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같지만 싸다. 그러므로 승리한다
(앞에서 그랬듯이 2023년에 추가된 내용은 존칭으로 쓰겠습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함수를 발명한 (그래서 20세기~21세기 수많은 중고딩들을 괴롭힌) 수학자. 동시에, 위대한 철학자. ‘데카르트’가 절대명제(!)라고 만든 말입니다.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지난 편에 레드오션 이익률 얘기 하다가 [싸다. 그러므로 생존한다.], [같지만 싸다. 그러므로 승리한다.]고 언급했습니다. 경쟁 박터지는 레드오션에서 살아남으려면 일단 남들보다 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중등품질 이상 확보하거나 / 최소한 중등품질 이상인 걸로 위장해야 합니다.
2010년에 제가 입사했던 B건설사. 이 회사는 레드오션에서 당당히 살아남았습니다. 온갖 곳에 악명을 떨쳤고 온 사방에서 ‘빨리 망해서 없어져야 할 회사’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까지 잘 살아 있습니다.
게다가, 더 성장했습니다. 2010년에 건설사 도급순위 46위인가 43위인가 그랬는데 지금은 20위권이고 이익률도 꽤 좋습니다.
이 B건설사는 ‘싸다. 그러므로 생존한다.’라는 명제를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같지만 싸다. 그러므로 승리한다.’까지 증명했습니다.
그 대단한 생존력. 비법(秘法)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 끝없는 쥐어짜기 정신. 그것만큼은 대단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죠.
(1) 싸다. 그러므로 생존한다.
B건설사가 ‘싼 값’, 즉 ‘저렴한 공사비’에 공사를 할 수 있었던 이유. 앞에서 말했듯이 ‘쥐어짜기’입니다. 업체 쥐어짜고 직원 쥐어짜면서 다른 건설사보다 조금씩 조금씩 원가를 줄이고 그 줄어든 원가 기준으로 저가수주를 하여 공사 따내는 방식이었습니다.
2010년 경, 건설업계에 떠도는 ‘카더라 공식’ 중 이런 게 있었습니다. [LH 공사 하면 골병들어 망한다]는 공식이었습니다.
LH. 원래 토지공사와 주택공사가 따로 있었지만 2000년대에 합병하면서 ‘토지주택공사’라는 거대 공룡 공기업이 되었고, 전국에 아파트 공급을 많이 했습니다. 예전에는 ‘휴먼시아’라는 브랜드로 직접 분양하기도 했었죠. 지금은 택지개발만 하고 해당 택지를 민간건설사에 팔아버리는 방식을 주로 쓰지만 예전에는 직접 분양 했었습니다.
그렇게 LH가 직접분양을 할 때. 최종 브랜드와 분양은 LH가 책임지지만, ‘시공’은 입찰을 붙여 일반 건설사에 맡겼습니다. 어차피 아파트 시공이라는 게 거의 획일화되어 있고, 공사관리를 위대하신 공기업 직원들이 직접 할 이유가 없으니 입찰로 민간건설사에 맡기는 게 편하고 좋죠.
과거 ‘관급공사’라고 하면 대부분 도로/철도/항만/교량/터널/댐 등 사회간접자본시설 공사였고 기술력이 뛰어난 상급 건설사들이 관급공사를 했었습니다만, LH의 아파트 시공 입찰이 나오면서 약간 바뀌었습니다.
일단 LH도 공기업으로서 정부 조달청 입찰에 준하는 관리를 하긴 하는데, 공사의 성격이 ‘네모반듯 획일화된 아파트’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별 의미 없게 되었습니다. 전국에 아파트 건설공사 현장소장 할 수 있는 경력자가 5만명 넘는다는 나라가 이 대한민국입니다. 아파트공화국에서 아파트 기술력은 거기서 거기죠.
이런 상황이다 보니, LH가 발주하는 아파트 공사는 ‘무조건 최저가’로 낙찰되는 분위기였습니다. 통상 표준품셈으로 계산한 예정가격(예가)의 82% 정도를 적정낙찰가로 보는데, LH 발주 아파트 공사는 70% 초반대였습니다. 가끔 경쟁 심하면 68% 나오는 경우도 있구요.
그래서, 저 ‘카더라 공식’이 나왔습니다. [LH 공사 하다보면 골병들어 망한다]는 공식.
조금 더 풀어 쓰면, ‘LH 공사 안하면 바로 망하고, 그나마 그거라도 하다 보면 몇 년은 더 버티지만 결국 골병들어 망한다’가 됩니다. 실제로 많은 중견건설사들이 LH공사 하다가 망했습니다. 뭐 LH가 직접 원인인 건 아니지만, 거의 마진 없고 삐끗하면 적자 나는 공사에 발 담궜다가 서서히 말라죽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다녔던 B건설은 이 LH공사를 수주해도 흑자 냈습니다. 남들이 하면 골병들어 망한다는 공사를 남들보다 더 싸게 최저가로 따냈는데도 거기서 돈 조금씩 남겼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건설업의 카더라 상식을 뒤엎어 버리는 독종 마인드. 마른 걸레 쥐어짜고 한 번 더 쥐어짜는 마인드. 대단하죠. 유명 영화 홍보문구를 변형하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수준입니다.
비슷한 규모 건설사들 중 업계 최저 연봉. 대리는 타 회사 사원급, 부장은 타 회사 과장급, 이사와 상무 정도 되어도 타 회사 차장 연봉보다 약간 낮은 수준.
협력사 관리도 비슷했습니다. 무조건 최저가. 각 전문공종 하도급 발주 내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최저가.
그래도 굴러갔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로 건설업 전체가 휘청거렸고, ‘노느니 연봉/수익 낮추고 B건설사 일 하겠다’는 사람들이 계속 지원했었거든요. 빈 자리가 생겨도 금방 사람 구할 수 있었거든요.
물론, 이 상태로 계속 가면 부작용 생깁니다. 부작용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죠.
최저가 공사의 부작용. ‘하자’였습니다.
(2) 싼 게 비지떡
최저가로 LH공사 수주해서 마른걸레 쥐어짜기 전략으로 눈꼽만큼 돈 남겼지만, 당연히 ‘싼 게 비지떡’입니다. 공사관리 제대로 될 리 없죠. 하자투성이였습니다.
B건설 이전에도 LH아파트는 하자 많은 걸로 유명했었습니다. ‘휴먼시아’ 이전에도 뭐 다른 브랜드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LH아파트는 중산층 아닌 ‘서민 아파트’였고 사소한 하자는 그냥 참고 살아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거기에 B건설이 들어가자… 하자가 폭증했습니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말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어마무시하게 하자 민원이 늘어났습니다.
LH 하자 민원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수준에 이르렀고, 대략 2012년 정도 국정감사에 ‘LH아파트 하자 문제’가 등장했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들이 LH사장 불러 놓고 ‘왜 이렇게 하자가 많아?’라고 갈궈댔었습니다.
이 국정감사 당시 자료를 보면… 대략 한 해에 10만 건 정도 하자접수가 되었던 것 같은 같은데요. 놀랍게도 그 하자의 70%가량이 1개 업체에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B건설이었죠.
2등부터 꼴등까지 하자를 모두 다 합쳐도 1등 업체의 하자 숫자 절반이 안 될 정도의 압도적인 하자력(!)을 선보인 기업. ‘안 좋은 걸로 1등 하려면 압도적으로 1등 해야 한다!’라는 걸 몸소 실천한 기업.
제가 다닌 B건설이 그런 회사였습니다.
(3) 여기서 반전(反轉) : 같지만 싸다. 그래서 승리했다
쥐어짜기 원가절감으로 간신히 쥐꼬리만큼 돈 남기지만 그 부작용으로 압도적인 하자력(!)이라는 어마무시한 다크포스를 소유하게 된 B기업. 그 드높은 하자 명성(!)은 LH 공사 아닌 곳에서도 유지되었습니다. B기업 자체 브랜드로 짓는 아파트도 하자투성이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반전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자투성이인 B기업 아파트가 완판(完販)된다는 사실. 오피스텔도 완판시켜 버린다는 사실. 일부 미분양 현장 발생해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팔아치워서 준공 시점에는 결국 완판 만들어 낸다는 사실.
2010~2012년 당시의 저는 이 현상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싸게 팔기는 하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 그대로 하자투성이인 건물인데, 이게 다 팔린다는 사실을 놓고 그 이유를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유를 알게 된 건, 이후 제가 집주인이 되고 나서였습니다. 집주인이 되어 관점을 바꾸고 경기도 지역 집값 상승 원인을 고민하면서 ‘입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B건설사의 하자투성이 아파트가 완판되는 이유가 보였습니다.
이유는 바로… ‘전세’입니다.
집주인이 해당 아파트에 직접 살지 않는다는 것, 그게 원동력이었습니다. 하자투성이여서 들어간 첫날부터 불편해 하고 답답해 하는 아파트지만 집주인 말고 ‘세입자’가 들어가 살기 때문에 팔리는 것이었습니다.
집주인은 본인이 안 사니 신경 안쓰고, 세입자는 2년 살다가 옮겨야 하니 진짜 죽을 만큼 심각한 하자 아니면 대충 참습니다. 그러면서 이 아파트 자체는 동급 아파트보다 싸고, 의외로 근처 도로 등 교통여건이 좋습니다. 경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서울 접근성’을 상당한 수준으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즉, ‘집 사서 전세 주려는 사람’은 하자 많아도 일단 교통 좋은 곳에 싸게 나온 아파트를 선호합니다. 그 아파트에 전세 들어오려는 사람 또한 하자 많아도 일단 교통 좋은 곳에 전세보증금 조금 덜 내도 된다면 선선히 들어와 삽니다.
레드오션 시장에서 성공하는 궁극의 필살기. 피보다 더 붉은 시뻘건 바다에서 칠흑같은 어둠보다 더 어두운 블랙기업이 더 크게 성장하는 드래곤슬레이브 급 필살기. [같지만 싸다.]가 완성되었습니다.
B건설사의 하자투성이 싼게비지떡 아파트는, 대한민국 전세제도와 맞물리면서 ‘교통 좋은 곳에 싸게 나온 아파트’가 되었습니다. [같지만 싸다], 즉, 중등품질 이상으로 고객들이 원하는 수준을 제공하면서 가격이 싼 상품, 그 어려운 조건을 달성해 버렸습니다. 하자 따윈 아몰랑.
물론, B건설사가 처음부터 이걸 의도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전세제도가 틈새시장으로 작용해 하자 많은 아파트도 다 완판하게 해 줄 거다 하자 많아도 상관없으니 무조건 싸게 지어!”라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 정도로 치밀하게(?) 일하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때로는 너무 순진해 보일 만큼 정직하기도 했습니다.
B건설사의 임직원들. 비슷한 규모의 다른 중견건설사보다 훨씬 적은 급여를 받으면서도 일단 갈 데가 없어 B건설 다니는 임직원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정직하고 순진했습니다. 그들을 이끄는 오너와 경영진들도 정직하고 순진했습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임직원 급여 동결하고 쥐어짰을 뿐, 다른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당장 망하지 않기 위해. 눈 앞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그렇게 하루하루 최저가로 버텼던 게 ‘뜻밖의 틈새시장’으로 이어진 것 뿐이었습니다.
운이 좋다고 볼 수도 있겠죠. 처음부터 다 노리고 한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대한민국 전세시장과 잘 맞았고, 또 2013년부터 서서히 살아나던 아파트 시장과도 맞았으며, ‘서울접근성이 최고’라는 경기도 아파트 추세와도 맞았습니다.
그러나, 기본 실력이 없으면 운도 따라오지 않습니다. B건설은 분명 기본실력이 있었습니다. ‘압도적인 하자력(!)’이라는 크나큰 부작용이 있었지만, 그 부작용을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 탄탄한 기본실력이 있었습니다.
원가절감. 모든 기업이 습관처럼 외치는 네 마디. 직장인들이라면 치를 떠는 네 음절 단어. 패왕간디의 Be폭력 武저항 핵폭탄러쉬보다 더 무서운 말. 원!가!절!감!
이 ‘원가절감 기본실력’은 엄청 무서운 겁니다. 순간 반짝 아이디어로 블루오션 개척한다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무섭습니다. 과장 좀 보태면 오조오억배 정도 무섭습니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급 블루오션 개척자들처럼 차원이 다른 존재들 빼고 그냥 흔하디 흔한 일반인들 간 경쟁에서, 반짝아이디어 10만개보다 더 무서운 건 ‘원가절감 기본실력’입니다. 그 기본기가 갖춰지면 어느 순간 운(運)이 따라옵니다.
B건설은 2010년대 후반에 또 한 번의 좋은 운을 잡습니다.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겠습니다. 일단 오늘은 제가 B건설에 있을 때의 사례로만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