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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미 Oct 21. 2024

마음이 물들겠지요

가을, 국화처럼

지지난 여름, 남편은 꽃모종을 잔뜩 안고 집에 들어왔습니다. 꽃에 감흥이 없는 나는 “꽃은 뭐 하러 심어. 난 심플한 게 좋아.” 멀뚱한 얼굴로 한마디 했습니다. “꽃이 있으면 기분 좋잖아.” 묵묵히 삽질만 하던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나한테 도움 구하지 마.”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마당 입구에 잔디를 들어내고 벽돌을 비스듬히 줄 맞춰 세우는 걸 도왔습니다. 노란 들국화와 하얀 팬지, 수국, 카네이션 …….      


겨울을 지나며 마당에 심어둔 꽃들은 따스한 볕에도 앙상한 것이 곧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더위와 비바람을 견디며 햇살을 머금고 푸르게 자란 봉우리가 찬바람이 돌 때쯤 터져 나왔습니다. 다시 노란색, 자주색 들국화가 피었습니다. 화단옆에 쭈그려 앉아 국화꽃을 빤히 보는데 엄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엄마가 좋아하는 꽃이 들국화였지!’   

  

초고속 인터넷이 깔렸지만, 내가 사는 동네는 통신사를 고를 수 없고 영상 재생 시 가끔 버퍼링 걸립니다. 나 역시 옛날 컴퓨터처럼 생각에 버퍼링 걸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무슨 꽃을 좋아하냐고 물어볼 땝니다. 생각을 돌리며 망설이다 끝내 말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애숙 씨.    

  

괜히 들국화의 꽃말은 검색해 보았습니다. 색상별로 꽃말은 다 다르더군요. 문득 엄마가 어떤 색 국화를 좋아했는지 궁금해졌고 종일 엄마 생각을 했습니다.  

    

TV를 보던 엄마가 얼굴을 돌려 반닫이 위에 놓아둔 흑백 사진을 빤히 들여다봅니다.  버릇니다. 손을 뻗어 액자를 품에 가져와 ‘후’ 입김을 불고는 소매로 먼지를 닦아냅니다. 사진 속 할아버지는 훤칠한 키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고 양복을 입었습니다. 키가 작고 순진해 보이는 할머니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었고요.      


엄마는 할머니 이야기보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잘생기고 훤칠하며 많이 배운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한참을 자랑하다 이야기 끝무렵엔 원망하며 맺었습니다.


 자신을 공부시키지 않고 시집보냈다고, “남들처럼 배우게 해 줬더라면”이라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었죠.    

  

그러다가도 TV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눈물을 훔치며 따라 부르다 종이와 연필을 내밀며 노랫말을 적어 달라하기 일쑤고. 휴대폰에서 문자 보내는 법을 가르쳐 달라, 영어를 배우고 싶다, 등 모두 짜증스러웠습니다.


엄마가 날 좀 내버려 뒀으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억지로 준 도움들, 귀찮은 마음에 투덜거렸던 기억들이 가슴을 쿵, 쿵쿵 치고 들어옵니다.

궁금한 단어를 물어보라고 하고 한글로 발음을 노트에 적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함께 팝송을 듣고 부를 수도 있고, 친절하게 말하고, 더 많이 가르쳐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삶을 한탄하고 부모를 원망하는, 현실에 만족하고 전념하지 뭔가를 더 해보려고 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 내게 엄마는 돈 필요할 때 돈 내어주면 되는 사람, 커서 엄마는 김치 담글 때, 아이 돌볼 때, 반찬 만들 때 또 도움이 필요할 때 곁에 있어줄 사람이면 됐으니까요.     


마지막 인사를 해보겠다고 끄적거리며 엄마 생각을 오래 하고 나서야 알아챘습니다. 조각난 기억들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나풀거리다 글자가 되어 탁탁탁 종이 위에 내려앉고 나서야 퍼즐처럼 하나씩 맞춰졌습니다.      


엄마는 배움에 대한 아쉬움과 열정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 엄마 애숙 씨. 그녀는 꿈꾸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고 싶어 했고, 기꺼이 자식에게 도움을 청해서라도. 늦은 나이에라도 나아가고 싶어 했다는 것을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그것은 내 삶의 모토였습니다. 엄마가 불행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나는 지금 엄마처럼 살고 있습니다.


잘 모르는 건 도와달라고 자식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거절도 당하면서요. 배움에 대한 열정을 안고 꿈을 꾸는 사람으로요.      


엄마와 다른 것이 있다면 때로 자식보다 앞설 수 있는 환경과 사회적 풍요 속에 살고 있고, 때가 되면 관공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손쉽게 원하는 무료 평생 학습 강좌를 신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열심만 있으면 자식에게든 누구에게든 아쉬운 소리 안 하고 배울 수 있게 되었지요. 엄마와 달리 좋은 시절을 타고난 사람이니까요.     


올해도 마당엔 들국화가 피겠지요. 그리움이 피어오르듯 몽우리를 터뜨리고 가을마당을 환하게 수놓겠지요.


활짝 핀 들국화처럼 엄마도 내 맘을 그리움으로 물들이겠지요. 이제는 곁에 없지만 이전보다 선명하게 엄마는 내 마음에 자리 잡았으니까요.


엄마가 보고 싶습니다. 나를 자랑스러워하던, 옷매무새를 다듬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잘못을 눈감아 주던 엄마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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