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레드오션 시장에서의 패러독스 경영
(다시 2010년 블랙기업 대리 시절에 작성한 초안으로 돌아갑니다. 본 글에서 ‘최근’ 등등 현재 시점을 표현하는 용어는 모두 2010년 기준입니다. 중간중간 2023년 기준의 평가는 *로 표시하겠습니다.)
1) 패러독스 경영
최근에 “패러독스 경영”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보통 서로 상충되는 요소로 인식되는 경영 기법을 잘 조화시켜 동시에 적용, 시행하는 경영기법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역시 대한민국 내에서는 “삼성”이다.
패러독스 경영으로 주목받는 삼성의 주요 경영기법은, 다음과 같이 모순되는 요소를 동시에 시행하는 것이다.
① 거대조직 + 빠른 의사결정,
② 사업다각화(안좋게 얘기하면 문어발식 기업확장) + 각 분야에서 최고수준의 전문성 확보,
③ 일본식 연공서열 경영 + 미국식 실적주의 경영의 조화
등이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얘기하던 삼성의 “1등 경영”방식인 것 같다.
뭐, 좋은 얘기다. 예전 동부건설 신입사원 때 들었던 강의처럼, 성공한 사례를 가져다 놓고 이것저것 분석하면 다 좋은 얘기 나온다.
그런데, 삼성의 패러독스 경영은 사실 레드오션에서 빡빡 기어야 하는 회사들과는 조금 동떨어진 내용이다.
한 국가 내에서 최고 수준의 자본력을 갖춘 기업이, 자본력과 시장점유율을 바탕으로 한 “강자”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하고 있어 놀랍다는 내용이지 않은가? 그것도, 이미 성공한 다음에 뒷다리 긁기 식으로 사후평가하는 수준이고.
이런 얘기는 무한경쟁 사회의 중간과 바닥권에서 적자를 겨우 면하며 발버둥치고 있는 회사들에게는 별 도움이 안된다. 뭐, 삼성과 같은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싶다면 약간은 도움이 되겠지만.
(* 2023년 기준으로 보면 ‘패러독스 경영’이라는 말 자체가 거의 사라져 버렸죠… 진짜 한 때의 유행이었나 봅니다. 그래도 2010년의 중고신입 무늬만 대리 직장인이 그걸 기준으로 자기계발 정신승리 글 쓰긴 했으니, 최소한 1명에게는 성공한 이론… 인 걸까요?)
우리 레드오션 종사자들, 피터지게 원가절감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삼성식 패러독스 경영과 다른 내용의 패러독스가 필요하다. 최고 수준의 기업이 자만하지 않고 끝없이 자기혁신을 거듭한다는 식의 패러독스는 우리에게 ‘그림의 떡’일 뿐이다. 레드오션의 패러독스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
레드오션 시장 기업들의 패러독스. 기술력 쥐뿔 없고 아이디어 없고 아이디어 나와 봐야 시뻘건 핏물의 경쟁에 금방 사라져 버리고 당장 올해 살아남을지 걱정해야 하는 한계기업들의 패러독스.
뭐, 하나뿐이다. 앞의 장에서 얘기한 대로, ‘가격경쟁력’ 뿐이다. [같지만 싸다. 그러므로 승리한다.]는 명제 뿐이다.
즉, “저가이면서 중등품질을 담보한다”는 패러독스, 그것이 레드오션에서 유일하게 성공할 수 있는 패러독스 경영 기법이다.
“저가”라는 것은 생산원가도 싸다는 의미다. 생산원가를 구성하는 재료비, 인건비, 부채비용(이자) 모두 적게 들이면서, 물건의 품질을 유지한다는 거다. 극한의 원가절감으로 쥐어짜면서 중등품질 혹은 중등품질로 보일 만한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 그게 핵심이다.
이후 상세히 얘기하겠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재료비나 부채비용은 어느 기업이나 비슷하니 결국 통상적으로는 인건비를 줄일 수 밖에 없다. 사람이 미래이긴 한데 ‘싼 사람이 미래’인 셈이다.
(* 이 또한 2023년 기준에서 보면 ‘사람이 미래다’에서 ‘사람은 미래지만 너한테는 해고가 미래야.’로 바뀌긴 했습니다… D그룹에서 사람이미래다 광고 하면서 동시에 신입사원까지 구조조정으로 내모는 짓거리를 했다는 게 알려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미지 엄청 깎아먹었죠. 뭐 2010년 글에서는 이걸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저가 인력만 들여오는 것은 물건의 품질을 떨어뜨린다. 예전 대량생산 시대의 부품조립처럼 단순작업만 반복해서 물건을 만드는 상황이 아니라면, 업무숙련도와 열의가 떨어지는 직원은 오히려 조직에 해가 된다.
정리하면, 삼성전자의 패러독스 경영이 신속함-거대규모 또는 고효율-사업다각화 라면, 레드오션의 패러독스에서는 저임금-고효율의 직원이 핵심이다. 이 핵심 매개고리를 찾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세부적으로 생각해 보자.
2) 패러독스 경영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고리
모든 것이 그렇듯이, 패러독스 경영도 말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회사는 극한의 원가절감을 위해 오늘부터 모든 직원들에게 최저임금만 줄 예정입니다. 다들 최저임금만 받고 뺑이치세요. 그걸로 올해 말에 수익 1000억 달성하겠습니다.”라고 회사 앞에 써붙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모순되는 상황을 결합하는 것도 한계점이 있는 것이고, 그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별도의 매개고리가 있어야 한다. 레드오션 시장의 패러독스 한계점과 매개고리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유명 교수가 분석해 놓은 삼성식 패러독스 경영부터 좀 살펴보자.
앞에서 말한 대로, 삼성의 패러독스 경영 1번은 거대조직-빠른 의사결정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고리는 무엇일까?
오너가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업체제, 가끔 부당하거나 조급할 수 있는 결정도 신속하게 이행할 수 있는 직원. 뭐 그 정도가 되겠지.
이들을 엮어 주는 매개고리를, 우선 “기업문화”라고 부르자.
조직이 큰데도 신속하게 움직인다는 것. 이건 ‘군대’에서 강조하는 요소다. 즉, 크고 신속한 조직이야말로 군대 이상형이다.
결국 삼성식 패러독스 경영의 1번 요소는 “상급자의 지시대로 곧바로 움직일 수 있는 형태의 조직을 갖췄다”는 것이다. 삼성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상당수 오너 대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인 “빠른 의사결정”은, 대한민국의 군대문화와 많이 닮아 있다.
군대문화. 뭐 대부분 들으면 이갈리고 인상 찌푸리는 얘기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군대문화는 대한민국 전반을 지배하는 큰 문화축 중 하나이다. 그게 현실이다.
대한민국은 남성 직장인의 상당수가 2년 이상의 군대경험을 갖고 있는 특이한 나라이고, 거기에 더해 유교적 질서관이 아직 강하게 지배하고 있어서, 대한민국 어디서나 “나이와 직급”으로 찍어누르면 일단 일이 진행된다. 이 문화현상이 창의력에는 마이너스일지 모르나, 거대조직 내에서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하게 하는 데에는 큰 도움을 준다.
그런데, 군대식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삼성이 창의력 떨어지는 집단은 아니다. 국민 대다수가 자랑스러워 하듯이, 삼성은 16메가D램의 상용화를 처음으로 이루어 내고 그 기반으로 떼돈을 번 기업이다. 그리고, 문어발식 확장에도 불구하고 각 분야에서 상당한 전문성을 보이고 있다.
삼성의 이러한 기업문화는 어디에서 온 걸까? 이것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다. 한 국가 내에서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주면서 인재를 끌어모으고, 그 인재들 간에 무한경쟁을 시키면서 전문성과 창의성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도록 만드는 내부 구조를 통해, 삼성 내부의 독특한 기업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내부적 기업문화라고 해도 완전히 외부 세계의 영향과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 얘기한 전문성-창의성 중심의 내부 기업문화도,
- 삼성이 “대한민국 내에서의 고임금”과 “1등 기업 프리미엄”을 가지고 있고,
- 대한민국 내에서 아직도 이직을 쉽게 할 수 없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으며,
- 개인의 자유생활보다는 가족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겠다는 사고방식
이 있기 때문에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삼성 직원과 동일한 수준의 연봉을 주면서 주말에도 자진해서 출근하게 만드는 무한경쟁 체제를 도입한다면… 아마 그 회사 직원들은 다 이직해 버릴 것이다.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면서 계속 창의력을 발휘하고 그러면서 위에서 시키는 일 빠릿빠릿하게 해내라는 모순된 체계에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결국 패러독스 경영이라는 것도 사회문화적인 외부환경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진 기업문화의 토양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회사 내부에서 만들 수 있는 기업문화란 것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회사 내부에서 만들 수 있는 기업문화란 것이 존재한다. 삼성과 유사한 조건을 갖춘 대한민국 기업들이 다 삼성처럼 된 것이 아니고, 삼성이 독특한 경영방식으로 성공적인 기업문화를 만들었듯이, 어느 정도는 회사 내부의 역량으로 차별적인 기업문화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레드오션에서 발버둥치는 우리들에게 적합한 기업문화는 어떤 것일까? 삼성이 “1등 기업”이라는 기업문화를 만들었다면,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기업문화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즉, “저렴하지만 중등품질 이상”이라는 레드오션의 패러독스, 그 매개고리로 필요한 “저임금-고효율의 직원 확보”에 적합한 기업문화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문화를 만들기 위해 우리들이 노력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일까?
계속 강조하지만, 저렴하게 물건을 잘 만드는 회사가 되려면 돈을 적게 받으면서도 성실하게 일하는 직원들이 많아야 한다. 이를 위한 기업문화는
①일을 즐기는, 그리고 즐겁게 일할 환경을 조성해 주는 기업문화
②오늘 당장의 보상보다는 미래의 발전을 공유하겠다는 생각에 기반한 기업문화
③업무 외의 요소(술먹기, 아부 등)와 무관하게 평가받는 기업문화
가 핵심일 것이다.
물론, 말은 쉽다. 앞에서 말한 대로 “올해 수익 1000억 냅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오너 입장에서, 중간관리자 입장에서, 실무자 입장에서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실천은 무엇보다도 “내가 먼저”라는 솔선수범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 자체를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다.
일단 “열심히 사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상당수 사람들은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진 채 살아가며,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솔선수범하지 않고 대충 살게 된다. 남들의 솔선수범에 잘 따르지도 않는다.
열심히 살아야 될 이유를 가진 사람들만 뽑아서 조직을 만들면 되겠지만, 그게 가능한가? 그리고 그런 사람 찾았다고 해도, 꼭 레드오션의 블랙기업에 와서 일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맨땅에서 그런 열정맨들을 찾아낼 또다른 열정맨 인사담당자가 있다고 해도, 그냥 그 노력으로 열심히 공부하면 시험 붙어서 고위직 공무원으로 편한 인생 살 것이다. 그런 게 대한민국이다.
솔선수범하는 사람. 회사 일에 목숨걸고 거기서 성공하려고 열정을 다하는 사람. 이건 결국 기업문화와 상호작용하는 것이고, 그냥 회사 밖에서 “짠!”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다.
실천이 말보다 앞선다. 그렇긴 하지만, 우선 말을 잘 정리해 두면 실천하기가 조금은 쉬워지는 법이다. 뭐, 그걸 정리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이니…
오너, 관리자, 실무자를 구별하지 말고, “우리”라는 큰 틀로 <레드오션 종사자로서 실천 가능한 계명>을 만들어 보자. 일단 실무자 입장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겠지만, 오너나 중간관리자의 태도를 다루는 글도 있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각자 상황에 맞게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 작가 주석 : 2010년에는 여기서 ‘10계명’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2010년 당시에는 김난도 교수님의 ‘12간지 영문 단어에 끼워맞추는 소비트렌드 분석’처럼 뭔가 숫자를 맞추거나 / 머릿글자를 맞추는 게 유행이었거든요.
뭐, 2023년에 다시 편집하면서 보니 굳이 이걸 10계명으로 짜맞출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크게 4~5개 정도만 정리하고, 이 계명 부분 쓴 이후 제 개인적인 사례를 서술하는 것으로 진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