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닐 수 있는 블랙기업'의 조건
(첫 프롤로그에 언급했듯이, 본 'RPG 레드오션 투쟁기'는 주로 2010년 당시 35살에 중고신입으로 재취업하면서 나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썼던 글을 편집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경어체 생략하고 썼었죠.
물론, 편집 과정에서 일부 편은 2023년에 추가하고 있습니다. 추가되는 내용이 주(主)가 되면 이 때에는 경어체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자여. 칠흑같은 어둠보다 더 어두운 자여. 맹약에 따라 그대를 부르노니, 내게 힘을 주어 적들을 멸(滅)하게 하소서. 마법의~ 심!판!"
뜬금없이 애니메이션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2002~2004년, 서른 살이 가까운 나이에 강원도 북동쪽 끝자락에서 징집군인 RPG 놀이 하고 있을 때 봤던 애니메이션 '슬레이어즈'의 대사입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마법의 심판'이라는 말은 투니버스 버전이고, 원래 기술 이름은 '드래곤 슬레이브'라고 하네요.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자. 이 표현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군대 갔다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저 말이 생각나는 거 보면, 당시에 꽤 멋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자, 이 표현을 앞에 내세운 이유를 말해야겠죠?
지난 편에서, 저는 레드오션을 '시뻘건 핏물이 넘쳐흐르는 바다'라고 표현했었습니다. 경쟁자가 너무 많아 과포화 상태고 그 경쟁자 중 상당수가 죽어가거나 / 이미 죽어 있어 피를 철철 흘리는 바다. '넌 이미 죽어 있다(오마에와 모 신데이루)' 상태인 회사가 너무나 많은 바다. 그게 레드오션입니다.
2010년 초반의 대한민국의 건설업. 그 곳은 진정한 레드오션이었습니다. IMF를 거쳐 오며 이미 많이 망했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브랜드 아파트'로 잠시 살아나는 듯 하다가 다시 금융위기 크리티컬 터진 산업이었고, 수많은 건설회사들이 '이제 우린 끝났어. 가망이 없다'라고 Endgame을 외치던 시절이었습니다.
많은 건설회사들이 망했습니다. 건설회사 도급순위 100위 안에 드는 회사들 - 소위 '1군 건설사'들 - 이 픽픽 쓰러졌습니다. 대한민국 1호 건설사라는 삼환기업, IMF때 외국계 자본에 흡수되어 강제 개명(?)당한 울트라건설, 제가 신입사원 때 '삼성이 망하는 한은 있어도 동부건설은 안 망한다!'라는 뜬금포(!)를 들었던 동부건설. 그 외 숱하게 많은 건설사들. 그들이 회생신청을 하며 법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시뻘건 핏물의 바다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건설사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도급순위 5위 안에 드는 소위 'Big 5' 정도 되면 당연히 살아남겠죠. 당시 GS건설이 해외사업 손실 처리를 하면서 한 번에 -2조원 영업손실 크리티컬을 터뜨렸고 숱한 주주들이 그 치명적인 크리티컬에 맞아 피를 철철 흘렸지만, 아무튼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해외사업 손실을 국내 아파트 영업이익으로 메꾸면서 살아남긴 했습니다.
(해외 발주처 좋은 일 시키고 그 손실만큼 국내 아파트 값으로 땡겨먹은 형국. 헬조선 서민들의 돈으로 아랍 왕족들 주머니 채워 주는 상황. 뭐 그랬습니다.)
아무튼, 건설업 Big 5들은 잘 살아남았지만 나머지 건설사들은 휘청휘청했습니다. 당시 도급순위 20위 권 안에 들던 건설사들도 상당수 법정관리 다녀오면서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레드오션에 불어닥친 '금융위기의 태풍'을 견뎌내지 못하고 끝내 쓰러졌습니다.
기술력도 없고 규모도 작고 자금력도 없는 건설사들은 다 망할것 같았습니다. 눈 씻고 찾아봐도 '경쟁 우위'라고 할 만한 게 없는 중견 건설사들, 이들은 진짜로 '넌 끝났어. 가망이 없다.' 상황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기술력 없고 규모 작고 자금력도 없는 주제에 살아남는 건설사들이 있었습니다. 2010년 당시 중고신입으로서는 도대체 왜 살아남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살아남는 건설사들이 있었습니다.
2023년, 48살 법무담당자는 이 건설사들이 살아남는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극악의 레드오션에서 마지막까지 버텨내는 기업들의 노하우랄까, 뭐 그런 걸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 비밀은 바로... [쥐어짜기]였습니다.
쥐어짜기 신공. 뭐 듣고 보면 별 거 아닙니다. 소속 임직원 쥐어짜고 협력업체 쥐어짜면 됩니다. 월화수목금금금 야근 시키고 토요일 근무는 당연한 것이고 워라밸 따위 아웃오브안중이고 회사에 인생 몰빵하도록 몰아세우면서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면 됩니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어떻게든 0.1%라도 영업이익 만들어 내면 됩니다. 참 쉽죠?
물론,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하면 임직원과 협력업체들 불만이 폭증합니다. 개념은 '참 쉽죠?'지만 그걸 현실에서 실행하는 건 절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비밀이 더 있죠. [레드오션 시장에서 각 회사들이 힘들어지면,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모두 힘들어진다]는 사실.
금융위기 급 태풍이 몰아칠 때에는 '쥐어짜기 신공'을 펼쳐도 대부분의 산업 종사자들이 그걸 받아들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죠. 딴 회사로 이직하려 해도 다들 문 걸어 잠그고 쥐어짜기 신공 시전중이니까요. 갈 데가 없어서 그냥 남아 있어야 합니다.
[퇴직해서 백수가 되는 것보다는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면서 쥐꼬리 월급이라도 받는 게 낫다]. 이 문장이 성립하는 산업구조라면, 쥐어짜기 신공이 통합니다. 기술력 쥐뿔 없고 자금력 없고 매달매달 자금사정 간당간당해서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바로 부도날 것 같지만 간신히 간신히 영업이익 0.1%를 올리면서 계속 회사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구직 사이트에서는 '아무리 갈 곳이 없어도 이 회사는 가지 마라.'는 악플을 받지만, 그래도 회사 자체는 계속 살아 있습니다. 주위에서는 '넌 끝났어. 가망이 없다.'라고 외치지만 결국은 좀비처럼 살아남습니다. 한국적 의미의 Endgame이 아니라 원래 영미권의 단어 의미 그대로 [종반전]을 치르며 끝까지 경기장에 남아 있습니다.
좀비처럼 살아남는 기업. '좀비기업'이라고 직관적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구직자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린다'는 의미로 '블랙기업'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레드오션 시장에서 살아남은 블랙기업들.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자, 칠흑같은 어둠보다 더 어두운 자] 라는 칭호가 딱 어울리는 회사들.
2010년, 35살의 중고신입이 입사한 회사는 그런 회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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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오션 시장에서 살아남은 블랙기업'에 대해 좀 길게 썼는데요. 지나간 과거 일이다 보니 자체적으로 추억보정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자, 이제 좀 정비하고 본론 얘기해 보죠.
세상에는 소위 '블랙기업'이라고 부를 만한 회사들이 많습니다. 이 헬오브지옥 반도의 땅에도 많죠.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더 많은지/적은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상당히 많긴 합니다.
그리고, 이 불지옥반도에는 사람 숫자도 많습니다. 출산율 세계 최저를 경신하면서 인구 숫자를 줄여 나가고 있긴 합니다만 일단 지금 당장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여전히 사람 많아 보입니다. 회사 측이 '너 아니라도 일할 사람 널렸으니 당장 나가!'라고 아주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 만큼 사람 많은 것 같습니다.
칠흑같은 어둠보다 더 어두운 블랙기업들은 이 '사람 많은 상황'을 아주 잘 활용합니다. 빡세게 굴려도 갈 데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블랙기업을 다니게 되고, 그렇게 버티는 사람들은 블랙기업의 '경쟁력'이 됩니다.
물론, 아무리 어쩔 수 없다지만 그것도 결국 '수인한도'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갈 곳이 없어서 버티긴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일정 선을 넘으면 임직원들도 버티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다닐 수 있는 블랙기업의 한계선]을 고민해 봐야겠죠. 시뻘건 핏물의 레드오션에서 임직원 쥐어짜기 신공을 펼치면서도 계속 사람 충원할 수 있는 블랙기업, 그 하한선이 어디까지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블랙기업. 우선 그 유형을 분류해 봅시다.
1) 복지 따위 쥐뿔없고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간신히 먹고 살게 해 주는 블랙기업
2) 회사 임원 및 경영진들 상당수가 친인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친인척 아닌 직원들은 무한 혹사당하는 (가좆같은) 블랙기업
3) 임원 및 경영진들이 쌍욕을 하거나 / 성희롱을 일삼거나 / 폭행을 하거나 / 기타등등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는 블랙기업
4) 아예 월급도 잘 안나오는 블랙기업
5) 월급은 제때 주는 것 같은데 뭔가 불법적인 일에 종사하는 것 같은 블랙기업
대략 이 정도 특성을 보인다면, 우리들은 그 회사를 '블랙기업'이라 부릅니다.
뭐, 제가 다녀 본 회사 중에서 4)번 '월급 안 주는 블랙기업'이나 5)번 '불법이 주요 사업인 블랙기업'은 없었습니다. 저런 회사들은 TV뉴스에서만 봤죠.
(제 와이프는 4)번 유형 회사에 한 달 가량 다녀 봤고 결국 월급 떼였다고 합니다. 너무 억울해서 당시 사용하던 컴퓨터를 들고 나왔다고 하네요...)
4)번과 5)번에 해당하는 블랙기업은 도저히 다닐 수 없습니다. 월급을 안 주는데 어떻게 다닐 방법이 없죠. 월급 주더라도 회사 자체가 불법을 자행하고 있으면 다닐 수 없구요. 전과자 될 수는 없잖습니까.
3)번 블랙기업도 가급적이면 때려쳐야 합니다. 쌍욕, 성희롱, 폭행의 수준이 높으면 현장에서 갈아엎어야 하고, 애매하게 깐족깐족대는 쓰레기 직장상사가 있으면 준비 잘 해서 이직하고 이직 통보하는 순간 그 쓰레기 앞에서 썩소 날려 줘야 합니다.
(블랙기업 아니고 꽤 규모 있고 돈 있는 회사에서도, 가아끔 쌍욕 인격비하 발언 쏟아내는 쓰레기 직장상사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건 그 개인을 제대로 관리 못하는 인사시스템의 문제인 건데, 이런 경우에도 '준비 잘 해서 이직한 뒤 썩은미소 작렬'로 대응하면 됩니다.)
즉, 3) 4) 5)에 해당하는 유형의 블랙기업은 진짜로 '아무리 갈 데가 없어도 여기는 가지 마라.'입니다. 월급 안 주거나 불법적인 일 하는 회사는 당연히 피해야 하고, 회식 자리에서 직원들 엎드려뻗쳐 시키고 줄빠따 때리는 회사도 피해야 합니다. 당연한 얘기겠죠.
중요한 것은 1)번 '쥐꼬리월급 회사'와 2)번 '친인척 많은 회사'입니다. 이 회사들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월급을 쥐꼬리만큼 주고 복지혜택 따윈 전혀 없는데 아무튼 월급날 되면 '근로계약서에 따른 급여'는 입금해 주는 회사. 협력업체 쥐어짜고 직원들도 쥐어짜고 아주 그냥 마른수건 찢어질 정도로 쥐어짜지만 어쨌든 약속한 월급은 주는 회사. 자기가 받는 월급이 과연 최저임금을 넘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 계산기 두드려 봐야 할 만큼 적게 받지만 아무튼 그 계약된 월급만큼은 주는 회사.
그리고, 오너 일가의 친인척이 매우 많은 회사. 상대적으로 그 친인척들은 일을 많이 안 하는 것 같고 업무능력도 그리 뛰어난 것 같지 않지만 일단 쌍욕 인격비하발언은 안 하고 다른 직원들과 원만하게 일하고 있는 회사.
이러한 블랙기업이 있다면... 다닐 만 할까요?
물론, 더 좋은 회사가 있다면 이직해야 합니다. 월 10만원이라도 더 받을 수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옮겨야 하고, 친인척 비중 적고 합리적인 인사평가 제도가 확립된 회사로 갈 수 있다면 이 또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옮겨야 합니다.
하지만... 이직할 곳이 없다면? 경력 쥐뿔 없고 나이도 많고 뭔가 결정적인 한 방 없으면 다른 회사 지원해 봐야 광속으로 서류탈락할 뿐이라면?
그럼 다녀야죠. 일단 다녀야 합니다. 그러면서 '경력'을 쌓아야 합니다.
즉,
1) 쥐꼬리 월급 주지만 일단 월급날 되면 월급 주는 회사
2) 친인척이 많고 / 친인척 아닌 직원이 일 더 많이 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친인척들이 나름 정상인(!)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라 인격적인 모멸감 느낄 일은 없는 회사
라면, (당연히 블랙기업에 속하긴 하지만) 일단은 다닐 만 합니다. 여러 가지 불만이 많아도 그냥 당장은 다닐 만 합니다.
흐르는 피보다 더 붉은 레드오션에서, 칠흑보다 더 어두운 블랙기업 중에서, 그나마 하나 골라야 한다면.
쥐꼬리 월급은 챙겨 주고 인격적인 모멸감 느낄 일은 없는 회사를 골라서 다녀야 합니다. 거기서 경력 쌓아야 합니다.
2010년의 저는 그렇게 '다닐 수 있는 블랙기업'에 발을 들였습니다.
직급은 대리 받았지만 회사 전체적으로 직급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해 부장이 차고 넘치는 회사, 대리 연봉이 다른 회사 사원보다 낮은 수준이어서 근로시간 계산해 보면 최저임금 넘었는지 아닌지 의심이 드는 회사, 그러면서도 최소한 '월급날은 지키는 회사'. 그 회사에서 중고신입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제 인생 2막 RPG가 열렸습니다. '일단 다닐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춘 블랙기업'의 직원이 되어, 금융위기 이후 격하게 흔들리는 대한민국 건설업 레드오션으로 나아갔습니다.
옛날 생각 했더니 조금 감상적인 단어들을 쓰게 되었네요. 다음 편에서는 다시 2010년 초안을 편집해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