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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 하리라 : 학생운동사 (상)

by 테서스

(작년 10월 정도에 써 놨던 글을 지금 올립니다. 저는 소설 쓸 때 비축분을 넉넉하게 쌓은 뒤 연재하는 걸 선호하는 편인데, 브런치스토리에 올리는 글도 이렇게 비축분을 쌓아 두는 경우가 있다는 점 말씀드립니다.)



1. 서론


먼 훗날 노동 해방의 그날엔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 하리라

찬란한 해방의 길목에서

불꽃으로 타오르라


<민중가요 '들불의 노래' 2절 중에서>



자주 그러하듯이 제목을 자극적으로 뽑았습니다.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 하리라".


과거 80~90년대 민중가요 중에서 가사가 꽤 강한 곡들이 여러 개 있습니다만, 저 '들불의 노래'에 나오는 반동피 도색 부분은 더더욱 강렬합니다. 노래 자체가 매우 서정적이고 담담한 분위기로 흘러가다가 그 서정적인 톤 그대로 갑자기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이라고 해 버리니 당황스럽기도 하죠.


뭐, 20대 초반의 저는 '들불의 노래'를 꽤 좋아했습니다. 당시 전국을 통틀어 가장 약한 사수대의 일원이긴 했습니다만 신체적으로 약하다고 해서 소시오패스 성향이 약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20대 초반이던 시절에는 소시오패스라는 말이 없었습니다만 돌이켜보면 그 때부터 이미 소시오패스이긴 했어요;;


아무튼, 오늘은 대한민국 학생운동사를 짧게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나무위키 등에 이미 잘 정리되어 있고 관심 있는 분들은 그런 인터넷 자료만으로도 충분히 공부하실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학생운동사 끄트머리에 살짝 발 올린 497 세대 중 한 명이 개인 경험을 섞어서 읊조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제 경험만 정리할 수는 없고, `80년대 초반부터 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95년 이전 사건은 저 또한 카더라 통신으로 들었거나 / `90년대 중반 학생운동사 책을 띄엄띄엄 읽으면서 습득한 지식이라는 점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여명기 : `81년 ~ `86년

(2) 확장기 : `87년 ~ `89년. 전대협 출범

* 학생운동이 아닌 외부 영역의 변혁운동 성장 : `87년 노동자 대투쟁.

(3) 전성기 : `90년 ~ `92년. NL-PD 논쟁

(4) 쇠퇴기 : `93년 ~ `97년. 한총련 시대. `96년 연세대 투쟁 및 `97년 이석 고문치사 사건

(5) 이후 시대 : 잘 모르는데 아무튼 망한 것 같음

(6) 누가 반동인가?


순서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2. 본론


(1) 여명기 : `81년 ~ `86년


사람마다 다르게 보겠지만, 저는 81년~86년 사이를 여명기(黎明期)라고 부르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학생운동이 아직 본격적으로 굴러가진 않았지만 대머리독재 아래에서 서서히 힘을 축적하고 있던 시대라는 의미로 이렇게 부를 예정입니다.


물론 `70년대에도 학생운동은 있었습니다. 그 때에도 군인독재 중이었고 민주주의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저항하긴 했었죠. 79년에는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시위가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나기도 했구요.


다만, 70년대의 학생운동은 이론적으로 통일되지 않았고 무력시위도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시위를 막는 경찰들과 서로 몸싸움을 하다가 밥 먹을 때가 되면 상호합의(!) 하에 밥 먹고 다시 몸싸움하는 정도였다고 하네요. 제가 어릴 때 들은 바로는 그렇다고 합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분위기는 1980년을 기점으로 확 바뀝니다. 80년 광주, 5.18 시민혁명 이후로 크게 바뀌죠.



대머리 아저씨와 물렁이 아저씨가 군발이들을 동원해 시민들을 학살하고 시민들은 이에 맞서 자체무장했으나 끝내 군인들의 우월한 화력을 당해 내지 못했던 사건. 이 사건 당시, 시민군 내에 소위 '지식인'이라 부를 만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당대에 엘리트로 대접받던 청년학생들과 대학 물 먹은 사람들은 무장투쟁까지 가진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80년 이후 학생운동은 꽤 과격하게 진화(進化)합니다. 나름 '목숨을 걸었다'라고 할 만한 일들을 많이 했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전국 각지의 미국 문화원을 무력으로 점거하는 시위였습니다.



위에서 '70년대 학생운동은 이론적으로 통일되지 않았다'고 했는데요. `80년대 초반 학생운동도 이론적인 체계는 부족했다고 합니다. 민족분단의 원흉으로 미 제국주의를 지목하는 분위기가 있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체계적이진 않았다고 하네요.


또한, 당시의 학생운동은 [하는 사람만 하는 비밀 지하조직]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흔히 586이라고 하면서 `80년대 학번 전체가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인 양 포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 `80년대 학번 중 상당수는 청바지에 통기타 둘러메고 막걸리 마시면서 널럴하게 학교생활 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대부분 정신적으로는 '대머리아저씨 독재 짱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만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서는 사람들은 몇 없었다고 합니다.


(학생운동이 대폭 확장되던 시기에도 막상 '운동권'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586 497 전체가 무슨 민주주의 투사인 듯 행동하는 건 우스운 일이죠.)



아무튼, 이렇게 이론적으로 흩어져 있던 학생운동 세력은 85년 말 ~ 86년 초를 기점으로 이론적 구심점을 갖게 됩니다. '강철서신'이 그 출발점이었습니다.


서울법대 82학번 김영환 씨가 북한의 주체사상을 공부하고 이를 기반으로 미 제국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각 대학에 대자보를 붙인 게 '강철서신'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민중가요 가사에 '~강철 되어 가리라' 등으로 강철(鋼鐵)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그 원조가 바로 강철서신이었죠. (원조국밥?)


주체사상에 동의하든 않든 간에 이 시기 강철서신의 영향력은 꽤 컸다는 사실은 다들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대머리아저씨 독재에 대해 엄청난 불만을 갖고 있던 학생운동 세력에게 이론적 기반이 되어 줬고, '우리민족 우리땅 우리끼리 통일'이라는 깔끔한(!) 결론은 꽤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아래에서 다시 서술하겠지만 저는 통일운동 계열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요. 어릴 때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같은 이데올로기 주입식 노래가사에 중독되어 그게 마치 지상과제인 양 생각하던 게 시민~학생운동까지 영향을 미친 거 아닐까...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뭐 95학번이 사후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80년대 중후반의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만.)



일부 소수의 학생들이 문화원 점거 등 폭력을 동원하면서 비밀 지하조직 방식으로 활동했고, 85~86년에 북한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한 이론적인 체계화를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80년대 중반까지의 학생운동 상황이었습니다. 군사독재는 여전히 단단해 보였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거대한 불만이 끓어오르고 있었죠.


이 불만이 한 번에 폭발합니다. 이 반도의 땅 남반부에 [`87년 민주화 항쟁]이라는 큰 사건이 어느 날 도둑처럼 다가왔습니다.



(2) 확장기 : `87년 ~ `89년. 전대협 출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더라."는 희대의 개소리(!)가 국민적인 분노를 폭발시켰고, 넥타이 부대와 학생들과 블루칼라 노동자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들고 일어납니다. 당시 추산으로 100만에 달하는 인파가 전국 각지에서 시위에 참여했었다고 하네요.


`80년 광주에서는 시민들을 학살했던 대머리독재 군사정권이 이 시기에 무력진압 시도를 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진압 지시를 내려도 각 군대 사령관과 장교들이 제대로 따르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을 것 같네요. 좀 더 생각해 보면 '미군'의 동향도 고려했을 것 같구요.


`80년에 대머리아저씨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에는 미군이 전혀 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 이후 7년 간 전국 각지의 미 문화원이 점거되는 사태를 겪으면서 미국 자체적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한국에서 군사독재를 유지하는 게 나은지 / 일단 민주주의 쪽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하는 게 나은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겠죠.


군대를 동원했는데 미군이 막아선다면 대머리아저씨는 그냥 똥 됩니다. 그 정도 위험까지 감수할 수는 없었겠죠.



몇 달 동안 전국에서 시위가 이어진 뒤, 대머리아저씨와 운명공동체였던 물렁이아저씨 주관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발표됩니다. 선거인단을 통해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던 체계를 전면 폐지하고 전국적인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거였죠.


국민들은 환호합니다. 대머리독재 7년 만에 자유가 왔다고 모두가 환호합니다.


그리고 선거. 그 결과는... 물렁이아저씨가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87년 민주화 대항쟁 및 대통령 직접선거 당시 저는 국딩이었습니다(초딩 아닌 국딩). 국딩 시각에서 볼 때, 물렁이아저씨가 대통령 된 건 어부지리(漁夫之利)였던 것 같네요. 나름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고 자부하는 양김(김영삼, 김대중)이 표를 분산시켜 버렸고 박정희의 유산과 충청도 지지세를 끌어안은 김종필도 표를 나눠 가졌죠. 6공화국의 첫 대통령 자리는 '노태우'에게 돌아갔습니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지만, 이 때 당시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엄청난 반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머리독재를 타도하려고 100만 넘는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투쟁했는데 결과는 대머리아재 친구 물렁이가 대통령 꿀꺽 냠냠. 반발할 만 하죠.


그리고, 물렁이아저씨는 기존의 대머리아저씨에 비해 많은 규제를 풀어 줍니다. 어찌됐든 민주화 운동의 결과물로 6공화국이 탄생했으니 5공 대머리독재 시절처럼 사람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규제하는 짓은 못 했겠죠. 나라 전체에 매우 급격한 자유가 찾아옵니다.


군사독재를 타도하지 못하고 대머리 친구 물렁이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자괴감 + 갑자기 넘쳐나게 된 사상의 자유. 이 시너지 효과는 꽤 컸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시민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그 선봉에 '학생운동'이 있었습니다.



학생운동은 크게 확장됩니다. `86년까지는 지하조직 성격이 강했고 그 조직이 실력행사를 할 때에는 소수정예 중심의 투쟁 방식이 많았었지만, `87년 이후에는 거의 대중적이고 공개적인 투쟁을 하게 되죠. 소위 '운동권'이라 불리는 학생운동세력이 대폭 불어나게 됩니다.


물론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 있었고 좌경용공세력을 척결하겠다는 기존 군사독재 마인드도 남아 있긴 했습니다. 학생운동 하다가 갑자기 체포되고 끌려가는 사태가 많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특히 폭력시위를 주도한 경우에는 거의 지도부 구속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정부 차원에서 규제를 하긴 했습니다만, 학생운동 세력은 사소한 규제 정도는 씹어먹겠다는 듯 거대한 규모로 성장합니다. 적절한 계기만 있으면 정말로 정부를 들어엎고 학생운동세력이 주도하는 과도기 정치를 실현할 수 있을 정도까지 성장합니다.


이 시기의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단체가 '전대협'입니다. '구국의 강철대오'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유명하죠.



전대협의 캐피프레이즈에 '강철'이라는 말이 들어가는데, 아마도 이는 '강철서신'의 영향이 컸을 겁니다. 강철서신 자체가 북한 주체사상을 이론적 기반으로 했다고 하니, 전대협의 투쟁 노선이 반미.자주.통일 중심이었으리라는 점은 대략 통빡으로 때려맞출 수 있습니다.


이렇게 통일운동 기반의 학생운동은 시대적 상황에 맞춰 거대한 집단이 됩니다. 그 여파는 2020년대에도 남아 있고, 당시 전대협 지도부를 이끌었던 사람들을 정치인으로 먹고살게 해 줬죠.


그리고 이 때 '통일운동 중심의 학생운동'과 약간 결이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변혁운동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학생운동사(史)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진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주기도 했었던 운동입니다.


'노동운동'에 대해 짧게 서술하고 넘어가겠습니다.



* 학생운동이 아닌 외부 영역의 변혁운동 성장 : `87년 노동자 대투쟁.


`87년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인데, 동시에 대한민국 경제 역사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했습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노동운동이 크게 성장했거든요.


대통령 직접선거 개헌을 이끌어 내고 6공화국을 출범시킨 후, 직장인들은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생들이 조금 더 추상적인 통일운동에 치중하고 있었다면 직장인들은 현실적인 임금인상과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했다고 보면 되겠죠.


소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에서 눈보라 휘날리는 서울 철로 위까지. 파업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단일사업장의 생산직 근로자(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노조가 결성되었고, 거대 사업장의 노조가 파업을 결의하면 며칠 동안 9시 뉴스 헤드라인에 보도되곤 했었습니다.


이 노동운동 세력은 자주민주통일 중심의 학생운동 세력과 쌍벽을 이루며 대한민국 시민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됩니다. 당연히 물렁이아저씨 쪽의 빨갱이몰이 사냥이 있긴 했지만 노동운동 또한 이 탄압을 이겨 내며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고 있었죠.


그리고,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서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러한 상호 영향 관계는 `90년대로 넘어가면서 양쪽 모두 이론적 논쟁으로 발전합니다.



쓰다 보니 원래 예상보다 길어졌네요. 이후 챕터는 '하(下)' 편에서 서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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