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린내와 짠내, 붐비는 사람들 냄새로 가득한 죽도 시장. 명절이면 어머님과 장을 보러 가는 곳이었습니다. 장을 볼 때 어머님은 자식들 좋아하는 회 사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오징어 회 누구 드리게요? 집에 누가 와요?”
“아니, 주긴 누굴 줘 네가 먹어야지. 너 오징어 회 먹고 싶다며 뱃속에 계신 이빨 없는 어른이 먹고 싶은 거잖아.”
포항 어머니는 넓은 마음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유머도 있으시고요. 맛있는 걸 사주실 땐 주저함도 없으시고 괜찮다고 해도 넘치도록 정을 주시는 분이셨지요. 우리가 가면 도가니탕을 끓인다고 커다란 솥단지를 밤새 가스불에 올려놓으시고 김치를 새로 하고 뭐든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음식이 너무 많아 무엇을 먹어야 하나 걱정이었죠.
그래도 나는 어머님이 바리바리 싸주시는 음식을 챙기는 둥 마는 둥 강릉 집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부터 강릉’이라는 표지판이 보이면 눈앞이 환해지고 한껏 들이켠 숨이 코끝에 닿을 때 들어오는 솔향기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대충 끓인 막장찌개에 김치만 먹어도 친정 엄마 곁이 좋으니까요. 엄마는 277km라는 먼 길을 단숨에 달리게 하는 그리움이니까요.
꽉 막힌 도로를 뚫고 강릉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저녁밥때.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가 웃으며 맞아 주십니다. 아이들은 “할머니” 하며 품에 안겼다가 신발을 벗어던지고 방으로 직진했고 나는 뭐 먹을 거 없을까 싶어 부엌으로 직진했습니다.
주방엔 요리한 흔적이 없고 냉장고엔 썰어 놓은 지 한참 된 검붉고 냄새나는 김치, 고추장, 제대로 보관하지 않아 말라비틀어진 양파와 고추, 대파 몇 뿌리만 있었습니다. 밥솥엔 누렇게 뜬 밥뿐이었고요.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남편 눈치가 보였고요. 명절에 집에 자식이 오는데 아무 준비 없이 앉아 있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진: Unsplash의 Annie Spratt
아이들이 할머니께 세배했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엄마는 세뱃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세뱃돈을 못 줘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데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더군요. 서운하고 답답한 마음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다른 부모들과 아니 가깝게 포항 부모님과 비교가 됐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용돈을 드리는데 너무 인색한 거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엄마는 오빠와 단둘이 살았습니다. 큰언니와 살던 엄마가 오빠와 살게 되면서 우리도 명절이면 강릉 집으로 가기 시작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던 오빠는 생활비를 제대로 드릴 형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몇 해를 엄마 앞으로 나오는 약간의 노령연금과 공공근로를 하고 받는 돈을 살림에 보태도 남는 게 없는 힘겨운 삶을 이어간 것 같습니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힘든 줄은 나도 몰랐고요.
설령 오빠가 충분한 돈을 주었고 엄마가 돈을 헤프게 썼으며 명절에 음식 장만을 안 했다 한들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이 들어 혼자 외로운 노인이 친구 만나느라 모임에 가고 놀러 다니느라 돈 좀 쓰고 음식 하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고 흠이 되나요. 부모가 되었다고 무조건 자식들만 위하고 자식 위해 희생해야 부모다운 건 아니니까요.
헤프게 돈을 쓰면 또 얼마나 썼겠습니까. 그깟 계모임, 여행 한 번에요. 자식들이 이따금 드리는 용돈 몇 푼에 만족할 만큼의 씀씀이가 나올 수도 없었을 겁니다. 엄마는 인색해서가 아니라 기름 냄새 풍기며 음식을 해놓을 만큼, 세배를 하는 손주들에게 용돈을 줄 만큼 풍족하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수중에 있는 몇 푼이라도 소중하게 아껴서 써야 했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내가 그런 사정을 알고 미리 챙길 만큼 마음 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요. 핑계를 대자면 엄마는 언니들에겐 살림이 넉넉하지 않을 때마다 손을 벌렸지만 막둥이인 나에겐 내색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그럭저럭 사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 일단, 아이들 세배하고 나면 이 봉투에서 만원이라도 꺼내서 줘. 평소보다 넉넉히 넣었어. 할머니가 안 주면 우리 애들 누구한테 세뱃돈 받아.”
봉투를 찔러 주며 참다못해 한 귓속말은 고작 이랬습니다. 맞지만 맞는 말이지만 그래야 엄마도 손주들한테 얼굴이 서지만. 엄마 생각보다 자식 생각이 앞섰습니다. 아니 어쩌면 남편 앞에서 내 체면이 엄마보다 먼저였습니다.
집안을 잘 돌보지 않고 술만 마시면 폭군이 되는 남편과 홀어머니 모시고 눈물로 살면서도 자식 다섯을 지켜낸 인내를 보여준 엄마. 맨몸으로 세상과 부딪혀 온갖 설움을 딛고 자식 입에 밥을 넣고 옷을 입힌 엄마. 모질게 채찍질하고 뒤돌아 눈물을 닦던, 부모 탓하는 자식들 원망에 속이 다 타버린 엄마.
그때 나는 엄마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고됐던 삶과 저릿하게 품었던 아픔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부족한 엄마를 닦달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드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 시절의 나는 자상한 남편을 만나고, 순한 아이를 낳은 덕분에 꽃길을 걷듯 살면서도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못마땅한 것이 많은 불안정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래도 나는 엄마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착하고 어른스럽게만 행동해야 하고 생각이 짧고 지혜가 부족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가끔은 착한 사람이 괴로움을 당하고 악한 사람은 오히려 대접받으며 편히 살고, 넘치게 퍼 주기만 하다가 죽는 사람도 있으며 많이 받기만 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이라는 아이러니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요.
모두가 흐르는 강물처럼 그저 유유히 살아갈 뿐이고 우린 가끔 급류에 휘말렸을 뿐인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