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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Sep 28. 2023

RPG 레드오션 투쟁기 (3)

2. 블루오션에 도전한다는 것 – 그 위험한 줄타기


1) 블루오션의 실패사례


나름 반도체 시장에서 ‘16메가 D램의 상용화’라는 작품으로 블루오션을 개척한 삼성전자. 그 화려한 성공을 뒤쫓아 블루오션에 도전한 다른 많은 기업들은 어떻게 됐을까? 반도체 시장이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하고 거기 투자한 기업들은 어떻게 됐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  “새됐다”.


앞서 얘기했듯이, 30살 당시의 나는 그 때 기준으로 재계20위권에 드는 그룹 소속 건설회사에 신입공채로 입사했었다. 그리고, 그 그룹이 딱 ‘반도체에 도전한 기업체’였다. 블루오션이라는 용어는 없을 때였지만 어쨌든 반도체 시장의 미래가치를 보고 초기에 투자하긴 했다.


(지나간 얘기니 그냥 그룹 이름 밝히는 게 낫겠다. 2005년 내가 신입공채로 입사한 곳은 ‘동부그룹’이었다. 당시 동부건설, 동부제강, 동부한농화학 등 굴뚝산업 회사에 더해 동부화재, 동부생명, 동부저축은행 등 금융회사도 거느리고 있었고, ‘동부반도체’에 조 단위 투자를 하는 중이었다.)


동부가 반도체에 도전한 시기는 98년인가 그랬다. IT산업의 초창기였다는 점, 그 때 당시로는 파격적인 몇 조 규모의 투자를 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블루오션 공략의 정석을 그대로 밟았다.

그런데, 어떻게 됐는가? 반도체 시장은 동부그룹의 초기 예상보다 훨씬 더 자본집약적인 산업이었다. 블루오션이기는 했으나, 엄청나게 많은 물을 자기가 직접 쏟아부어야만 하는 바다였다.


2005년 당시 신입사원이었던 내가 알기로 동부그룹이 시설투자 등으로 반도체에 쏟아부은 돈이 3조가 넘었다. 동부그룹 자산(부채 포함)이 10조 조금 넘었었는데 반도체에만 3조 꼬라박은 것이다.

그러나… 이걸로는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발끝에도 못따라가는 상황이었고, 비메모리 부문에서는 대만에 상대가 안됐다. 나름 재계 20위 안에 들고 매우 견실한 그룹이었으나, 그 그룹조차도 반도체 분야의 투자를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채권단의 자금회수 압박이 이어졌고, 결국 채권단의 담보제공 압력에 못이겨 동부반도체는 “동부한농화학”과 합병하게 되었다. 반도체와 비료/농약회사를 합병한 것이다. 무슨 시너지가 날까?

뭐 합병 당시에는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웠지만,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합병한 이유는 ‘농지를 담보로 잡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동부한농이 가지고 있던 광대한 농지(당시 동부한농화학은 종묘 연구한다고 농지소유를 할 수 있었다. 일반기업은 안된다.)가 담보로 잡혔다. 그리고 몇 년 후. 합병 때 내세웠던 논리가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걸 입증하듯, 화학/반도체 분야가 다시 분리되어 별도의 회사가 되었다.


동부한농이 가장 크게 희생했지만, 그 전까지 반도체에 출자했던 다른 계열사들의 자금압박도 심각했다. 97년 당시 도급순위 7위였던 동부건설은 2009년에 18위까지 추락했고, 2013년에는 결국 법정관리 들어가 주인이 바뀌었다. 동부제강 또한 비슷한 길을 걸었고.


여담으로, 내가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동부건설에 첫 출근을 했던 날 경력 20년 가까이 되신 차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삼성이 망하는 일은 있어도 동부건설은 안 망해!”

개뿔. 그 말 들은 지 8년 만에 망했다. 그것도 하필 “온 세상이 주목하는 블루오션 시장 반.도.체.”에 돈 꼬라박다가 홀라당 망해 버렸다.


여담 하나 덧붙이면, 그 와중에 ‘동부그룹 금융계열사’는 다 살아남았다. 왜냐고? 금산분리 원칙 때문에 금융계열사는 반도체에 투자 안 했으니까. 금산분리가 필요한 이유를 그룹 전체로 보여 준… 건가?


아무튼, 내 사회생활 첫 직장은 ‘블루오션 공략의 실패 사례’를 아주 그냥 교과서적으로 보여 줬다. 그것 외에도 오너의 성추문 등등이 있었지만 그건 굳이 지금 언급할 필요 없을 것이다(추후 기업문화 등에서 다시 언급할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나는 첫 직장에서부터 블루오션 공략 실패 사례를 봤다. 그래도 하나만 예를 들면 좀 섭섭하니 몇 개 더 살펴보자.


김치냉장고. 지금은 대부분 하나씩 있는 가전필수품인데, 이것을 처음 개발한 곳은 어느 중소기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회사 이름을 아는 사람도 드물고, 중소기업이 만들었다는 것도 잘 모른다. 이들이 홍보비용을 조달하기도 전에, 대기업들이 유사상품을 만들어 대량으로 풀어버린 것이다. 김치냉장고 자체는 블루오션이었으나, 시장을 찾아내자마자 초기수익을 다 빼앗기고 망해버린 형태다.


슬픈 예를 하나만 더 들자. 초창기 네비게이션 사업이다.

나처럼 길눈이 어두운 사람들에게 네비게이션은 나름 하나의 축복이었다. 북쪽 의정부부터 남쪽 부산까지, 생전 처음 가보는 길을 무사히 갈 수 있게 하는 인공위성 연계 시스템. 대단한 발명품이었다. 충분히 “블루오션 개척자”라고 불러 줄 만한 상품이었고, 관련업계의 매출과 순이익은 수직상승했으며, 2011년 정도에는 네비게이션 판매 대리점이 꽤 많이 생겼었다. 나는 차가 없어서 네비게이션을 사진 않았지만, 차 사면 필히 사려고 했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블루오션 시장에 큰 빵꾸가 났다. 네비게이션 시장과 아무 관계없는 곳에서 “종결자”가 뜬 것이다. 바로 스-마-트-폰!


차에 고정식으로 부착해야만 되던 네비게이션 대신, 걸어가면서도 바로 행선지를 확인하고 방향을 알려 주는 스마트폰이 나왔다. 내가 살던 집 앞에 있던 네비게이션 대리점은, 밤에 조명 켜놓아서 나가는 전기세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되버렸다. 잡스 아저씨의 천재성이 한국땅의 네비게이션 생산업체와 대리점 사장님들을 한방에 훅 보내 버린 것이다

(이것도 나비효과라고 해야 되나? 아니면 드래곤의 날개짓 효과?).


자금규모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블루오션에 뛰어든 사람들의 예는 지나치게 많아서 일일이 다 쓸 수도 없다. 수없이 사라져 간 벤처기업 창업주의 상당수는 이제 전과자다. 90년대 중후반 기준으로는 뛰어난 컴퓨터 활용능력과 프로그램 제작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자기 기술 하나만 믿고 뛰어들었다가 경제사범으로 별을 달았다.


블루오션을 개척한 첫 상품으로는 대성공을 거뒀으나, 그 이후 ‘새로운 블루오션 상품’에 도전했다가 결국 기존 판매루트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예로는 “광동제약”이 있을 것이다.


우황청심원으로 몇십년간 착실히 체력을 키운 광동제약은, 비타500 한 방으로 음료제조업계에 태풍을 일으켰다. 약국에서만 팔던 동아제약 “박카스”의 경쟁상품이면서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제품이고, 콜라 같은 청량감을 주면서도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인식을 주는 제품이었다. 내가 신입사원 교육을 받을 때 블루오션 개척의 대표적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었다.


덧붙이면, (신입사원 교육 때 강사 분이 주장했던 것과 달리) 광동의 히트작 비타500도 블루오션을 개척한 첫 상품은 아니다. 95~98년경, 비타500과 비슷한 컨셉을 가지고 나온 상품들이 이미 있었다. 자판기나 슈퍼에서 흔히 살 수 있으면서, 청량감과 맛은 박카스와 비슷한 제품들이 있었던 것이다.


몇 개 있었는데, 그 중 이름이 생각나는 건 “컨피던스”밖에 없다(요즘도 나오긴 하더라). 박카스 4배쯤 되게 생긴 큰 용기에 박카스에 물 탄 것 같은 맛의 음료를 넣어 팔던 제품이고, 광고도 좀 했었다. 비타500과 컨피던스의 제품 컨셉은 거의 유사했고, 음료 맛도 비슷했다. 즉, 블루오션 개척 상품은 사실 컨피던스가 먼저였다.


비타500은 당시 “최신 인기스타를 내세운 마켓팅”, 즉 전형적인 시장 공략법을 통해 신시장의 점유율을 빨리 올린 것이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블루오션 개척자는 아니었다. 2005년 신입사원 교육 때에는 ‘블루오션 최신 사례’로 소개되었지만, 이미 관련 시장이 조금씩 형성되고 있던 시기에 ‘제대로 된 홍보전략’으로 성공한 사례에 가깝다.


아무튼 비타500이 블루오션 성공 사례 맞다 치고.

그런데, 그 이후 광동이 걸어간 길은 처음만큼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광동은 비타500의 승리를 발판으로 삼아 “매일 먹는 음료이면서 건강을 고려해서 마시는 음료”라는 컨셉으로 신시장을 만들어 내려 했고, 그게 ‘옥수수수염차’와 ‘헛개차’였다.

이것이 제대로 안착되었다면, 블루오션 신봉자들은 광동을 신으로 모셨을지도 모른다. ‘역시 블루오션 이론이 맞았어!’라고 외치면서 더더욱 강하게 그 주장을 이어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꿈꾼 신시장은 콜라/사이다/아이스크림이 장악한 레드오션의 판매루트를 통해서만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옥수수수염차가 편의점에 들어오기 무섭게, 무슨 17차니 뭔차니 하는게 곧바로 따라 들어왔다. 음료시장은 기존의 거대한 레드오션이 새로 생겨난 작은 푸른 호수들을 다 흡수해 버리는 시장이었고, 레드오션을 장악한 것은 독과점 질서의 상위에 위치한 대기업(대표적인 유통망 장악 기업 롯데!)들이었다. 즉, 롯데를 비롯한 기존 음료시장의 강자들이 가진 유통망, 그리고 그 유통망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미투 상품들을 통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슈퍼마켓에 공급된 냉장시설과 거기 공급되는 주요 상품들이 다 대기업 것인데, 그들과 거래를 끊고서 냉장시설에다 비타500과 옥수수수염차만 가득 채울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슈퍼마켓 주인이라고 해도 광동제품 말고 다른 회사의 유사상품을 들여 놓을 것이다. 광동의 비교우위는 곧 희석되었다.



2) 블루오션을 언제까지 지켜낼 수 있나?


블루오션이 그 자체로 고립될 수 있다면, 영원히 초기독점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곧 망할 것이다. 아니 뭐 망할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생각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 특허 같은 지적재산권으로 블루오션을 지키는 것도 한계가 있고, 돈만 된다면 불법복제상품 만들어 팔겠다는 사람이 세상에 널렸다. 남들이 들어오지 않는 시장에서 혼자서만 엄청난 순이익률을 보이고 있다면, 누구든 간에 그걸 뺏어먹겠다고 덤비지 않겠는가?


그리고, 오늘의 신상품은 어제까지 그것 없이도 세계 60억(이 글 초안 쓸 때 60억. 2023년에는 80억)이 잘살던 상품이었다. 스마트폰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PC로 인터넷 하면서 잘 살았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인터넷 안하고 자면 그만이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집에서 통화하면서 잘 살았다. 약속은 미리 잡았고, 필요하면 메모를 미리 남기는 등의 방법으로 만날 수 있었다. 컴퓨터 전에도, 나름 합리적인 문서관리 시스템을 만들어 업무처리를 해 왔으며 아주 잘 살았다.

블루오션 상품 자체가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상품이 아니고, 단지 부가적인 편리함을 줄 뿐인 것이다. 그게 필수적인 것으로 굳어질 때쯤이면, 이미 그 시장에는 너무 많은 경쟁자들이 들어와 블루오션이 아니라 새로운 레드오션이 된다.


또한, 신참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신상품으로 초과이익을 누리는 상황을 기존의 강자들이 넋놓고 지켜보지 않는다. 그들은 판매망을 장악하고 있고, 막강한 자금력과 인적∙물적 조직이 있으며, 오랫동안 중소기업을 쥐어짠 노하우가 있다. 블루오션을 개척한 다음날부터 공룡들과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블루오션 신봉자들은, 그것이 “인간생활”이라는 초 거대 레드오션 위에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작은 소용돌이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려주지 않는다. 블루오션에 붉은 물이 들어오고 초기 독점수익이 잠식되는 것은 일순간이다.

독점수익을 유지하기 위해서 침수방지막을 만들 수는 있지만, 방지막 유지비용도 만만찮다. 삼성전자가 시설투자에 몇십조씩 쏟아붓듯이 말이다. 그리고, 방지막 유지단계가 되면 이건 이미 블루오션이 아니라 독과점 시장 유지 경영기법이 된다.



거기에 더해, (위 반도체 사례에서 나왔듯이) 블루오션은 시장개척비가 많이 든다.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업종이 아니라면, 블루오션 개척은 막대한 기술개발비를 요구한다. 게다가, 그 기술개발비로 무조건 블루오션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 블루오션을 열었다 해도, 기존 제품을 판매하던 기업들은 축적된 자본에다 기존 금융거래망을 활용해서 조달한 자금을 더해 엄청난 기술투자와 시설투자를 하고, 단번에 기술을 습득해서 따라온다.


그리고, 블루오션의 신제품이라는 게 거의 대부분 “완전히 하늘에서 떨어진 신시장”이 아니라 기존 제품을 “업그레이드”하는 수준에 그친다. 지금 세상을 사는 사람들 중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구매력을 가진 실질 소비자들로 제한해서, “현재까지 세상에 한번도 출시되지 않았는데 그게 없어서 죽을 만큼 답답한 상품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네”라고 대답할 만한 품목이 있을까?

뭐 한 알만 먹으면 모든 질병에 면역되는 약이라던지, 수명을 200년으로 늘려 주는 약, 유명 연예인과 똑같이 생긴 노예 사이보그 같은 게 나온다면 모를까, 그런 게 아니라면 대부분 “없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제까지 별다른 불편 없이 다들 잘 살고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한번도 듣도보도 못한 상품이 없어서 갑갑하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블루오션 상품 자체가 우리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닌 이상, 결국 판매량에 한계가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주 간단하게 깎아내리면, 블루오션 전략이라는 것은 이런 넌센스 위에서 출발한다. 어느날 누군가가 지금까지 없었던 상품을 만들어 내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서 엄청난 초과수익을 올린다는 게 말은 참 쉽고 좋지만… 그런데 그런게 있긴 한가? 있다 해도, 그걸 찾아내려고 밤낮없이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쥐어짜면 그걸 찾을 수 있는 건가?



결국 대다수 블루오션 상품은, 기존 판매제품을 변경해서 새로운 판매루트를 찾아내거나 업그레이드된 신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삐삐에서 시티폰으로, 핸드폰으로,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발전해 가듯이 말이다.


즉, 틈새시장을 개척하거나 혹은 기존시장에서 신기술을 적용한 신상품을 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진짜 획기적인 상품을 만들어 내서 기존 시장과 차별화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역으로 얘기하면, 대다수 블루오션 상품은 기존 제품에서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던 업체의 직∙간접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기술개발비를 감당할 수 있는 규모와 자금력, 신상품을 적극적으로 팔아치울 수 있는 안정된 판매루트, 신시장에 신규사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할 수 있는 더 큰 규모와 자금력… 이것이 없는 자들, 아이디어만으로 블루오션을 열어젖힌 용감한 돌고래는 레드오션의 메갈로돈 상어들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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