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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레드오션 투쟁기 (6)

5. 레드오션에서 살아남기

by 테서스


2010년, 35살의 중고신입으로 주70시간 근무 기준 최저임금 간신히 넘는 ‘무늬만 대리’로 입사한 회사. 일단 그 회사를 [B건설]이라 부르기로 하자. 물론 실제 이름과 무관하게 블랙기업의 B를 따서 지은 가상의 이름이다.


B건설의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레드오션에서 살아남은 사례들을 한 번 찾아보자.


1) 레드오션에서 살아남은 사례들


최근 (2010년 글 작성 당시 기준으로) 레드오션 사업으로 한참 광고를 타고 있는 품목은 커피믹스다. 이 지나치게 오래된 저가상품 시장에 웰빙 바람이 약간 불어서인지, 김태희와 강동원을 앞세워 합성프림 아니라는 걸 열심히 광고하고 있다. 이에 관한 기사가 잠깐 났었는데, 그 기사의 설명이 “성장하는 레드오션”이라는 것이었다.


(* 뭐 이 때 카제인나트륨 비난하면서 잠시 반짝하는 듯 했던 남양유업은 결국 다른 이슈로 훅 가 버리긴 했지만… 이건 2023년까지 오는 동안 다른 사정이 추가된 것이고, 2010년 당시에는 나름 ‘성장하는 레드오션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은 사례’로 소개되었습니다.)


된장녀 논란을 불러일으킨 스타벅스 이후, 커피 수요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비싼 커피가 늘면서 저가 상품시장도 같이 커졌고, 21세기 한국 소비구조 변화를 주도하는 카테고리 중의 하나인 “웰빙”이 결합하면서 껌값 수준의 커피믹스 상품시장에 새로운 경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2010년 글 작성 당시 기준으로) 최근 뜨고 있는 “유니클로”라는 옷 상표가 있다. 난 원래 의류업계 쪽에 관심이 없어서 이게 뭐 예전부터 유명한 건지 아닌지도 몰랐다.


그런데 전에 지하철에서 누가 읽는 책 뒷면을 보니까, 이 ‘유니클로’라는 회사가 일본에서 의류산업으로 성공한 회사라고 하더라. 일본 내에서 사양산업으로 분류된 의류업계에서 후발주자로 일어나, 결국 업계 최강회사가 되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책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세상에 사양산업이란 없다. 사양되는 기업이 있을 뿐.”


그대로 인용하지 말고 살짝 해석을 덧붙이자.

레드오션도 다 사람들 먹고 사는 업종이다. 제 아무리 레드오션이라도 자기만 잘하면 다 살아남아 돈번다. 오너도, 거기서 일하는 당신도.



2) B건설의 사례


잠시 다른 산업을 살펴봤다. 그리고, 이제 B건설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대한민국의 건설업은 철저한 레드오션이다. 몇만개의 전문건설업체와 또 몇만개의 종합건설업체가 있고, 그 중 몇천개가 매년 새로 망하고 새로 일어선다. 전국 어디에나 아파트를 지어 본 유경험자가 깔려 있고, 그 중 상당수가 나이 문제나 이전 기업이 망한 문제 때문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파트 시공만 놓고 보면) 이 사람들의 노하우만으로도 20~30층짜리 건물을 가볍게 지을 수가 있어서, 최신 기술 같은 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건설업은 새로운 현장소장과 현장 직원을 저렴한 가격에 구하기가 아주 쉬운 구조이고, 시장 전체는 완전경쟁에 가깝다. 미시 경제학자들이 좋아할 만한 이상적인 경쟁 구조를 가진 것이다.

B건설은 이런 레드오션에서 후발주자로 건설업을 시작했다. 오너 분은 건설 관련 전공을 하지도 않았고 건설업에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그냥 물류사업 하다가 좀 성공해서 자본이 쌓이니 다른 일을 찾다가 건설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기술력이 별로 필요없는 경쟁시장에서, 뒤늦게 시작한 후발주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중에 계속 강조하겠지만, 결국 ‘가격경쟁력’이 답이었다. 즉, [싸게 파는 것]이 최선이었다.

(수주산업 관점에서 보면, 싼 가격에 일감 받아 오는 것뿐만 아니라 '부실한 발주처의 일감을 받아오는 것'도 '싸게 판다'에 포함될 것이다.)


초창기를 지난 후, B건설은 저가 공사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그리고, '발주처 자금력이 의심되는 공사'도 피하지 않았다.


건설업계에서는, 발주처의 자금력이 약한 공사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긴데, 돈 없는 발주처 공사 해주다가는 공사대금 미회수 가능성이 높다. 또한, 공사기간 중에도 계속 공사대금을 낮추려고 하기 때문에 의미없는 분쟁도 많이 생긴다.


즉, 대학/교회/병원처럼 기본적으로 자금력이 약한 발주처의 공사는 하지 않는게 상책이라는 게 건설업계의 상식처럼 통용된다. 돈을 남기기도 어렵거니와, 장부상 약간 이득이 난다고 해도 발주처가 잔여 공사비를 지급하지 않아 악성채권으로 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신입사원 생활을 했던 동부건설에서는 무슨 산업대학교 공사 해 줬다가 거의 돈 떼였다. 나중에 대학 측에서 그 건물 기부하라는 식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했다. ‘교육용 재산은 압류금지’라는 법 제도의 허점도 있었고,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학교 가진 교육재단들은 나름 힘 좀 썼다. 2020년대에는 벚꽃 피는 순서대로 문 닫고 있지만…)


대학/교회/병원공사. 어찌어찌 잘 하면 약간의 수익은 낼 수 있지만 ‘멀쩡하게 실적 쌓고 관급공사 할 수 있는 1군 건설사’들은 피하는 공사.


하지만, B건설은 이런 공사를 피하지 않았다. 남들이 안 먹는 최하급 질긴 고기를 먹으며 서서히 덩치를 키웠다.


교회 하나를 잘 지어 5%가량의 수익을 남긴 후, B건설은 교회와 병원 공사를 중심으로 매출액을 늘려 나가기 시작했다. 공사비 떼이기 십상이라는 대학공사도 뛰어들었다. 그렇게 공사실적이 쌓여 가자, 관급 건축공사도 하기 시작했다.


매출액 규모는 급성장했다. 성장전략을 밟기 시작한 2004년 이후, 7년간 매출액이 6배로 뛰었다고 한다. 당연히 건설 도급순위도 급성장했다. 100위권 내에서 찾아볼 수도 없었던 회사가 어느 새 43위가 되었고, 40위-35위-32위까지 올라왔다. 40위가 되었을 때는 매출 1조도 달성했다.



물론, 이 과정에 부작용도 많았다.

우선, 업계 전체에 악명을 떨쳤다. 저가수주 후 하도급업체 단가를 후려쳐서 그 하도급업체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간다는 이미지를 대한민국 건설업 전반에 심어 주었다. 공정위와 보증기관으로부터 끝없이 견제를 당했고, 담당직원들은 격한 스트레스를 일상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이 악명은 현장 노동자들과 일반 입주민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돈이 부족했다. 수익성이 낮은 공사를 많이 하니 조금만 잘못되면 바로 적자였고, 처음부터 적자 날 것을 알면서 나중에 어떻게든 메꿔 보겠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공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직원들의 처우개선과 연봉인상 같은 것은 늘 뒷전이었다. 항상 불만이 있었는데, 외부와 내부 모두에 그 불만이 높게 쌓여 갔었다.


창업 이후 IMF도 있었고, 금융위기도 있었다. 그 위기 때마다 수많은 건설사들이 쓰러져 갔고, B건설도 위기를 겪었다. 사실 회사 전체가 상시적으로 위기였기 때문에 특별히 무슨 위기를 느낄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B건설은 망하지 않았다. 모두가 ‘곧 망할 회사’, ‘반드시 망해야 할 회사’, ‘직원과 하청업체 피 빨아서 연명하는 회사’라고 욕했지만, B건설은 계속 살아남았다. 욕하는 이들을 비웃듯 계속 살아남았고, 점점 더 도급순위를 높여 갔다.


2010년도에 내가 입사할 당시, B건설의 주력사업은 건축사업, 그 중에서도 민간건축사업이었다. 말 그대로 기술력이 거의 필요없는 영역이었다. 건설회사들이 떼돈 번다고 할 시절에 주력했던 아파트 개발사업은 거의 하지 않았고, 아파트를 지어도 주공아파트 같은 걸 단순도급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몇 개 진행한 개발사업은 오히려 손해를 보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B건설은 살아남았다. 완전경쟁 레드오션 시장에서 말이다.


(* 2010년 당시 초안에는 [이 글을 책으로 펴 낼 때까지 살아남아 있다면, 도급순위가 20위 안으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책이 잘 팔릴 텐데 말이다.] 라고 써 놨습니다. 2023년 저 대괄호 안에 표시한 말이 현실로 일어났습니다.

아 물론 뒷부분 ‘책 잘 팔린다’는 아직 모르겠지만, 최소한 B건설이 도급순위 20위 안으로 들어간 건 맞습니다. 망하라고 고사 지내는 사람들이 온 사방에 널렸는데 끝내 살아남아 더 잘 된 겁니다.)


블루오션에서 반짝하고 사라져 간 기업과, 레드오션 시장에서 끝없이 부도위기를 넘기며 계속 살아 있으면서 매달 적게나마 꼬박꼬박 월급을 주는 기업. 오너와 직원들 모두에게 있어 더 바람직한 기업은 어느 것일까?



이 글 쓸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어니스트 섀클턴’이라는 모험가 이야기를 알게 됐다. 영국의 스콧 / 노르웨이의 아문센 두 모험가가 ‘남극 정복’을 두고 다툴 때, 그들과 같은 시기에 모험가 생활을 했던 사람이라 카더라.


섀클턴은 영국의 유명 모험가 스콧 아래에서 탐험대원을 했었고, 이 때 당시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탐험 중간에 심한 병에 걸려 중도하차했으니, 대장인 스콧 입장에서는 좋은 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첫 탐험대원으로 도전한 임무는 중도하차. 그 다음에 남극기지 세우는 임무도 실패. 마지막으로 수행한 ‘최대의 임무’도 결과적으로는 실패.


섀클턴의 모험 인생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동시대 위대한 모험가로서 남극점에 노르웨이 깃발을 꽂았던 ‘아문센’이 `80년대 위인전에 실렸었고 영국 모험가 스콧 또한 아문센과의 경쟁 관계로 유명한 반면, 섀클턴은 ‘아는 사람만 아는 모험가’로 살짝 밀려나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섀클턴의 위대한 업적이 21세기 와서 다시 부각되고 있다고 한다. 그가 탔던 배 ‘인듀어런스(Endurance. ‘인내심’이다.)’의 이름이 21세기 영화 ‘인터스텔라’에 인용되고, 섀클턴의 위대한 리더쉽을 다루는 책이 인기를 끈다고 한다.


섀클턴의 위대한 업적. 그것은, [실패한 모험에서 600일 넘게 버티면서 부하들을 모두 다 살려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남극점에 노르웨이 깃발을 꽂은 아문센이 가장 유명하긴 하다. 영국 모험가들이 말 끌고 가고 / 모터로 움직이는 설상차 가져가는 캐삽질을 하는 동안, 추위에 강한 썰매개를 가져가고 그 개를 식량으로 바꾸는 전략(!)을 통해 가장 효율적으로 남극점 공략을 한 아문센이 가장 크게 승리하긴 했다.


그런데, 스콧과 섀클턴을 비교하면?


스콧도 위대한 모험가였다. 본인 스스로 솔선수범했고, 위기 앞에 당당했으며, 온갖 고통을 견뎌내며 미지의 땅으로 진격하는 남자였다.


다만, 얼어죽었을 뿐. 부하 대원들도 모두 다 함께 (저승길 동반자로 끌고가며) 얼어죽었을 뿐.



스콧은 본인 포함 탐험대원 전원 사망. 섀클턴은 부하들을 600일 넘게 버틸 수 있게 하고 본인은 남극의 높은 산을 넘어 구조대를 불러 와 끝내 전원 살려냈다.


발상의 전환을 해 큰 성공을 거둔 아문센이 가장 큰 명성을 얻은 것은 당연하지만, ‘그 다음’을 꼽는다면… 부하 전원을 살려낸 섀클턴에게 2등 자리를 주고 싶다. 홍진호(콩진호)가 2등 여러 번 해서 ‘콩라인’의 명성을 얻은 것처럼, 섀클턴에게도 그에 맞먹는 명성을 주고 싶다. 섀클턴에게도 그에 맞먹는 명성을 주고 싶다.



레드오션 시장의 블랙기업. 여기도 비슷하다. 아예 처음부터 탁월한 기술력이나 발상의 전환으로 ‘블루오션의 개척자’가 된 게 아니라면, 그 다음 2인자 자리는 ‘망하지 않고 살아남는 기업’에게 줘야 한다. 박봉에 주70시간 굴리더라도 일단 매달 월급 주는 회사가 2등 자리를 받아야 한다.


내가 다녔던 B건설. 그 곳은 2등 기업이었다. 시뻘건 핏물의 바다에서 온갖 악명을 감수하며 끝끝내 살아남는 2등. 매달 직원들에게 월급 주는 것만큼은 거르지 않는 2등.


지나고 나서 보니, 그 2등 기업이 더 나았다. 어디 어설프게 블루오션 장악하겠다고 설치다 쫄딱 망해서 직원들 모두 백수 만드는 기업보다 ‘직원 쥐어짜는 2등 기업’이 훨씬 더 나았다.


2등 기업 정신. 다음 챕터에서 계속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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