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정한 레드오션으로 가기 전, 잠시 개인적인 인생사
본격적인 레드오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내 인생 이야기를 하고 갈까 한다.
앞 편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한국식 나이 30살일 무렵인 2005년에 동부건설 신입사원이 되었었다. 고시공부 접고 남들보다 2년 가량 늦게 취직한 것이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 크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당시에는 건설업 신입 연봉이 꽤 높을 때였다. 1997년 IMF 이후로 완전 꼬라박았던 건설경기가 꽤 살아난 시점이었고, 브랜드아파트 붐이 불면서 래미안-자이-롯데캐슬-포스코더샵 등 콩글리쉬 브랜드가 온 사방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건설회사 직원 연봉도 올라갈 때였고.
그러면서 ‘해외건설’도 다시 활성화되고 있었다. `80년대 중동 건설러쉬의 달콤한 맛을 기억하고 있는 건설산업역군들이 남아 있었고, [근면한 한국인]이라는 신화(!)도 남아 있었다. 다시 해외 나가기만 하면 다 잘 될 것 같았다.
세상에서는 건설업을 ‘레드오션’으로 분류했지만. 산업 성숙 단계를 넘어 쇠퇴기로 접어드는 업종으로 분류했지만.
2005년 ~ 2007년 당시의 건설업은 나름 괜츈했다. `80~`90년대에 건설공사 실적을 잘 쌓아 안정적으로 관급공사 따낼 수 있는 건설회사들은 더더욱 괜츈했다. 다른 업종에 비해 연봉이 높았고, 신입사원 연봉은 더더욱 높았다. 꽤 괜찮았다.
지난 편에서 ‘삼성이 망하는 한이 있어도 동부건설이 망하는 일은 없어!’라고 호소(?)하신 차장님 얘기를 잠깐 했고 그 얘기 나오고 8년 만에 동부건설 법정관리 가 버렸다는 것도 언급했지만, 그건 동부건설이 건설산업 자체에서 문제 있어서 망한 건 아니었다. 반도체 투자에 발목잡혀서 허덕대다가 결국 무너졌던 것 뿐.
반도체 투자하기 전의 동부건설은 꽤 견실하고 좋은 회사였다. 나중에 법정관리 가면서 주인이 바뀌긴 했지만 그 이전에는 꽤 괜찮은 회사였다. 적어도 내가 신입사원으로 다니던 동안에는 괜찮은 회사였다.
관급공사로 도로공사 수주 2위, 교량/터널 등 대규모 토목공사 가능, 강남 대치동에 지은 ‘센트레빌 아파트’는 2005년 기준 고가아파트 순위로 전국 3위. 건설사 중에는 꽤 괜찮았다. 취직이 늦어 30살에 신입사원이 되는 사람이 갈 수 있는 회사 중 거의 최고 수준이었다.
다만… 내가 그걸 몰랐을 뿐. 아니, 알아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뿐.
2005년의 나.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부터 18년 전의 나.
20대 전체 기간 중 군대 다녀온 25개월 1주일을 제외하면 줄곧 고시촌에 살았던 나. 그렇게 살다가 ‘게임중독’이 되었던 나.
30살의 나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면서 개인적인 자존심만 세고 세상을 만만하게 보던 사람이었다. 인생이라는 길고 지루한 RPG게임을 매우 쉽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인생이라는 RPG. 나는 그 RPG를 쉽게 봤다. 게임에서 주사위 굴리듯 인생도 쉽게 굴러갈 거라 착각했었다.
그리고 그 착각은 32살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해졌다. 1년 9개월 가량 신입사원으로서 회사 일을 배우면서 ‘어지간한 변호사들 하는 일 정도는 나도 하겠는데?’라는 생각을 가졌고, 자격증만 있으면 더 많은 돈을 벌 거라는 생각이 점점 더 커져 갔다.
그리하여, 32살에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1년 9개월 가량 다닌 회사에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내 이름을 걸 수 있는 전문 개인사업자’가 되려 했다.
쉽게 말해서, 다시 고시생(고시낭인)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나는 ‘다시 공부하기만 하면 금방 사법시험 합격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넘치고 있었다. 이제 곧 법조시장이 무너져 변호사들이 피 철철 흘리는 시뻘건 레드오션으로 변할 거라는 걸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그저 내가 노력하기만 하면 잘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내 판단은 명백하게 틀렸다. 개인적으로도 틀렸었고, 시장분석 측면에서도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첫째, 개인적으로 내 학습능력은 현저히 떨어진 상태였다. 20대 때의 학습능력보다 낮아진 건 당연한 것이고, 20대 후반 ‘게임중독’ 시기를 거치면서 인내력 측면이 확 무너졌었다. 즉, 게임 안 하고 진득하게 자리에 눌러앉아 공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이게 더 중요한데, 법조시장은 이미 대량붕괴 직전 상황이었다.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은 들어 봤겠지만, `90년대 중반까지의 법조시장은 2020년대 의료업 시장보다 훨씬 더 높은 수익을 보장받는 시장이었다. 일단 자격증 자체를 많이 발급하지 않으니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래서 ‘정당한 법적 지위를 가진 변호사’는 1년차부터 억대연봉을 받을 수 있었다.
(2020년대에도 억대연봉이면 꽤 높은 편인데, 그게 `90년대 중반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이게 가능했던 건, 1년에 사법시험 합격자를 300명만 배출했기 때문이었다.
판사 90명, 검사 90명을 꼬박꼬박 배출하는데 전체 선발인원은 300명. 1년차부터 바로 변호사 나오는 사람들은 120명 이하였고, 부장판사/검사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은 ‘천룡인’이었다. 검사장 정도 찍고 개업한 사람들은 본인이 무슨 신적 존재인 양 거들먹거렸고, 주위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물론, 이런 상황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법조시장을 개혁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제일 첫 번째 시도가 ‘사법시험 정원을 늘리는 것’이었다. 공급절대부족 시장에서 공급을 늘림으로써 기존의 과점적 지위를 파괴하겠다는 의도였고, 이는 꽤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사법시험 합격자 1000명 시대가 도래했다. 판검사 선발인원을 조금 늘리긴 했지만 매년 700명 이상이 변호사로 쏟아져 나오게 되었고, 변호사들의 시장가격은 빠르게 내려갔다. 연수원 성적이 낮은 변호사들은 중소형 로펌에서 초임연봉 1억원이 무너졌다며 악악대기도 했다.
그러나, 초임연봉 1억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법조시장을 강타할 '진정 거대한 쓰나미'는 2007년에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바로 로.스.쿨!
한국식 로스쿨 제도의 폐단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할 얘기가 많긴 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패스. 2007년의 나는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불과 10년도 못 가 박살나게 될 법조시장에 ‘내 이름 건 자격증’을 내밀 수 있기를 원하며 다시 발을 담궜을 뿐.
결과는… 처참했다.
한 때 게임중독이었다가 다시 고시낭인으로 되돌아온 ‘나’. 32살부터 35살까지 3년 간의 시간을 신림동에 꼬라박은 ‘나’.
게임중독은 고쳐지지 않았다. 아니, 더 심해졌다. 1년9개월 직장생활 하면서 모은 돈이 있다 보니 더 오래, 더 많이, 더 자주 놀게 되었다.
그리고, 망가진 공부습관은 돌아오지 않았다. 습관이 없으면 ‘의지력’으로 극복해야 하는데 이미 30대 중반에 들어선 나에게 의지드립 따윈 먹히지 않았다.
결국 3년 시간을 고스란히 날려먹었다. 동부건설 신입사원 때 모은 돈을 다 쓰고 마이너스 인생으로 돌아섰을 때, 나는 35살이었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고시원 월세 12만원 낼 돈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레드오션이지만 ‘자격증 숫자 제한’이라는 가두리막으로 유지되던 법조시장. 조만간 엄청난 숫자의 경쟁자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핏물 흘러넘치는 극악의 레드오션이 될 법조시장.
거기에 한 발 담그지도 못하고 튕겨나와 버렸다. 당장 취직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까지 내몰려 버렸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망가져 가는 동안 이 대한민국도 크게 휘청거렸다. 2008년 말 금융위기, 그 무섭고 살벌한 파도가 또 한 번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대한민국의 많은 회사들이 무너지고 쓰러졌다. 2000년대 중반 잠깐 살아나는 듯 하던 건설업은 또 한 번 망가졌고, 해외진출했던 건설회사들은 몇천억~조 단위 손실로 휘청거렸다. 내가 떠나왔던 동부건설은 이미 법정관리를 향해 돌이킬 수 없이 밀려나고 있었다.
35살, 2010년. 사법시험 1차 불합격이 확정되고 나자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재취업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 때의 나는 뭘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블루오션 따위 우아하고 고상한 헛소리는 그냥 10선비 뜬구름 얘기일 뿐, 당장 나를 받아 준다는 곳만 있으면 무조건 면접보러 가야 했다.
다만… 면접 보러 오라는 곳이 없었다. 나름 건설업계 15위 안에 들며 ‘안정적으로 관급공사 가능한 좋은 건설회사’라던 동부건설, 거기서 1년9개월 근무한 걸로는 경력직 취급을 받기가 어려웠다. 신입으로 지원할 나이는 오래 전에 지나 버렸고.
초조했다. 아주 많이 초조했다. 이대로 재취업 안 되고 고시원 방세도 못 내게 될까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고시원 방문 손잡이에 넥타이 묶고 목에 건 뒤 드러누울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실행에 옮기진 않았지만, 그 때는 꽤 무섭기도 했었다.
그렇게 초조해 하고 있을 때. 한 군데에서 서류통과가 되었다. 지금은 강원도 춘천으로 옮겨 간 도로공사 전문업체. 나름 강소기업이었다.
어쩌면, 그 강소기업 갔을지도 모른다. 거기 입사했다가 춘천으로 본점 이동할 때 춘천 따라갔을지도 모르고, 거기서 그냥 하루하루 보내면서 기획인사총무법무 다 하는 중소기업 직원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게임중독으로 낮밤 바뀌어 있었던 게 뜻하지 않은 인연(?)이었는지, 면접 보러 가는 날 당일 새벽2시에 깨어나 버렸다. 면접은 오전10시였는데 아직 버스도 지하철도 다니지 않는 깜깜한 밤중에 일어나 버렸다.
게임중독자답게 PC방으로 갔다. 그리고… 진짜 무슨 운명이었던지, ‘그 회사’의 법무경력직 모집공고를 보게 되었다.
[아무리 갈 곳이 없어도 여기는 가지 마라.]는 평가를 받는 회사. 그 회사에서 낸 법무 모집공고. 경력 1년만 되어도 경력직으로 채용해 준다는 모집공고. 그걸 봤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35살의 나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블루오션 따위 골라먹는 건 불가능했고, 6시그마를 비롯한 각종 경영관리 기법이 도입된 체계적인 대기업 따위도 쳐다볼 수 없었다.
35살의 나. 3년 전에 잠시 경력 쌓긴 했지만 그 뒤 3년간의 공백으로 커리어 망가지고 어지간한 중견기업은 서류통과도 안 되는 나.
13년 전의 나는 그 ‘아무리 갈 곳이 없어도 여기는 가지 마라.’는 회사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바로 면접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 면접에서 바로 합격했고.
그리하여, 나는 ‘진정한 레드오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금융위기의 파도에 휩쓸리고 수많은 건설사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있는 레드오션, ‘건설시장’이라는 시뻘건 핏물의 바다로 돌아왔다.
모든 건설사들이 살아남기 위해 발악을 하고 모두가 악귀의 얼굴로 서로의 창자를 물어뜯어 하루라도 더 오래 버티려 하는 시장. IMF때 망하고 금융위기 때 또 망하고 그러면서도 한 푼이라도 벌어 보겠다고 극한경쟁을 펼치는 시장.
그 시장에 ‘법무담당자’로서 자리 하나를 얻어냈다. 일단 직급은 ‘대리’지만 다른 건설사 신입사원보다도 연봉이 적은 회사, 전반적으로 직급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해 회사 직원의 20%가 임원인 회사. 그런 회사에 ‘무늬만 대리’로 경력직 입사했다.
그렇게 내 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RPG, [시뻘건 핏물의 레드오션 서버]로 이직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블루오션? 그게 뭐임? 먹는거임?
블루오션 따위 까라 그래. 여긴 레드오션 중에서도 제일 밑바닥, 흐르는 피보다 더 붉고 칠흑같은 암흑보다 더 검은 곳. ‘블랙기업’이다.
레드오션의 블랙기업. 그 곳에서, ‘레드오션 투쟁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 삶 전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