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남편은 총각 때 쓰던 오래된 텐트를 강변에 쳤습니다. 일곱 살 큰딸은 좋아서 입이 찢어졌지만 낡고 색이 바랜 비좁은 텐트가 촌스러워서 모래가 발에 밟히는 것이 싫어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공동 화장실과 세면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남편은 아이와 낡은 텐트에서 잤지만 가리는 것 많고 깔끔한 호텔 방 선호하는 체질인 나는 어린 둘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외박하는 걸 어려워하는 엄마도 같이요. 큰맘 먹고 매년 휴가를 한 번은 포항 부모님과 한 번은 강릉 엄마와 보내기로 작정했지만, 고향에서 엄마와 보내는 첫 휴가. 생전 처음 해보는 야영은 힘들었습니다. 적응이 안 됐죠.
다음 해엔 결국 놀러 간 계곡 주변에 방을 잡았습니다. 휴가 와서 가족들과 떨어져서 자는 것도 그렇고 엄마 집에서 잠을 자면 놀러 온 느낌이 덜 나니까요.
우거진 숲과 바위가 절경을 이루고 여름이라도 물이 얼음장 같은 강원도의 계곡에서 노는 건 즐거웠습니다. 평상을 빌리면 나오는 닭백숙을 점심으로 먹고 내리쬐는 햇살에 데워진 바위에 누워 차가워진 몸을 말리면 느낌이 좋았습니다.
모두가 웃고 떠들며 즐거울 때도 엄마는 가만히 계곡 물에 발만 담그고 있습니다. 어린 손녀가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며 수발들기 바쁩니다. 계곡 가 평상에 말없이 앉아 부채질을 하다가 이내 집으로 간다며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집에 간다는 엄마를 설득해 붙잡아 둡니다. 구불거리는 길을 돌아 오래 차를 타고 가더라도 평상시엔 갈 수 없는 유명한 막국수 맛 집에 가려고요.
윤나는 수육과 새콤달콤한 김치에 들기름향이 나는 국수를 배불리 먹고 나와서도 길가에 쳐놓은 파라솔에 의지해 앉은 할머니의 옥수수를 사 먹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낡은 기와집 온돌방에서 김 가루와 깻가루가 솔솔 뿌려진 감자옹심이를, 솥 밭에서 날아온 바다 냄새 흩뿌려진 회와 매운탕을, 골목을 가득 메운 사람 온기와 발소리로 익힌 메밀 전과 감자전도 먹었습니다. 엄마 집에 거실에서 지글지글 구워 먹는 삼겹살도 질리지 않는 저녁 메뉴입니다.
우리 부부는 휴가 하면 이때를 떠올립니다. 이때가 제일 좋았다고요. 매번 색다른 물놀이 장비를 구비하고 더 놀기 좋은 물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 즐거움이 쏠쏠했거든요. 물이 적어 놀기에 적당하지 않은 장소를 만날 때도 있었지만 최적의 장소를 만나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휴가를 보내곤 했습니다. 물가에서 놀며 밥을 지어먹고 낮잠도 즐기고 저녁이 되면 맛있는 걸 먹으러 가며 행복한 중에도 엄만 늘 집에 가고 싶어 했지만요.
우리의 여름 여행은 거창한 이유로 그럴듯했지만, 대부분 우리의 사심을 채웠습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뵙자고 계획한 휴가였지만 어린아이들과 노느라 정작 엄만 뒷전일 때가 많았습니다.
아이들을 맡겨놓고 저녁이면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떠느라 시간을 허비했고 늦게 귀가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갈 때도 거절하거나 귀찮아하시면 우리끼리 즐겼고 잘해드리려고 갔는데 어느새 신세를 지고 있었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좋아만 해 주시니까요.
딸에게 엄마 집은 숙식을 제공하는 맘 편한 셰어하우스요. 몸 편한 아이 돌봄 서비스 센터였습니다. 물론 무료입니다.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멋모를 땐 맘대로 지껄여댔지만, 엄마는 한순간도 자신을 내어주지 않은 적 없는 든든한 나무였습니다.
밤톨만 하던 아이들도 다 커버리고 기대기 좋은 나무였던 엄마도 없지만, 내년 여름엔 추억이 담긴 계곡 가에 텐트를 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