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지난주까지 영화 얘기를 길게 해서 이번부터는 소설 시나리오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대홍수'는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네요.
와이프가 넷플릭스 유료회원이라 주말에 '대홍수'를 같이 봤습니다. 최근에 여러모로 논쟁거리가 되는 작품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SF작가를 표방하는 만큼(! 실제로 미약하게나마 상업적 성과를 내는 작품은 SF와 무관한 영역이고 본격 SF는 다 말아먹고 있지만 아무튼 제 개인 기준으로는 SF작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어떤 영화인지 관심이 가긴 하더군요.
'대홍수'라고 써서 재난영화인 것처럼 어그로를 끌다가 갑툭튀 SF로 전환하는 영화.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소감은...
[기존의 여러 SF영화를 참고해서 만들긴 했지만 그 어느 영화에도 못 미치는 하위호환] 이라는 게 제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물론 저는 영화평론 전문가도 아니고 SF 영역에서도 인정 못 받는 하꼬 아마추어 웹소설 작가니까 제 평가는 별 의미 없겠지만, 아무튼 제 평가는 그러합니다.
서론을 길게 쓰면 안 되겠죠. 일단 목차부터 쓰면
(1) '대홍수'에 영향을 미친 작품들 : (간략한 줄거리 소개 후) 게임 둠(Doom) + 디아블로2, 영화 2012 + 매트릭스 + 엣지 오브 투모로우 + 레지던트 이블 + 아일랜드 등 상당히 많음
(2) '대홍수'의 근본이 되는 외부 설정의 미흡함 : 영화 2012의 완벽한 하위호환
(3) 0번째 설정의 오류 : 현실인지 가상세계인지 알 수 없게 모호한 설정을 준 것이 오히려 역효과
(4) 4만 얼마까지 발전하는 설정 : 매트릭스 및 유사설정 작품들의 하위호환
(5) 대한민국 SF의 고질적인 문제 :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할 필요는 없지만, 기존 작품을 짬뽕하는 데에 응용력이 부족합니다
정도로 정리하겠습니다. 길어지면 중간에 짜르고 다음 편으로 넘겨야겠네요. 일단 본론 시작하자마자 스포일러가 있다는 점은 미리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2. 본론
(1) '대홍수'에 영향을 미친 작품들 : (간략한 줄거리 소개 후) 게임 둠(Doom) + 디아블로, 영화 2012 + 매트릭스 + 엣지 오브 투모로우 + 레지던트 이블 + 아일랜드 등 상당히 많음
대홍수는 재난영화인 듯 하면서 SF영화입니다. 대략 스포일러부터 하면
- 갑자기 미친 듯 폭우가 쏟아지고 최종적으로는 30층 아파트가 물에 잠김. 남극에 거대 운석이 떨어져서 온 바다가 미쳐 날뛰고 지상생물은 모두 전멸한다고 함.
- 여주인공은 '남편 or 남친이 죽은 싱글맘'인 듯 한데, 일단 여섯 살짜리 아들과 함께 도망침
- 이 여주인공은 '지구 종말 단계에서 궤도 인공위성으로 올라가 인류 재창조 작업을 담당하게 될 슈퍼울트라캡짱우주퐈이야대천재'로서, '이모션 엔진'이라는 AI 학습 기술을 개발하였음. 영화 중반부에 갑자기 우주로 가게 됨 (보안요원의 말빨로 간단한 설명이 추가되긴 함)
- 궤도 인공위성으로 가던 중 로켓에 운석 파편 히밤쾅. 여주 사망
- 여주는 '이모션 엔진'에 자기 자신의 기억 + 6살 아들의 기억을 넣어 줌. 이모션 엔진은 4만번 넘는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여주의 모성애 + 아들의 막장회피본능(?)을 성장시킴.
- 4만 몇 번째 시뮬레이션에서 여주가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욱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고 무조건 숨어 있기만 하는 여섯 살 아들'을 찾아냄. 그리고 시뮬레이션 바다 속 깊이 잠수. (숨참고 Love-dive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깊이 잠수)
- 시뮬레이션 돌리던 이모션 엔진은 '그래 이 정도면 모성애 + 막장회피본능은 완성된 거야.'라고 판단하고 여주 및 6살 아들의 3D프린팅 복제 신체에 감정을 듬뿍 담아 지구로 내려보냄. 해피엔딩...인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 SF영화(그냥 미쿡인이 나와서 총질하는 게 주요 컨셉이라도 아무튼 뭔가 미래 공상과학 설정이 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SF로 분류한다 치고) 많이 보신 분들이라면, 저 줄거리만 봐도 대략 어떤 문화콘텐츠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씩 보죠.
1) 게임 '둠(Doom)' + 디아블로. 양자역학 이론도 추가됨
영화 대홍수는 '게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90년대 초반 불멸의 히트작이었던 둠(Doom), 한국 한정 인생폭망 악마 택진이형을 왕복 싸대기 날려 주시는 지구권역 급 악마 빌 로퍼의 히트작 디아블로(Diablo. 1,2 모두 포함)의 게임 시스템이 대홍수 중반 이후 '시뮬레이션 아파트'에 영향을 줬죠.
둠(Doom)을 만들 당시, 지구인들이 비싼 돈 주고 구매하던 개인 컴퓨터는 30년 후의 컴퓨터에 비교할 때 압도적으로 구렸습니다;; 너무 구려서 2025년의 계산기 수준도 안 될 정도였죠. 램, 저장공간 모두 형편없이 부족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컴퓨터 리소스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현실적인 게임 환경'을 구현하려면... 게임 제작자들이 천재가 되어야 합니다. `90년대 초반 IT 프로그래머들은 정말로 천재가 많았던 것 같아요.
둠을 개발하던 프로그래머들은 천재적인 기법을 적용합니다. 바로... "맵(Map)을 다 구현하지 말고 주인공 둠가이가 있는 주변부만 구현하면 그만이잖아?" 라는 기법이었습니다.
기존의 게임은 맵 전체를 미리 다 구현하느라 컴퓨터 리소스를 많이 잡아먹었는데, 둠(Doom)에서는 주인공이 있는 장소 및 그 주변부만 구현하는 방식입니다. 아직 주인공이 가지 않은 장소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영역이고, 주인공이 그 무(無)의 공간으로 이동했을 때에 비로소 그 장소가 게임 내 공간으로 구현되는 겁니다.
악마 빌 로퍼가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만든 게임 '디아블로'에서도 이 둠 스타일의 맵 구현 이론을 적용했다고 합니다. 디아블로 1,2 모두 '주인공이 방(새로운 차원)을 만들 때마다 새로운 맵이 구현되는 방식'이고, 각 맵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설정에 따라 그때그때 재구현되는 거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컴퓨터 리소스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천재 프로그래머들이 머리를 짜낸 결과'가... [의외로 우리 현실 그 잡채]라는 연구가 나왔습니다. 양자역학을 전혀 모르는 저 같은 문송합니다 문돌이들도 알고 있는 문장 - 관측하기 전에는 확정되지 않다가 관측하면 비로소 확정된다 - 입니다.
양자 단위에서는 양자의 위치가 확정되지 않다가 사람이 관측했을 때에 비로소 그 위치가 확정된다고 합니다. 관측 전에는 양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심지어 관측 방법에 따라서는 '두 개의 공간에 동시 존재'하는 것도 가능한데, 사람(혹은 그에 준하는 지성체들)이 관측을 했을 때 양자의 위치가 정해진다고 하네요. 저는 그저 문송할 뿐입니다만 초천재 이론물리학자들이 그렇게 얘기하신답니다.
이걸 잘 나타내는 비유가 [슈뢰딩거의 고양이]죠. 50% 확률로 목숨을 잃게 되는 장치에 고양이를 넣어 놓으면 나중에 관찰할 때까지 고양이가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중첩되는 꼴인데 이게 말이 되냐? 라고 비판하는 의미로 이 비유를 사용했다가 의외로 양자의 중첩성을 설명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비유라서 슈뢰딩거의 의도와 정반대로 유명해졌다는 비유입니다.
(* 저는 슈뢰딩거 고양이 비유를 '뒤주링거의 사도세자'로 응용(?)할 생각입니다만... 뒤주 속 사도세자가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중첩된 채 넋이라도 있고없고 하다가 '차원 접점'을 찾아낸다는 설정인데, 은근히 조선 후반부를 까내리는 내용이 들어가겠죠. 뭐 재밌으면 그만입니다;;)
영화 '대홍수'에서는 둠+디아블로+양자역학+슈뢰딩거의 고양이 이론을 도입해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이 있는 공간만 현실에 가깝게 구현되고 그 밖 공간은 노란색 빛의 점으로만 표현되는 방식'으로 시뮬레이션 세게를 보여 줍니다.
뭔가 양자역학의 '관측 전 미확정'을 현실세계와 연결시키는 듯한 철학적 시도를 한 것 같지만 감독의 의도까지는 아몰랑. 둠+디아블로를 즐길 때 양자역학 및 불교+힌두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철학을 읊을 필요는 없잖아요. 둠가이는 Big FXXking Gun(줄여서 BFG)을 얻으면 그만이고 디아블로 유저는 윈드포스 할배검 등등 최강 아이템만 뽑으면 그만입니다. 철학적 논의는 아웃오브안중.
대홍수 감독이 '주인공의 관측 영역만 현실에 가깝게 구현되고 그 주위는 무(無)의 영역이다!'라는 걸 강조한 건... 아쉽게도 감독 본인의 개인적인 만족감으로 끝난 것 같습니다. 이 설정이 어디서 유래한 건지 아는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 했고, 모르는 사람들은 '이게 뭥미?'라는 반응이었던 것 같네요.
2) 그 외 영향을 받은 작품들
대홍수는 당연히 재난영화의 T.O.P. '2012'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 외에 '현실인지 시뮬레이션인지 알 수 없는 재난상황을 무한히 반복한다.'는 설정으로는 [매트릭스], [엣지 오브 투모로우], [레지던트 이블]이 있겠네요. 영화 [아일랜드]는 시뮬레이션 설정이 아닙니다만 '고립 분리된 현실'로는 비슷한 구도구요.
이들 영화의 주요 컨셉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항을 바꾸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2) '대홍수'의 근본이 되는 외부 설정의 미흡함 : 영화 '2012'의 완벽한 하위호환
영화 '대홍수'는 무한반복 시뮬레이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외부 현실'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남극대륙에 히밤쾅 거대운석이 떨어져서 지구의 육지생물이 멸종한다는 상황, 그 상태에서 인간의 멸종을 피하기 위해 우주퐈이야초천재 과학자들만 인공위성 궤도에 올려 '3D프린팅 복제인간에 인간의 갬성을 주입한 뒤 다시 지상으로 내려보낸다!'는 창렬한 계획 자체는 현실입니다.
(영화 마지막에 '지구를 둘러싼 5개의 거대 인공위성'을 보여 주고, 영화 중반에도 여주인공이 탄 우주선에 운석 파편이 떨어져 여주가 사망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이게 단순히 시뮬레이션 내부의 갇힌 시공간 설정이 아니라 현실과 연결된다는 점을 계속 강조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지구종말 급으로 온 바다가 뒤집어지고 육지가 바닷물에 뒤덮이는 설정'은 이미 영화 2012에서 제시했었고, 2012에서는 [가장 저렴하고 효율적인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2012의 대안은 우주선(Spaceship)이 아니라 그냥 배(Ship)였죠.
모든 육지가 바닷물에 뒤덮일 때. 육상생활 원툴로 진화한 인간 급 지성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두 가지입니다.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 바닷물 속에 숨거나.
하늘로 날아오르면 좋긴 좋습니다. 지상이 물에 잠기든 말든 아몰랑 시전하고 하늘~우주에서 잘 살면 좋겠죠. 겁나 돈이 많이 들 뿐입니다.
위성궤도 수준까지 물건을 올리는 데에 엄청난 에너지가 들고, 그 에너지는 다 '돈'입니다. 위성궤도에 도착하려면 초속 9.8km인가 뭐 그정도로 가속해야 하는데 이렇게 가속하려면 메테인(메탄) / 하이드로진(수소) 계열 합성물을 겁나 많이 태워야 합니다. 돈 엄청 꼬라박아야 합니다.
전에 어디서 본 걸로는, 물 500ml 하나를 위성궤도까지 올려 주려면 2억원인가 20억원인가 든다고 하네요. 우주정거장에 우주인 몇 명이 3~4개월 사는 것만으로도 돈 몇천억 쓰는 겁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비효율 그 잡채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우주정거장으로 사람을 보내고 (지구가 조용해질 때까지) 몇 년 동안 살게 하려면... 우주정거장에 '자체 식량 생산 및 자원순환 시스템'을 갖춰 줘야 합니다. 우주정거장 자체가 어지간한 항공모함 수준으로 커져야 하고, 거기에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흙 or 수경재배 시설을 갖춰야 하며, (마션의 마크 와트니가 그랬듯이) 우주인들의 응가를 식물의 비료로 재활용할 수 있는 순환 시스템도 만들어야 합니다. 당연히 우주정거장이 무시무시하게 커지겠죠.
(* 영화 대홍수에서는 우주정거장에서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시뮬레이션만 돌리고 있습니다만, 그건 주인공이 운석파편에 맞고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원래 계획은 '우주에서 7명의 과학자가 먹고 자고 싸면서 살아가는 설정'이었습니다. 지금 지구인들이 쓰고 있는 우주정거장보다 수십배 더 큰 걸 만들어야 하고, 심지어 영화 마지막에는 그런 우주정거장이 최소 5개 이상 있는 걸로 묘사하죠.)
우주정거장을 이렇게 크게 만들 돈이면... 그냥 잠수함 겸용 거대 선박 만드는 게 훨씬 싸게 먹히고, 결과적으로 수백~수천배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원자력 추진 대형선'을 만들 수 있는 기술 수준이라면 잠수함 겸용 거대 선박 쪽이 훨씬 더 현실적이에요. 그게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 더 안정적으로 오래 버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영화 2012 제작진은 이 사실을 잘 알았고 또 영화에도 반영했습니다. 중국 높은 산악지방에서 뭔가 거대한 구조물을 발견한 주인공이 말해 주죠. "이건 우주선이 아니야. 그냥 '방주'야. (This is not a Spaceship. just the... 'Arc'.)"
2012 감독이 우주를 싫어해서 잠수함 겸용 거대 선박을 만들었을까요? 우주탈출 SF는 죽어도 만들 수 없으니 그냥 바다 속으로 숨참고 Love-dive 하겠다고 작정한 걸까요?
아닙니다. 'SF에서도 최소한의 현실성을 부여하고 그 현실성으로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잠수함 겸용 거대 선박으로 설정한 겁니다.
한국영화 '대홍수'가 현실 접점을 완전히 끊어내고 오로지 가상 시뮬레이션 세상으로만 구현했다면 모를까, 현실 접점을 유지하려 했다면 최소한 [궤도위성까지 사람을 올리는 데에 필요한 비용 문제] 및 [그 돈으로 잠수함 겸용 거대 선박을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다] 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됐습니다. 이미 16년 전 개봉한 재난영화에서 다루었던 문제를 외면하고 '우리 영화에서는 무조건 우주 갈끄야! 가다가 운석파편 맞아 죽더라도 우주 갈끄야!'를 시전해서는 안 됐습니다.
감독이 SF병 걸려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위성궤도까지 우주선 쏘고 싶었다면 최소한 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영화 내부적인 해법이라도 제시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몰랑. 난 쿨찐 SF병 걸린 문과갬성 충만 예술가니까 무조건 우주 갈래.
많이 안타깝네요. 16년 전에 개봉한 영화 '2012'의 하위호환이 되려고 작정한 이유가 뭔지 상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아무튼 안타깝습니다.
쓰다 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적절히 자르고 (하) 편으로 넘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