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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 하리라 : 학생운동사 (하)

by 테서스

(앞 챕터에 이어 서술합니다.)


(3) 전성기 : `90년 ~ `92년. NL-PD 논쟁


학생운동을 하는 소위 '운동권'이 전체 대학생 숫자에 비해서는 소수였다고 하지만, 그건 어느 시민운동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하는 1~3%에 가끔 동조하는 5~10%가 더해지고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30%가 있으면 거대한 사회변혁을 일으킬 수 있죠.


`9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은 사회변혁을 일으킬 수 있을 만한 규모가 되었습니다. 덩치로 보면 사실상 최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고, 투쟁의 강도 측면에서도 가장 격렬했습니다. 전세계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던 학생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운동권들은 [혁명 이후]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생 주도로 물렁이아재 군사정권을 뒤엎고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이걸 진지하게 고민했었다고 합니다.



사후적으로 이렇게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얘기를 들으면 "뭐야 진짜야?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었어요. 90~92년 선배들이 너무 멀리 나갔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아예 허황된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의 규모는 정말로 대한민국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장기간 유지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비상체제로 짧게 끌고 나갈 힘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나오는 게 '3만 사수대 설(說)'이죠. 실제로 3만 명의 사수대가 모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대협 차원에서 총동원 지령을 내리면 1만명 이상은 모을 수 있었습니다. 쇠파이프를 들고 화염병을 투척할 수 있는 무력행사요원이 최소 1만 ~ 최대 3만 규모였다는 겁니다.


2024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전체 경찰 인력이 15만명 정도 되는데, 21세기 이후 공무원이 많이 늘어난 걸 감안하면 1990년대 초반 기준으로 전경 제외한 순수 경찰 인력은 5~6만명 정도였을 겁니다. 모든 경찰 인력이 24시간 근무하는 건 아니니 통상적인 경찰 수는 3~4만명 수준이었겠죠. 즉, 당시 학생운동 사수대 인원만으로도 임시적인 경찰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아무튼 대한민국 학생운동은 그 최전성기에 '혁명을 이루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었고, 그에 따라 내부적으로 격렬한 이론 투쟁을 펼치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 같은 논쟁. "NL-PD 논쟁"입니다.


NL은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 PD는 민중민주 혹은 인민민주(People Democracy). 대충 크게 보면 NL은 민족.자주.통일을 중요시하고 '우리민족끼리 잘살자'는 게 최종 목표고, PD는 '인민'으로도 번역되는 people을 내세워서 공산~사회주의 방식의 사회체제를 확립하는 게 최종 목표였습니다.


(*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은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내세우는데요. 이처럼 미국식 민주주의에서는 Nation(나시옹. 국민) 주권과 Peuple(쀠쁠. 인민) 주권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는 인민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 결합되면서 국민민주주의 쪽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였고 대한민국도 '국민'이라는 말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만... 천조국은 그딴거 별로 신경쓰지 않았나 봅니다.)



2024년의 시각에서 보면 통일이든 공산혁명이든 다 헛소리 같지만 90년대 초반 운동권들은 진지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진지하게 며칠씩 토론했다고 해요.


하지만 이 토론은 한순간에 훅 꺾입니다. 왜냐? 소련이 망해버렸거든요.


1992년 말 소련 붕괴. 이건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줍니다. 당시 세계를 양분하던 초강대국 중 한 축이 자체적으로 무너져 내렸고, 그 체계를 신봉하거나 / 최소한 우호적으로 보던 사람들에게 거대한 정신적 충격을 선사합니다.


NL-PD 논쟁을 벌이던 당시의 학생운동권들에게도 소련 붕괴는 상당한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아예 공산~사회주의 혁명을 논하던 PD 측은 직격탄을 맞았고, 주체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고 북한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던 NL들도 만만치 않은 타격을 받았습니다.


소련 붕괴는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대한민국 학생운동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대한민국 자체적으로는 개입할 수 없는 대외적인 요인이긴 했지만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열기가 확 가라앉았죠.



이렇게 대외적인 거대 변수 외에 '대한민국 내부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투쟁일변도의 학생운동이 시민들의 지지를 잃어 간다] 는 문제. 이게 의외로 컸습니다.


`87년 민주항쟁이 대머리아저씨 독재를 끝장낸 건 맞지만, 그 뒤 이어진 직선제 선거에서 대머리아저씨의 절친 물렁이아저씨를 대통령으로 뽑아 버리면서 군사정권이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학생운동 입장에서는 물렁이아저씨 정권도 타도할 대상이었죠. 직선제로 뽑힌 대통령이라 해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다만... 일반 시민들은 좀 달랐습니다. '어쨌든 선거로 뽑힌 대통령인데 기본적인 국가체계는 인정해야 하지 않냐?'는 입장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물렁이아저씨는 보기보다 유능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사후적으로 평가할 때 꽤 뛰어난 정치군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머리아저씨는 나름 경제라도 살렸는데 후임자인 물렁이아저씨는 한 게 없다'고 말합니다. 뭐 경제 영역에서는 그 말이 맞겠죠.


그러나 외교 및 내부정치에서는 물렁이아저씨가 꽤 뛰어났습니다. 특히 '북방외교'는 당시 세계적으로 지지받기도 했었습니다.


일단 88년 올림픽에서 정말 오래간만에 자본주의+공산주의 국가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축제를 열었습니다.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라는 노래 가사 그대로 전세계 스포츠인이 모였고 그 경기 영상이 전 세계로 송출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소련과 수교. 이 과정에서 오랜 동맹이었던 대만과 사이가 틀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소련과 친해졌습니다. 체르노빌 사태 이후 경제적으로 매우 안 좋던 소련에게 돈을 빌려 주고 탱크로 받아 오는 (당연히 우리가 손해지만 대외적으로 평화노력 이미지를 얻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소련 붕괴. 물렁이아저씨의 북방외교 하나로 무너진 건 당연히 아니지만 일부 영향은 줬을 거예요. 대한민국의 시민 상당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반면 학생운동권은... 투쟁 투쟁 무한투쟁. 화염병과 쇠파이프는 기본. 가끔 학교로 진입하는 전경들을 막는답시고 학교 안에 휘발유 붓고 불 지르는 극단행동(...)도 하고(동의대 사건), 사수대의 맹활약(!)으로 전경 대오를 박살내고 북한으로 진격하는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으며, 잊을 만 하면 프락치 폭행치사 사건을 터뜨려 줬습니다.


물렁이아저씨는 최소한 정치군인으로서의 역량은 뛰어났습니다. 학생운동 세력을 뿌리뽑기보다는 적당히 관리하면서 일부 극렬 지도부만 좌경용공세력으로 몰아 색출하는 작전을 썼고, 사수대 무장투쟁은 '학생들이 너무 난폭하네.'라는 낙인이 덧씌워지도록 몰아갔습니다. 혈기 넘치는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물렁이아저씨 쪽에서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갇혀 버렸죠.


이렇게 학생운동의 전성기가 지나갑니다. 그리고...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4) 쇠퇴기 : `93년 ~ `97년. 한총련 시대. `96년 연세대 투쟁 및 `97년 이석 고문치사 사건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섭니다. 몇 년 후에 IMF라는 대재앙을 막지 못한 김영삼 대통령이 3당합당이라는 야바위(!)를 시전하며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93년부터 임기를 시작합니다.


김영삼 정부 때에도 "아직 군사독재는 끝나지 않았다! 3당합당은 쓰레기 야합질이야! 군사독재 시절 부역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잖아!"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선봉장이었던 김영삼이 대통령 자리에 눈이 멀어 독재자 잔당과 야합했다는 주장. 뭐 틀린 말은 아니죠.


그러나 반면 "어쨌든 김영삼도 민주투사다!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전략을 선택한 것 뿐이야! 이게 진짜 민주주의다!" 라는 반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는 국민 지지율이 상당히 높기도 했었죠.


이렇게 '야바위 야합은 있지만 어쨌든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대외적으로는 소련이 망했습니다. 투쟁 일변도의 학생운동은 (원래도 소수였지만) 더더욱 일반 대중의 지지를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한총련]이 출범합니다. 기존의 전대협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생활밀착형 학생조직(?)을 띄웠다고 하는데... 글쎄요. 생활밀착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 불패의~ 한길 달려온 자랑찬 백만청년아~ 민족의 등불은 청년의 눈빛 당당히 밝혀 가리라~


한총련 진군가를 다 외우고 있는 필자 본인은 `95학번입니다. 대략 한총련 3기 시절에 대학 새내기가 되었죠. 지방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다가 갑자기 서울 올라와서 제대로 적응 못하는 얼치기였기도 했고...


어릴 때 공업도시 출신이었던 영향 및 처음 만난 선배들의 영향(!)으로 저는 PD계열 운동권 테크트리에 살짝 한 발 담궜었습니다. 깊이 담근 건 아니고 살짝. 아주 살짝. 매우 살짝.


앞 글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통일운동을 싫어한다.'고 했었는데요. 이 또한 PD계열 운동권 테크트리의 영향이 없지 않을 겁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 웅앵웅 하는 게 싫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우리 나라의 시급한 과제는 민족자주통일 따위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이야!" 라는 사고방식을 자주 접했던 영향이 더 크겠죠;;



아무튼 이 한총련 시절의 학생운동은 그 이전 전대협 시절에 비해 확연하게 축소되어 있었습니다. 1만~2만의 사수대를 동원하던 능력은 최대 3천명 정도 동원하는 수준이었고, 전경 대오를 아작내고 북한 땅으로 진군하는 영웅적인 투쟁(...)은 더 이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뭐 생활밀착형 시민운동이 제대로 된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학생운동 하는 운동권들이 대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 봐야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들과 친해질 리 없잖아요. 서로 적당히 모른 척 하는 게 낫죠.


그 와중에 김영삼 정부는 극렬 학생운동 지도부를 좌경용공세력으로 잡아들이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학생운동을 대하는 방식은 물렁이아저씨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죠. 오히려 일부 영역에서는 더 강하게 나왔습니다.



김영삼 정부의 학생운동 대처 방식이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난 게 '96년 연세대 투쟁 때였는데요. 당시에 저는 연세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지만(제가 속한 동아리가 PD계열이다 보니 한총련 출범식에 별 관심이 없기도 했습니다), 연세대로 들어갔던 학생들은 꽤 고생했던 것 같습니다. 경찰들이 학교를 포위+봉쇄해 버렸거든요.


군사정부 시절에도 전대협 출범식을 전면 봉쇄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하는데, 문민정부는 한총련 출범식 장소를 전면적으로 봉쇄했습니다. 내부에 갇힌 학생들 측에서 사수대를 조직해 뚫고 나오려고 했지만 잘 훈련된 전경들은 최루탄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막아냈죠.


당시 운동권들은 "너희가 탄압하면 할수록 우린 더 강해진다!"고 외쳤지만, 운동권들이 강해질수록 시민 및 일반학생들과 멀어지는 부작용(!)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연세대 투쟁 당시 학생들의 폭력적인 모습이 계속 부각되었고, 시민들은 '학생들이 왜 저렇게 오버하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총련은 기존 투쟁 방식을 이어갔습니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했어요. 많아야 20대 초중반인 청년들에게 그 이상의 상상력을 기대하긴 어려웠죠.


그 낡은 투쟁 방식이 결국 문제를 일으킵니다. `97년에 발생한 불행한 사고 - '이석 씨 고문치사 사건'입니다.



`97년 당시에 저는 한양대에 들어갔었습니다. `96년 연세대 투쟁 때에 안 갔던 게 약간 미안하기도 했고(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그때는 진짜로 조금 미안했었습니다. 많이는 아니고 쪼큼. 정말 쪼큼.), 어차피 학교 수업은 안 들어가고 하루종일 놀고 있으니 심심하기도 해서 따라가 봤었습니다.


`96년 같은 학교 봉쇄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산 명령이 내려오더군요. 한양대에 모였던 수천명의 학생들이 다 당황했었습니다.


그 갑툭튀 해산 명령의 진실은 다음 날 알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던 시민을 프락치로 몰아서 잡아 가두고 쇠파이프로 수십 대 구타하여 죽였다."는 진실을.


당시에 시위가 벌어지면 프락치가 많이 잠입하긴 했었습니다. 제 선배 한 분이 프락치를 잡아 현장에서 경찰무전기를 빼앗는 걸 보기도 했었죠.


그러나 이석씨는 그런 것과 무관했습니다. 그냥 성실하게 공장 다니던 노동자가 서울 구경 나왔다가 프락치로 몰려 붙잡혔을 뿐입니다.


그런 일반 시민을 때려 죽였습니다.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의 사수대 대원들이 일반 시민을 때려 죽였습니다.


민족의 등불은 청년의 눈빛이라는데 그 눈깔을 희번덕거리며 무고한 시민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나온 한총련 지도부의 해명 대자보. 다섯 글자로 요약하면 '비겁한 변명'.


20대 초중반 젊은이들은 비겁했습니다. 명백한 살인행위 앞에서 자기 잘못을 줄이는 데에 급급했습니다.



프락치 오인 폭행치사 사건은 이전에도 꽤 있었습니다. 자칭 지식인이라는 유(사)시민 아재 때에도 폭행치사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그 사건 리스트를 다 정리할 수는 없지만 은근 많았었나 봐요.


그 중에서 제가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게 저 `97년 이석 고문치사 사건입니다. 무고한 시민 한 명이 무자비한 폭행으로 맞아 죽을 때 멀지 않은 곳에 있었죠. 폭행치사 범죄가 일어난 한양대 학생회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저 또한 서 있었습니다.


혐오감이 치밀어 오르더군요. 제 혐오소설로 유발할 수 있는 혐오감보다 오조오억배 정도 강했습니다. 그 때는 그러했습니다.



많이들 떠났습니다. 운동권에 살짝 발을 담궜던 저 같은 사람들은 미련 없이 떠났고, 좀 더 많이 개입했던 사람들은 조금 더 미련을 두다가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IMF가 왔고 민족게임 스타크래프트가 퍼지면서 '대 게임 시대'가 열렸습니다. 저는 한 발 더 나아가 인생삭제 게임이라 불리는 '문명'과 '히마메'에 발을 담궜었구요. 디아블로 시리즈와 월드오브워크래프트도 했네요. (현재 기준으로 반일주의자들이 거품 뽀골뽀골 내뿜을 것 같은) 일본게임 대항해시대도 했습니다.


통일운동 조까. 공산혁명 개소리 조까. 유교탈레반 스톼일로 집안의 기둥이 되어라 집안을 일으켜라 헛소리작렬 쇼 또한 조까. 게임이 '왓다'여!


학생운동의 쇠퇴기 끝자락을 찔끔 맛봤던 저는 짧은 고시생 시절을 거쳐 'PC방 죽돌이'가 되었습니다. 뭐 재밌게 잘 살았으면 됐죠.



(5) 이후 시대 : 잘 모르는데 아무튼 망한 것 같음


`97년 이후 학생운동은 잘 모르겠습니다. 계속 무장투쟁하는 사람도 있었고 통일운동이나 공산혁명(...)을 꿈꾸는 사람도 남아 있었겠지만 저는 잘 모릅니다. 대충 봐도 망한 것 같긴 하지만 누군가는 계속했을 겁니다.


세계에 유래가 없던 학생운동은 거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또다시 세계에 유래가 없는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전쟁국가보다 더 낮은 출산률로 인구를 줄여 지구 환경에 기여(!)한다'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 극단적인 나라가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늘 그랬듯이 해답을 찾을...까요?


제 입장은 '아몰랑'입니다. 저랑 제 가족만 잘 살아남으면 됩니다.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길을 찾으시면 그만입니다.



(6) 누가 반동인가?


마지막 단락은 '죽창가'로 시작하겠습니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진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 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파랑새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들불이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반란이

청 송 녹 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문서위조범으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온갖 구질구질한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대법원 판결 나기 전에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국개뱃지를 단 모 인간이 행정부 주요구성원이던 시절에 '반일선동'을 하면서 저 죽창가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좀 당황했었죠.


"이 인간이 자기 배때지에 죽창 꽂아 달라고 이 노래 올린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죽창가는 다들 아시다시피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한 노래입니다. 부패한 탐관오리 조병갑의 배때지를 쑤셔 창자줄넘기 하려고 봉기했으나 막상 그 조병갑은 빤쓰런 해 버리고 대신 나라 자체를 바꿔 보자고 한양을 향해 진격하던 농민들의 노래입니다.


그 동학농민군의 적(敵)이 일본군이었을까요?


우금치 전투 당시에는 일본군도 적이긴 했습니다. 고좆임금이 일본군 끌어들여서 관군과 함께 싸우도록 했으니 적이긴 했죠.


(몇 년 뒤에 그 일본군이 낭인들을 불러들이고 결국 그 낭인들이 고좆임금 아내인 중전 민씨를 시해한 건 아몰랑. 니가 조선의 국모인데 뭐 어쩔티비 알빠노. 느그 남편이 일본군 끌어들인 걸 원망하시던가.)


그런데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봉기할 당시에는 일본군이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썩은 관료를 갈아엎고 궁극적으로 임금을 갈아엎으려 하니 임금 스스로 일본군을 끌어들인 것 뿐, 시작 시점에는 일본과 무관했습니다.


오히려 동학농민군 1차 봉기 당시에 고좆은 '청나라'를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서 제압한 성공사례(?)가 있으니 그걸 재탕하려고 한 겁니다.


다만 신식군대 훈련을 맡았던 일본군 측이 청나라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병력을 증강했고(일본과 청나라 간에 '텐진 조약'이라는 게 체결되어서 청나라가 조선 내 주둔군을 늘리면 일본도 늘릴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청나라 군대를 몰아냈던 것 뿐, 시작 단계에서는 청나라나 일본이나 도긴개긴 급이었습니다. 나중에 잠깐 들어왔다가 러-일 전쟁 패배하면서 물러났던 러시아도 마찬가지였구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배때지에 죽창 쑤시겠다고 봉기한 게 아니에요. 청나라나 러시아의 영향력을 몰아내려고 봉기한 것도 아닙니다. 같은 땅에 태어나 같은 민족의 피를 빨면서 배 두드리고 있던 부패한 탐관오리, 그 탐관오리를 임명한 데다 자기 나라의 일을 외국 군대로 해결하려는 병림픽을 시전했던 한양 윗대가리들에게 창자줄넘기를 시전하려고 일어난 겁니다.


2020년대. 이 대한민국의 '부패한 탐관오리와 윗대가리'는 누구죠? 민중의 죽창을 배때지로 받아내야 하는 잡것들은 누구죠?



학생운동권 시절에 통일운동 웅앵웅 읊어대다가 이제 직업정치인으로 변신한 사람들. 그들과 함께 하다가 은근슬쩍 스리슬쩍 교수 자리 꿰찬 사람들. 국가권력을 국민을 위해 쓰려는 생각 따위는 똥구멍으로도 해 본 적 없고 오로지 기득권을 Yuji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


그렇게 만들어진 카르텔을 자식들에게 물려 주려고 입시 결과를 조작하는 사람들. 선동질 말고는 배워먹은 게 없는 잡것들.


그들이 반동(反動) 짓을 저지른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프랑스혁명을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는 불과 몇 년 만에 단두대로 끌려갑니다. 왕과 왕비의 모가지를 썰어버렸던 단두대에서 로베스피에르 본인의 목도 썰려 버립니다.


처형될 당시 로베스피에르는 단 한 마디도 못했다고 하네요. 분노한 병사가 로베스피에르의 턱주가리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쳐서 턱뼈가 아작났고 그래서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청렴하기는 했다'고 평가받는 로베스피에르도 턱주가리 처맞고 목 잘렸습니다. 청렴하지도 않고 남의 돈 빼먹으며 문서위조 조작질이나 하는 잡것들이라면 더 심한 일 당해도 할 말 없겠죠?



과거의 진보가 오늘의 반동이 된다면. 과거의 학생운동권이 오늘의 기득권이 되고 자기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카르텔을 만들며 내부적으로 썩어간다면.


그 반동에 대해 해 줄 말은 하나뿐입니다.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 하리라].


이만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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