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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Sep 24. 2023

RPG 레드오션 투쟁기 (2)

1. 인생 RPG의 시작 : 블루오션과 6시그마


본격적으로 레드오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내 최초 직장생활을 잠시 언급하고 가야겠다. 35살 때 중고신입으로 들어간 회사 말고 그 이전 ‘오리지널 신입사원’이었던 시절, 그 때 마음가짐과 당시 생각들을 가볍게 요약해 보자.


한국 나이로 30살이던 2005년, 나는 당시 재계 20대 기업의 신입사원으로 취직했었다. 2020년대 기준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지만 2005년에는 가능했다. 물론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법무직군’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지면 가능하긴 했다.


(* 잠시 참고로 덧붙이면, 로스쿨이 생기기 이전 대한민국 법률시장은 “변호사 제일주의”로 운영되었다. 판사 검사들은 ‘은퇴 후 연봉 10억’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초짜 변호사들도 억대연봉은 기본이었으며, 일반회사로 지원하면 초짜 변호사도 부장 급으로 채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사법시험 선발인원이 늘어나면서 조금씩 그 하한선이 내려오긴 했지만, 그래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그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당연한 말이지만) 변호사만으로 법률시장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사법시험을 통과 못한 소위 ‘고시낭인’들도 법률시장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고, 그 중 나름 ‘이름 들으면 알 만한 대학졸업장 + 사법시험 1차 합격 경험’을 가진 고시낭인들은 30대 초중반 정도까지는 취업할 수 있었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27살까지 군입대 미루고 사법시험 보다가 뒤늦게 군대 다녀와 29살에 사회로 방출(!)된 인간, IMF 이후 살벌하게 변해 버린 한국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나이만 먹은 인간. 그런 사람이었다.)



2005년 취직할 당시,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정말로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졸업했지만 학교 도서관은 갈 수 있으니) 학교 가는 길에 기업설명회 현수막 붙은 걸 봤고, 그 중에서 딱 그맘때쯤 취업공고 난 회사에 지원했을 뿐이었다.


특정 그룹을 가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특정 업종에서 일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대한민국 회사 어디나 다 똑같지 뭐.’라는 생각으로, 진짜 주사위 굴려서 나오는 대로 몇 칸 이동하겠다는 생각으로, 당시 재계 20대 그룹 소속 건설회사에 지원했고, 법무팀 신입채용에 합격했다.


(지금이니까 편하게 하는 얘기인데) 그 때 나는 RPG 게임에 빠져 있었다. 전세계를 강타한 불멸의 명작 온라인 RPG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그 중에서 호드(Horde) 트롤 주술사였다. 그 전에는 헬오브지옥 악마 디아블로에 맞서는 아마존이었고.


고시공부 하다가 주화입마(!)에 걸려 바둑/당구 등으로 빠져드는 고시낭인들이 꽤 많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게임’이 가장 강력했다. 옛날 어린이들이 호환 마마 전쟁등을 가장 무서워하는 것 이상으로 현대 고시생들에게 게임이 무서웠다.


그렇게 게임에 빠져 고시공부 따위 대충대충 하던 시절, 한국나이 30살이었던 나는 [인생도 어차피 롤플레잉 게임이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RPG에서 주사위 굴리듯 인생도 적절히 주사위 굴려서 거기 나오는 대로 따라가겠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아무튼 그리하여 ‘건설회사 법무 신입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2주 간의 직무교육을 받았다.



그룹공채 신입사원 직무교육. 이게 참 얼핏 들으면 다 좋은 말 같다. 그 강의만 들으면 다들 천재적이고 똘똘한 비즈니스맨이 되어 세계를 주름잡고 소속 회사를 애플 급 최강자로 키워낼 것 같다. ‘회사뽕’을 쩔도록 먹고 ‘창의력 넘치는 충성맨’이 될 것 같다.


뭐, 2005년이면 이미 신입사원들도 많이 똑똑해져 있을 때다. 2020년대의 신입들보다는 약간 떨어지지만 70~80년대에 직장생활 시작한 선배들보다는 훨씬 더 많은 걸 배운 사원들, 그들에게는 ‘회사뽕’이 잘 먹히지 않았다.


잘 먹히든 말든 간에 일단 직무교육은 계속되었고… 여러 강사들이 여러 얘기를 했다. 그리고, 당시 최신 경영기법으로 소개된 것이 (제목에 쓴) ‘블루오션’과 ‘6시그마’였다.



블루오션. 2005년에는 나름 신선한 개념이었을지 모르겠지만, 2023년 정도 되면 너무나 많이 들어 식상한 얘기긴 하다. 아무튼 2005년에는 나름 최신 경영기법인 것처럼 소개되었던 것 같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 지금까지 없던 물건을 만드는 것, 그렇게 해서 새롭게 시장을 만들고 거기에서 독과점을 통한 초과수익을 올리는 것. 많은 사람들은 블루오션이 진리인 듯 떠들었고, 그렇게 보였다.

블루오션 시장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것은 “삼성전자”였다. IT산업의 초창기였던 90년대 중반, 과감한 시설투자와 R&D투자로 16메가 D램의 상용화를 처음으로 이루어 내면서 반도체 산업을 선도해 온 회사. 그 회사의 한 해 수익은 어지간한 대기업의 매출액을 뛰어넘고 있고, 현재까지 그 여세는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블루오션 관련 직무교육과 함께 “6시그마”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았었다. 새로운 경영기법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핫(Hot)한 방법론. 공장제조품 공정상 불량률을 낮추기 위해 도입되었다는 통계활용기법이 경영 전반으로 확대된 형태의 이 방법론은, 도요타의 “렉서스”가 대박나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당시 블루오션 논의와 어우러져, 6시그마는 “신경영기법”으로 추앙받았다.


2010년 이 글을 처음 쓸 때에도 생각했던 건데, 6시그마와 블루오션은 서로 무관하다. 아니, 무관한 수준을 넘어 아예 정반대 개념이다.

6시그마는 ‘공정관리에서 불량률을 100만분의3 수준으로 줄이는 것처럼 일반 경영관리에서도 비교-대조-통계-개선확인 절차를 통해 비효율을 극단적으로 줄이자(쥐어짜자)’는 개념이고, 블루오션은 ‘경쟁 없는 영역에서 새로 시장 만들어 우리가 다 해먹자’는 개념이다.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를 거의 동시에 교육하는 것 자체가 앞뒤 안 맞는 짓이다.


그러나, 6시그마와 블루오션은 당시 신입과 경력 할 것 없이 모든 직장인들이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인 것처럼 인식되곤 했었다. 6시그마가 “통계를 바탕으로 한 통제형 관리체계”여서 레드오션 경영에 더 적합한 방법론인데도 불구하고, 6시그마와 블루오션을 하루에 다 강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6시그마를 알고 전파할 수 있다는 것, 6시그마를 강의할 수 있다는 것이 블루오션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레드오션에서도 착실히 돈을 벌 수 있는 신경영기법이라는 것은 늘 상품가치를 인정받는 것이고, 통계로 무장한 정밀한 방법론은 그 자체로 신선했으니까. 아니, ‘신선해 보였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앞뒤 안 맞는 것 같은 직무교육을 거의 연속으로 들었을 때. 같이 교육을 듣던 신입동기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성공한 사례만 모아 놓고 이게 성공한 경영기법이라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저 회사들이 성공한 방법이 다 다르고, 적용한 경영기법도 다 다른데. 그냥 잘된 것만 모아 놓고 칭찬하는 건 나도 하겠다. 약장수랑 다를 게 뭐야.”


그 동기 말대로였다. 직무교육 강사들이 하는 건 [성공한 사례를 모아 놓고 사후약방문 형식으로 짜맞추는 것] 뿐. 삼성전자가 성공했고 도요타가 성공했고 기타등등 회사들이 성공했는데 그 결과만 놓고 블루오션이니 / 디테일까지 신경쓰는 6시그마 경영기법이니 떠들어대는 것 뿐.


지나고 나서 보면, 그 직무교육 강사들도 결국 ‘직장인’일 뿐이었다. 한때 직장인이고 40대 중후반에 진급경쟁에서 밀려나니 늦깍이로 MBA 과정 밟았다가 기업 복귀 못하고 ‘지식장사 자영업’으로 변신한 변종 직장인일 뿐이었다.


그 직무교육 강사들이라고 해서 무슨 대단한 기업경영기법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이미 회사 차려서 성공했겠지만, 그런 게 없으니 그저 경제-경영 쪽 교수들이 대충 사후약방문으로 읊은 걸 주워듣고 외워서 다시 강의하는 것 뿐이었다.


물론, 그것 또한 그 강사들의 밥벌이 수단이고 본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긴 하다. 그 강의 자체로는 어떤 직접적인 부가가치 창출이 안 되겠지만 강의 듣는 직장인들에게 ‘회사뽕’을 불어넣는다는 정신적 효과는 있겠지. 아니면 말고.


아무튼, 2005년에 6시그마와 블루오션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당시 최신 경영기법들은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6시그마부터 보면,

6시그마의 주창자였던 도요타는, (2010년 경) 소위 말해서 “한방에 훅 가는” 분위기였다. 미국시장에서의 대규모 리콜사태, 생산직에 대한 지나친 통제와 저임금으로 인한 생산품질 저하, 후발주자인 현대와 기아에 의한 점유율 잠식, 미국의 견제… 나름 총체적 난국이고, 사면초가다. 통계기법으로 생산성 향상만을 앞세운 경영기법은 생산직 근로자들을 부품 취급하면서 직원들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결국 그것은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다만, 그 어려운 시기를 거쳐 2020년대의 도요타는 조금 살아났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 연구에 오랫동안 쏟아부은 노력이 빛을 보는 듯 같았다. 그 뒤 전기차 시대에서는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6시그마를 도입하기 위해 큰 돈을 들여 경영컨설팅을 받던 대기업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장 대표적으로, 내가 6시그마 교육을 받았고 그룹 전체적으로 6시그마 경영기법을 도입해 블랙벨트/마스터블랙벨트 등등 호칭을 부여했던 그룹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만 얘기하면, 도요타보다 훨씬 더 심하게 훅 갔다… 그룹이 공중분해되는 수준에 이르렀고, 내가 속해 있던 건설회사는 법정관리 거쳐서 주인 바뀌었다. 6시그마로 조낸 촘촘하게 관리한다고 했지만 ‘뻔히 보이는 다른 리스크’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 ‘신입사원 시절 재계20위권이었다가 훅 간 그룹’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한 번 얘기할 것 같다. 일단 6시그마 실패 사례로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그럼, 블루오션 공략은?

우리나라에서 블루오션 마켓팅의 선두주자였던 삼성전자는 지금도 잘 나간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잘 나가는 것은, 이제 블루오션 개척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활용한 독점적 지위 남용 및 ‘레드오션에서의 개싸움 작전’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2023년에는 휘청거리고 있는 것 같지만, 아마 이번 고비는 잘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삼성전자가 잘 나가던 시절. 그 대표적인 시점을 꼽으라면, 2010년 한해 최대 화두였던 “스마트폰” 시장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휴대가능한 인터넷”이라는 스마트폰. 2000년대 초반부터 예상가능했고 실현가능한 기술이었지만 그 상용화 시기를 서로 저울질하고 있었던 이 기술은, 최초 출현시기와 출현방법으로 보면 블루오션이었다(다만,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잠재적인 레드오션”이다). 그리고, 이 블루오션을 처음 열어젖힌 것은 애플이었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이 시장에서 순식간에 애플을 따라잡았다. 제품출시가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판권을 장악한 한국시장에서 통신사들과 제휴(내지 압박?)하여 대량의 물품을 쏟아내고, 전 세계에 광고를 깔아가면서, 블루오션을 선점한 애플을 엿먹였다.


스마트폰 시장에 있어서, 삼성전자의 경영방식은 결코 블루오션 공략법이 아니다. 이건 롯데가 제과업계에서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독점적 지위남용과 “카피캣 상품”으로 선행주자 따라잡기, 거기서 더해서 우리나라에서 횡행하는 “애국심 마케팅”이다.

(故 잡스 옹께서 2012년에 이걸 신랄하게 까긴 했었지. “올해는 카피캣의 해인가요?” 라는 도발적인 질문, 강렬했다.)


기존 판매루트의 장악, 수직적 제품공급과정에서 공급경로 전체를 지배하고 자기 물건을 우선취급하게 하는 방식, 품질보다는 광고량과 모호한 충성심에 의존하는 이미지 세뇌기법.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기는 한데, 사람들이 즐겨 얘기하는 “신시장 개척”은 아니다. 적어도 스마트폰 출현 이후 삼성이 경영한 방식은 블루오션이 아니었다. 처절하고 살벌하고 피튀기는 레드오션에서 특허권침해 따위 싹 다 감수할 각오로 뛰어든 ‘피의 전쟁’이었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원래 취지는 블루오션과 별 관계없는 6시그마 이야기까지 끌어들여 사례를 들이대는 이유는 뭘까?


결론부터 말하면, 블루오션 같은 건 몇십년에 한번 찾아오는 것, 거의 “운”일 뿐이고, 그 시기를 놓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며, 어설프게 블루오션에 따라 들어가는 것은 그 시장을 떠들썩하게 홍보하는 사람들에게 돈만 바치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상투잡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6시그마 자체는 경영기법의 하나로 블루오션과 별 관계없고 오히려 레드오션의 경영기법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 도요타의 성공과 맞물리고 6시그마를 이해하는 데에 통계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그 자체가 “블루오션”으로 위장되었었다. 뭔가 복잡하고, 그래서 뭔가 있어 보이니까 다들 열광했던 것 뿐, 사실 별 거 없었던 것이다.


결국 많은 자기계발서가 그러하듯이, 블루오션은 블루오션을 개척하라고 떠드는 사람들만 돈을 벌고 정작 블루오션에 뛰어든 사람들은 별 재미를 못보는 경우가 많다.


블루오션을 공략하기 위해 준비할 필요는 있지만, 어떤 전문적인 연구능력도 없이 무조건 블루오션 공략에 올인한다면 결국 그건 로또 맞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신시장이 어디까지 커질지, 그에 필요한 소요자금은 얼마일지, 어느 정도의 기술력과 인력이 필요한지 아는가? 당연히 모른다. 모르니까 “블루오션”인 것이다.


예측을 한다고 해도, 그 예측을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조직과 인원을 필요로 한다. 블루오션 공략은 밑을 알 수 없는 깊은 우물을 파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자금과 장비를 쏟아붓는 작업인 것이지, 어느 날 침대 머리맡에서 번쩍 하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로 되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위에 잠깐 쓴 것처럼, 스마트폰 출시와 같이 다 예상할 수 있는 건 이미 블루오션이 아니다. 전통적인 강자의 경영기법, 더 많은 자본을 가진 자들의 시장공략법으로 추월가능한 영역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

결국은 이 얘기를 써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블루오션 기법이 갖는 위험성(혹은, 블루오션 찬양자들이 주장하는 걸 맹목적으로 추종할 때의 위험성)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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