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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오로지 내 즐거움을 위한 '공부'

by 테서스

공부.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학생 시절에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인 동시에, 또 한평생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저 또한 그러합니다.


공부. 참 지긋지긋하죠. 초딩(국딩) 6년, 중딩 3년, 고딩 3년, 대딩 4년 합쳐서 기본 16년입니다. 가끔 대학원 가시는 분들은 20년 넘기도 하고 저처럼 고시생(을 가장한 게임중독 폐인) 생활을 하신 분들은 25년 이상 가기도 합니다. 저도 중간에 군대 갔다오고 취직한 기간까지 합치면 30대 중반까지 학생(學生) 소리 듣기도 했었네요.


심지어 한국사람들은 죽어서도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제삿상에 올려서 불태우는 (그러다가 가끔 산불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지방에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라고 써 놓죠. 뭘 공부했는지는 모르겠고 실제 공부의 성과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몰랑 무조건 학생이라구욧 빼애애액! 수준입니다.


이렇게 한평생 공부에 얽매여 살지만. 공부 좋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가아끔 가뭄에 콩 나듯 100명에 1명 정도는 공부가 재밌다는 사람이 있고 제 대학 동문들 중에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어쩌고 하는 책을 쓰신 분도 있다고 합니다만 일단 저는 아니에요. 공부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뭐, 저는 가방끈도 별로 길지 않습니다. 그냥 대학 졸업장이 끝이에요. 학사 졸업 논문도 대충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거 문장 몇 개 고쳐서 냈습니다. 애당초 학점이 학사경고 간신히 면하는 수준이기도 했고, 졸업장 따고 나서는 학교 쪽을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가끔 직장생활 하다 보면 가방끈 긴 분들을 보게 됩니다. 공부가 좋아서 굳이 돈 더 내면서 대학원 가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대다수는 [석사~박사 따면 회사에서 더 인정해 주니까] 가방끈을 늘리시는 것 같아요. 물론 본인이 셀프교육에 투자해서 스스로의 노동 가치를 높이는 건 아주 바람직한 일이니 하시겠다는 분 계시면 적극 찬성합니다.


다만 저는 가방끈 늘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일단 대학전공(학사경고 수준이지만 어쨌든 법학도이긴 합니다.)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이 전공으로 먹고 살긴 합니다만 저녁 퇴근시간 딱 되면 더 이상 전공과 관련된 글 같은 건 읽고 싶지 않아요. 법률이론이나 판례 같은 건 정해진 업무시간에만 보면 충분합니다. 심지어 집 계약할 때에도 계약서 문구 보는 걸 싫어할 정도인데 법 배우러 대학원 갔다가는 미쳐버릴 겁니다.



이 정도로 공부를 싫어하긴 합니다만...


제 딸들이 중학생 및 초등학교 고학년생이 되니 '공부 좀 합시다.'라는 말이 나오긴 합니다. 여윽시 Hell조선. 아빠가 공부를 싫어한다고 해서 딸들한테 '너네는 자유롭게 살아라.'라고 말해 줄 수는 없네요;;


그리하여 딸들이 학교 공부를 하면... 당연히 모르는 게 나오겠죠. 세계사, 과학, 영어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모르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가끔 제 딸들이 학교 문제를 저에게 물어보곤 하는데요.


뭐 대충은 대답해 줄 수 있습니다. 100% 다 맞추는 건 아니지만 얼추 90% 정도는 대답해 줄 수 있어요. 초중고 학습과정은 30여 년 전에 끝냈지만 그래도 중딩 레벨까지는 대충 보면 알겠더군요.


예전에 제가 공부 좀 하긴 했었나 봅니다. 고시생 시절에 안 좋은 일을 겪으면서 학습거부증상 같은 게 있었던 시절도 있습니다만 그 전에는 나름 공부 좀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랬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초~중딩 공부를 도와 주다 보니...


어느 순간 [아 예전에 공부가 재밌었던 때도 있었던가?] 라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아마 고딩 때에는 잠시 그런 시절도 있었던 것 같네요. 동경대 본고사 문제 / 과학고 수학 문제 등등을 갖다놓고 며칠 동안 고민하면서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시절에는 어느 순간 몰입하기도 했었던 것 같습니다.


뭐, '문송합니다'로 30여 년을 살아 온 지금에 와서 '수학문제를 풀었을 때의 성취감'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미분 적분의 개념도 생각나지 않는데 무슨 수학을 하겠습니까. 애당초 때려쳐야죠.



이과 쪽은 애당초 때려치워야 하긴 하지만. 문과 중에서도 대학전공과 관련된 법률이론 따위는 아예 보고 싶지도 않지만.


'역사'는 나름 재밌습니다. 특히 지금 저처럼 (19금 하꼬) 웹소설가로 취미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역사는 매우매우 중요한 취미 소재이기도 합니다.


대충 45살 이후로 '전쟁 중심의 역사'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당연히 체계도 없고 어디 교재도 없고 적당히 생각날 때마다 마구잡이로 인터넷 검색해 보는 수준이지만, 그게 어느새 상당한 수준으로 쌓인 것 같네요. 큰딸이 로마역사 물어보면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스키피오 대결부터 시작해서 카이사르(시저) 이야기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이야기를 거쳐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성채 및 테오도시우스 성벽 이야기까지 풀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쟁역사 지식을 쌓아 두면, 어느새 소설 속에 녹여넣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 역사회귀물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더더욱 써먹을 데가 많습니다.


이번 작품이 좀 떠서 어느 정도 돈을 벌어 준다면 더더욱 좋겠지만 딱히 안 떠도 상관없습니다. 소설 쓰는 시간 동안에 골프/낚시/테니스/기타등등 돈 드는 일을 전혀 안 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돈 버는 거나 다름없거든요.


역사공부. 재밌습니다. 소설에 써먹는 거 빼면 딱히 돈은 안 되고, 번거로운 연표 따위는 아예 스킵하고 재미난 전쟁기록만 찾아보는 수준입니다만 아무튼 이것저것 알아보는 게 재밌긴 합니다.



제가 20대 때 봤던 '미국 영재 다큐멘터리'에서, 주인공 영재의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합니다.


[공부는 니가 인생을 재밌게 살기 위해 하는 거야. 절대 어떤 목적을 갖고 공부할 필요는 없어. 그냥 니가 관심 있는 것, 재밌는 것을 찾아보면 그게 공부야.]


이 다큐멘터리를 볼 당시의 저는 '고시생'이었습니다. 아주 명확한 목적을 갖고 공부하지만 그 공부 자체가 그리 탐탁치 않았던 사법고시 준비생이었죠.


당시의 저에게 '인생을 재밌게 살기 위한 공부'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습니다. 20대 초중반까지 '부모님의 꿈을 이뤄 드리고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공부한다!'는 요상한 사명감(?)에 공부를 했었거든요;;

(무슨 쌍팔년도 헛소리냐 하시겠지만 대략 20세기 말 무렵까지는 이 쌍팔년도 헛소리에 심취한 부모와 자식이 꽤 많았습니다.)


그 때는 낯선 개념이었지만,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제가 즐거워지는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학위 따윈 없고 체계도 없으며 그저 시간 날 때 인터넷 찾아보는 게 전부지만 그래도 저 자신이 즐겁긴 합니다. 전쟁역사 지식이 쌓이는 것 자체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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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영역이 다르긴 하지만) 명작웹툰-드라마 '미생(未生)'에 나왔던 대사가 생각나네요. 최근 유행했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출연하신 배우분께서 [영업을 위해 술을 마시다가 결국 간이 망가져 더 이상 술을 못 먹게 되는 경력직 과장]으로 나왔을 때 읊었던 대사입니다.


"술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일을 위해 마시는 술. 나 자신을 위해 마시는 술."


주인공 장그래의 팀에 합류하고 동료들을 이해하게 된 후, 경력직 과장은 동료들과 회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회식을 마치고 집에 갔을 때 따로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아내가 경력직 과장에게 질문하죠.


"오늘은 술 안 마셔? 자신을 위해 마시는 술이 필요하다면서?"


경력직 과장이 싱긋 웃으며 짧게 대답합니다.


"마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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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누군가 대신 설정해 준 목표를 위해 일처럼 하는 공부. 나 자신을 위해 하는 공부.


오늘 하루. 저는 '나 자신을 위해 하는 공부'를 하려 합니다. 미생의 경력직 과장이 '자신을 위해 마시는 술'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오늘의 저는 '나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합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르러서 비로소 저 스스로 행복해지는 공부를 합니다.


하루를 마감하면서. 저도 짧게 대답하겠습니다.


"공부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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