습니다.
아침부터 치밀어 오른 분노는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였는지 엄마였는지 아니면 얄미운 고모를 향한 것이었는지. 엄마를 불쌍히 여긴 것과 별개로 엄마를 증오하는 듯하기도 했습니다. 다 엄마 때문이니까요.
후에 그것은 나 자신을 향한 것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향한 비난, 엄마가 우리를 속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데서 오는 죄책. 이제 더는 아버지의 얼굴을 떳떳하게 볼 수 없고, 빵과 과자에 홀려 낯선 남자를 좋아함으로 엄마의 부정을 눈감은 죄를 들켰다는 수치가 되었습니다.
우유가 쏟아져 내리는 순간 느낀 감정도 잊지 못합니다. 수많은 죄에 한 가지 죄를 더 추가한 것 같았거든요. 엄마가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을 땐 작고 어린 몸을 던져 아버지를 향해 발악하더니 불쌍한 엄마에게 눈을 흘기고 퉁명스러웠으니까요. 아침밥을 먹여 보내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엄마 마음을 어쩌자고 땅에 쏟아 버렸을까요. 한 번도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이 일을 생각하면 미안했습니다. 우유가 길바닥에서 주르륵 발밑으로 흘러내릴 때 돌덩이 하나가 가슴이 쿵 안겼거든요.
엄마는 공장 식당 일을 그만두었고 하나, 둘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우리가 학교 가고 없는 사이 들어와 짐을 싸 떠나면서 뒤주에 쌀한 톨 남기지 않았습니다. 쌀이 없어 누룽지를 끓여 먹던 저녁 외삼촌이 집에 왔고 다음 날 우리는 새로운 거처로 이사했습니다.
바람이 차가웠던 날 학교가 파한 후 오빠 손을 꼭 잡고 남대천 다리를 건넜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이사한 집 근처 버스 정류장. 커다란 호수가 보였습니다. 얼마뒤 전학도 했습니다. 더는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론 원래 아버지가 없었던 사람인양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내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없어도 아쉽지 않은 사람. 그런데 왠지 우울했습니다. 이전보다 아버지를 더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