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건설회사 다니셨거나 관련 업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잘 아실 텐데, 8월 말이 되면 국토부에서 ‘건설회사 도급순위’라는 걸 발표합니다. 토목건축 / 토목 / 건축 / 산업설비(플랜트) / 조경 등 5개 종합공사에 대해 지난 3년 간의 공사실적 및 경영상황 등을 종합하여 순위를 매기는 겁니다. 건설 관련 신기술 등도 약간 가점이 있는 것 같네요.
물론, 이것 말고도 다양한 순위가 있습니다. 아파트공화국 컨셉에 맞게 ‘아파트 브랜드 선호도’를 조사하여 발표하기도 하고,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사업 수주 순위도 나옵니다. 아파트 외에 상가/오피스텔 같은 ‘집합건물’에서 순위 매기기도 하고, 국가-지자체 등 관급공사 영역의 수주 실적만 따로 집계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게 있긴 하지만, ‘건설회사 도급순위’가 가장 포괄적이고 잘 알려져 있는 순위표인 건 확실합니다. 도급순위에서 상위권이면 아파트 브랜드 선호도 또한 높게 나오고, 정비사업 수주시에도 무척 유리합니다.
이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인데, 2000년대 이후 건설사 도급순위 상위권은 소위 ‘Big5’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삼성물산, 현대건설, GS건설, 대우건설, 대림산업(현재 DL). 이들 빅5가 탑 메이저 급입니다.
최근에는 ‘포스코건설’도 6위권 유지하며 ‘이제부터 Big6다!’라는 얘기가 자주 나오긴 합니다. 롯데건설도 나름 7~8위 권이고, 과거 7위였던 SK건설(현 SK에코플랜트)은 사업부 분리 등을 거치면서 조금 내려왔죠. 현대건설과 같은 뿌리를 가진 현대엔지니어링도 10위권 안에 들구요.
뭐, 제가 저 정도 급 건설사에 다녀 본 적은 없습니다. ‘프로이직러’라 자부(!)할 만큼 이직경력을 쌓았는데, 이걸 반대로 얘기하면 안정적인 회사에 오래 다니지 않았다는 소리죠. 한 급 아래 건설사를 여러 군데 떠돌았습니다.
2000년대에는 10위~20위권 건설사들도 나름 안정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중 한화건설, KCC건설 등은 지금도 잘 나가고 있죠.
나머지는 꽤 많이 바뀌었습니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거의 듣보르자브 취급을 받거나 아예 없었던 회사들이 은근 많이 보이죠.
30~100위까지는 더 변동이 심합니다. 건설업 특성상 1건의 매출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공사 몇 개만 하면 도급순위가 수직상승하죠. 반대로 수직하락하는 경우도 많구요.
아무튼, 대략 100위까지는 소위 ‘1군 건설사’로 인정해 줍니다. 아래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요즘은 1군 건설사의 가치가 별 거 없는데요. 예전에는 ‘1군 건설사에 들어간다’는 게 나름 대단한 일이었지만… 뭐 세상은 변하는 거죠.
개략적인 설명을 하긴 했는데, 원래 제목에 쓴 대로 이번 챕터는 ‘건설회사 도급순위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 정리하려는 게 목적입니다. 본론으로 가야겠죠.
(1) 과거 도급순위의 가치
(2) 건설 트렌드의 변화 : 속삭이던 너의 아파트
(3) M&A에서 대박치던 시절 : 웅진그룹과 극동건설
(4) 현재 도급순위의 의미 : 경제적 가치는 거의 없으나 홍보효과는 있음
정도로 정리하겠습니다.
2. 본론
(1) 과거 도급순위의 가치
소제목에 ‘과거’라고 썼지만 그렇게 옛날은 아닙니다. 멀리 잡아도 1980년대, 가까이 잡으면 2010년대까지 다 포괄합니다. ‘건설회사 도급순위 자체가 경제적 가치를 갖던 때’가 그리 먼 옛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한국 건설업이 나름 전세계 상대로 껌 좀 씹던 시절이었습니다. 중동 고층건물과 산업시설 상당수가 한국인의 피와 땀으로 지어지던 시절이었죠. 건설업 종사자들이 ‘산업역군’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이 시절, 건설회사 도급순위는 ‘정말로 공사 많이 해 봤고 그만큼 경험과 노하우가 축적되었다’라는 의미였을 겁니다. 대한민국 건설사 도급순위 1~3위면 세계 어디서나 통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 때 1위는 (의외로) 삼성물산이나 현대건설이 아니었습니다. 2010년대까지 1위 하던 현대건설, 2020년대에 탄탄한 그룹 물량에 아파트 브랜드를 기반으로 1위에 올라선 삼성물산 모두 1980년대에는 1위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96년까지도 아니었던 것 같네요.
그 시절 1위 건설사는 ‘신동아건설’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최고층 빌딩이 아니지만) 지어질 당시에는 최고층 건물로 대한민국 경제성장을 보여 주는 상징물 같았던 존재 63빌딩. 이걸 신동아건설이 지었습니다. 당시 신동아건설의 주식은 요즘 우리가 삼성전자 주식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는 카더라 전설도 들었습니다.
뭐 다들 짐작하시겠죠. 1997년 IMF. 그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갔을 때, 신동아건설을 비롯한 수많은 건설사들이 줄줄이 무너졌습니다. 현대건설도 법정관리 갔다가 나왔죠. 대우건설은 2번 갔다왔고, 새 주인을 찾을 때까지 엄청 오래 걸렸습니다.
그렇게 IMF를 거쳤지만, 대한민국 건설업은 여전히 해외로 나갔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2010년대 초반까지 계속 해외공사를 하려고 했었어요. 그러다 2008년 금융위기 터지면서 크게 휘청거렸고 GS건설은 2조 단위 손실을 한 방에 대손처리했으며 20위권 건설사들은 줄줄이 무너졌지만…
건설사들이 해외사업으로 여러 번 위기를 맞긴 했지만, 건설사 도급순위 자체는 상당히 강력한 영업 무기였습니다. 이 도급순위가 ‘수주능력’에 영향을 미쳤거든요.
전에 아파트 하자분쟁 부분에서 언급했었는데, 2000년대 초반까지의 건설업에서 아파트는 천대받는 공사였습니다. 기술력 갖춘 정통 건설사들은 ‘관급공사’를 했었죠. 도로, 항만, 터널, 교량 등 사회간접자본 공사를 하거나 관공서 짓는 게 ‘잘 나가는 건설사’의 일감이었습니다.
이러한 관급공사를 따내려면 ‘실적’이 중요한데, 그 관급공사 실적이 고스란히 도급순위로 넘어왔습니다. 즉, [도급순위 = 관급공사 능력] 도식이 성립했습니다.
그리고, 민간 영역에서 공사발주가 나올 때에도 ‘도급순위 가점 / 자격제한’이 붙을 때가 많았습니다. 고오급 빌딩 짓는데 30위 미만 잡 건설사에게 공사 맡길 수 없다, 뭐 이런 컨셉이었죠.
관급공사 잘 해서 도급순위 높아지면 그 실적이 입찰사전평가(PQ)에 영향을 미치면서 향후 수주능력이 좋아지고, 민간공사에서도 도급순위를 반영하면서 수주능력에 직결되는 상황. 이 시절의 도급순위는 중요했습니다. 건설사 입장에서는 적자 보면서라도 실적매출 늘려서 도급순위 올리고 싶어했었고, 실제 그렇게 하는 건설사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조금씩 바뀝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천대받던) ‘아파트’가 뜨기 시작했거든요.
(2) 건설 트렌드의 변화 : 속삭이던 너의 아파트
(안 봤지만)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7080 추억의 노래 ‘아파트’가 나온다고 합니다. 본 글 쓰는 저 또한 그 노래 알죠. 국딩 때 유행했었습니다.
저 노래가 처음 떴을 때 아파트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뭐… 아파트공화국 여러 번 얘기 할 필요는 없겠죠. 아파트는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온 우주의 진리가 대한민국을 도와 휘몰아치다가 아파트로 형상화되는 느낌이에요.
2000년대 초반 ‘브랜드 아파트’가 뜨면서 바야흐로 아파트 전쟁의 시대가 열립니다. 기존에 아파트공사 무시하던 대형건설사들도 (해외에서 거하게 말아먹은 후에) 아파트에 ‘몰빵’합니다. 기존 듣보르자브 건설사들도 아파트 택지분양 잘 받으면 1건에 천억원 넘게 남깁니다.
그리고, 아파트 실적도 ‘민간공사 실적’으로 도급순위에 반영됩니다.
전에 하자분쟁 편에서 언급했듯이, 대한민국은 아파트 건설현장에 현장소장 할 수 있는 경력자만 5만 명 이상 되는 나라입니다. 기술력 딱히 필요없어요. 그냥 정해진 대로 똑같이 지으면 됩니다. 초고가 프리미엄 급 아닌 다음에야 다 거기서 거깁니다.
아파트 실적으로 도급순위가 요동치면서, [관급공사실적 = 도급순위] 공식이 완전히 깨집니다. 사회간접자본 구축이 어느 정도 완료되면서 관급공사는 줄어들었고, 기술력 별로 필요없는 아파트 공사가 ‘대세’로 자리잡았습니다. 도급순위는 아파트 분양 순위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그렇긴 한데… 여전히 ‘건설사 도급순위’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있긴 했습니다. 그게 M&A에 반영된 적도 많았구요. 금호산업이 대우건설 인수할 때 (다시 토해내긴 했지만) 대우건설의 도급순위를 꽤 높게 평가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크게 부각된 사례는 역시 ‘웅진그룹과 극동건설’이겠죠. 항을 바꾸어 서술하겠습니다.
(3) M&A에서 대박치던 시절 : 웅진그룹과 극동건설
웅진그룹.
창업주가 브리태니커 대백과 사전 영업사원으로 신입생활 시작했을 때, 연탄장수 아저씨를 찾아가 “아저씨 아들도 연탄장수 시키시겠습니까? 아니면 공부시켜서 판검사 만드시겠습니까? 공부시키려면 이 책 사세요!”라는 (잡스아재 명대사 급) 드립을 시전하고 당시 몇백만원 하는 대백과전집을 팔아치웠다는 전설의 레전드를 자랑하는(!) 그룹사.
(그러고 몇십 년 지나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몇만원짜리 CD로 나왔고 지금은 인터넷 검색만 하면 되는 수준으로 바뀌었다는 건 뭐… 연탄장수 아저씨가 그 몇백만원에 대출금 보태서 집 샀으면 지금쯤 대박났을 건데요. 연탄장수 아저씨 지못미 ㅠ.ㅠ)
웅진그룹은 잘 성장했습니다. 교육산업 중심으로 탄탄하게 성장했고, 식음료 쪽에도 진출하면서 ‘재벌’로 안착하는 듯 했습니다.
극동건설 인수하기 전까지는요.
웅진그룹은 대략 2008년 ~ 2010년대 초반 쯤에 극동건설을 인수했습니다. 당시 인수금액이 1조 넘었다고 하네요. 7조에 대우건설을 인수한 금호산업 급은 아니었지만 나름 대형 M&A였습니다.
그런데… 금융위기가 왔습니다. 그리고, 극동건설은 관급공사가 아니라 주로 ‘아파트 실적’을 쌓아 도급순위를 높인 회사였습니다. 도급순위가 수주능력으로 이어지는 회사가 아니었다는 거죠.
연탄장수 아저씨에게 대영제국 백과사전을 팔아치울 정도로 영업력 좋았던 웅진그룹은 극동건설 먹은 후 급격히 휘청거립니다. 인수자금 마련하느라 빌린 대출금 상환하면서 계열사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결국 그룹이 분해되는 사태를 맞습니다.
한 분야에서 탁월한 성공을 거둔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분야에서도 다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자기가 모르는 분야에 발 담그면 거기서는 초보 수준으로 다시 시작해야 해요. 기존 성공사례가 정신적 자산이 될 수는 있겠지만 새로운 업계 상식은 밑바닥에서 다시 배워야 합니다.
‘건설사 도급순위’가 이미 의미 없고 아파트 짓는 건설사들은 별다른 기술력도 없으며 그나마 현장소장 급 직원들이 퇴사하고 나면 그 별 거 없는 기술력까지 싹 소멸한다는 것. 이걸 웅진그룹 경영진에게 알려 준 사람은 없었나 봅니다. 책으로 사람 때려죽일 수 있는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이 얇은 CD 한 장으로 바뀌고 결국에는 인터넷 가상공간에 다 녹아들 거라는 걸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던 것처럼요.
(4) 현재 도급순위의 의미 : 경제적 가치는 거의 없으나 홍보효과는 있음
웅진그룹이 극동건설 먹었다가 무너진 이후, 건설회사 M&A는 매우 냉정해졌습니다. 도급순위를 보고 가격 올려 부르는 매수자는 없어졌고, 매도인 측도 도급순위를 내세워 무형자산을 비싸게 인정받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즉, 도급순위 자체의 경제적 가치는 거의 없습니다. 아파트 짓는 데에 도급순위는 의미 없고, 또 아파트로 올린 도급순위는 그저 숫자놀음에 불과하다는 걸 업계 사람들이 다 알고 있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급순위 집계는 계속됩니다. 네모반듯한 아파트 많이 지은 걸로 실적 올리고, 그걸로 도급순위 상승시키고, ‘우리 회사는 이렇게 빨리 성장하고 있습니다!’라고 자랑하는 게 매년 반복되고 있습니다.
뭐, 저도 매년 도급순위 찾아보긴 합니다. 더 이상 ‘기술력과 공사능력의 상징’은 아니고 단지 아파트 많이 지었다는 의미로 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찾아보긴 합니다. 적어도 아파트 많이 지어서 돈 많이 번 회사가 어딘지는 알 수 있으니까요.
제가 다녔던 건설회사 중 몇몇은 이 도급순위를 많이 올렸습니다. 떠난 사람 입장에서는 별 상관없지만, 그래도 제가 있던 회사가 잘 되면 좋죠. “~회사 출신이다!”라는 게 저 자신의 홍보에 도움이 되니까요^^.
건설회사 도급순위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봤습니다. 다음엔 무슨 주제로 글 쓸까 생각 중인데… 떠오르는 대로 써야죠.
오늘 글은 이만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