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레드오션에서 벌어지는 “쩐의 전쟁” – 글쓴이 이야기 (3)
(앞 편에 이어)
7) 레드오션에서 살아남는 기업의 오너(Owner)
40억 손해본 걸 120억으로 뻥튀기 청구했다가 중재 깨질 상황 만들어 버린 얼치기 대리. 어느 주말, 그의 2G 폰에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회장님 전화’.
당연히 회장님 번호가 저장되어 있던 건 아니었지만, 번호 뒷자리가 회사 사내번호 첫 줄에 있는 번호와 동일해서 알아봤습니다. 당연히 저 120억 뻥튀기 사건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구요.
그냥 담담하게 받았습니다. 이미 이전 며칠 동안 120억 뻥튀기 건으로 여기저기서 야단맞았기 때문에, 한 번 더 야단맞는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건 없었으니까요.
1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기억나는 대화. 대화 중심으로 옮겨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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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금액 부풀렸노? 40억이 맞는데 금액 부풀린 이유가 있나?”
“그냥 욕심 한 번 내 봤습니다.”
“욕심냈다고? 그래 그건 됐고. LH에서 저리 난리치는데 지금이라도 금액 줄일 수 있나?”
“네. 금액 줄이는 건 언제든 가능합니다. 월요일에 서류 내면 됩니다.”
“그럼 금액 줄이면 되지 않나?”
“금액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그렇게 하면 저희 20억밖에 못 받습니다.”
“20억만 받아도 성공 아이가? 원래 그렇게 보고했더만.”
“그건 맞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중재는 어차피 반]입니다. 줄여서 40억 청구하면 20억 나올 겁니다. 저희 손해본 40억 메꾸려면 일단 금액을 올려야 합니다. 120억 유지해야 그나마 40억 노려 볼 수 있습니다.”
“그래? 근데 40억이 맞다면서. 120억은 부풀린 거 아이가?”
“부풀린 건 맞는데, 아예 근거 없는 건 아닙니다. 계약서만 놓고 보면 저희 주장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저희 주장대로 해석할 가능성이 조금은 있습니다.”
“… 니 말대로 120억 주장할 근거가 있긴 있단 말이제?”
“네. 근거는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습니다.”
(곧바로 단호한 답변) “그래 알았다. 내가 LH사장 만나서 담판 지을 테니까 그 다음엔 니가 논리주장 해라. 밀어붙여 보자.”
- 통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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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저 통화 당시 저는 사회생활 경력 3년이 안 되는 얼치기였습니다. 직급은 대리였지만 그건 B건설이 워낙 저임금 구조여서 그걸 메꾸려고 직급을 올려 주다 보니 직급인플레이션이 일어나 그랬던 것 뿐이고, 딴 회사에서는 사원~주임 급이었습니다.
저 대화 중에 강조표시 한 [중재는 어차피 반] 이라는 말. 이것도 뭔가 경험해 보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여기저기 주워들은 카더라 이야기를 옮긴 것 뿐, 정말로 절반까지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었습니다.
딱 잘라 말해, 제 말은 신뢰도 0%였습니다. 경력, 경험, 협상력, 상대방이 초대형 공룡 LH인 점 등을 고려할 때, 천방지축으로 뻘짓하고 대형사고 친 얼치기 대리 말 믿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B건설의 창업주 오너 회장님은 제 말을 믿어 주셨습니다. 제 말대로 밀어붙였습니다.
12년이 지나서 생각해 봐도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저런 초짜 얼치기 말을 믿고 LH라는 공룡과 싸울 생각을 했을까, 공룡 상대로 금액 3배 뻥튀기를 밀어붙일 수 있었을까.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그 때 B건설도 저만큼이나 절박하고 간절한 상황이어서 그랬던 건지도 모릅니다. 금융위기 여파가 본격적으로 밀려와 수많은 건설사들이 줄도산하던 시절, 상대가 공룡 공기업이든 뭐든 ‘벼랑 끝 전술’로 다 물어뜯어 버리겠다는 근성이 발동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혹은, (나중에 B건설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냥 욕심 한 번 내 봤습니다.”라는 얼치기 대리의 말이 나름 진실되게 느껴져서 그랬던 건지도 모릅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B건설의 창업주 오너 분이 직접 움직이셨습니다. LH 사장과 개인적으로 면담하셨고, 당시 B건설이 LH현장 몇 개를 더 맡고 있었으니 “중재 거부하면 우리 법정관리 신청할 거고 그러면서 모든 현장 다 멈춰 버리겠다!”는 협박(?)도 시전하셨을 것 같습니다.
LH 입장에서는 ‘어차피 중재는 동의하기로 했고, 120억 뻥튀기가 근거 없는 것이라면 결국 중재 과정에서 40억 기준으로 협의될 거다’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즉, 중재 받아 줘도 별 차이는 없고 / 괜히 B건설이 땡깡 부려서 현장 여러 개 공사중단되면 그게 더 골치아플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벼랑 끝 전술. 통했습니다. LH는 중재에 동의했고, 120억 신청금액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얼치기 대리가 터무니없는 욕심으로 계약서 문구만 보고 120억으로 부풀린 중재사건. 그 사건이, 양 당사자의 중재합의 하에 심리 개시하였습니다.
8) 중재사건 경과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시작된 120억 중재. 저는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직장인이 자기 업무에 몰입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준으로 몰입했고, 중재사건의 논리와 그 근거를 강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체상금 감액 청구의 논리구조는 간단합니다. “손해배상예정이 제반 사정에 비춰 볼 때 너무 과다하니 법원(중재판정부)에서 적당히 감액해 달라.” 이게 전부입니다.
제반 사정 중 가장 큰 게 ‘이대로 지체상금 다 공제당하면 시공사 망한다.’겠죠. ‘살! 려주세요’ 전략입니다. 이건 쉽습니다.
다음 전략은 상대방 입장에서 조금 껄끄러운데, ‘너도 잘못했잖아.’ 전략입니다. 손해배상 법리에서 주요하게 작용하는 [과실상계] 전략인데요. 지체상금 발생하는 과정에서 발주처 측의 선행행위 및 관리감독 소홀이 크게 작용했다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LH는 대한민국 최대 공기업이고, 방대한 자료와 인적 물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공룡’입니다.
그런데, 그 공룡은 덩치 큰 만큼 둔중합니다. 업무 프로세스가 너무 체계적이다 보니 그 프로세스를 다 따르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대표적으로, LH의 내부지침을 들 수 있습니다.
LH 내부지침은 2011년 기준으로 1만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내부지침 다 알아봤더니 정년퇴직하더라… 라는 카더라 썰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 LH 내부지침 중 ‘유사부도 처리지침’이라는 게 있습니다. 시공사가 본격적으로 부도 나서 망하면 (법정관리 포함) 당연히 부도처리지침으로 가는데, 그게 아니라 부도 징후가 있을 때부터 ‘유사부도 상황’으로 간주해 미리미리 대응하자는 취지입니다.
저 유사부도 처리지침에 의하면, 원래 예정된 공정률보다 -5% 이상 떨어지는 경우 LH가 선제적으로 해지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즉, 확정적으로 망해서 공사중단하기 전에 미리 해지하고 타 업체 선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침대로 됐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계속 말씀드린 대로 ‘앞 건설사가 6개월 공사지체하면서 80억원의 지체상금을 발생’시켰는데, 이 6개월 기간 동안 LH는 유사부도 처리지침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가 많았죠. 지침은 현장 상황 모르는 본사 지원부서 사람들이 뇌피셜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현실에서 바로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LH공사 자체가 건설사 말라죽는 지름길로 인식되어 제대로 된 건설사들은 그 공사 안 하려고 하는데, 덜컥 해지 날리고 딴 건설사 찾는다? 현장을 모르는 소립니다. 지침대로 안 됩니다. 실행불가능입니다.
다만… 이걸 물고 늘어지는 쪽에서는 아주 좋죠. [대한민국 최대 공기업으로서 민간기업 순위로 따지면 재계 5위 안에 드는 준 국가기관이 자기들 내부 지침도 제대로 못 지켜서 공사지체 상황 방치해 놓고 모든 책임을 후속 시공사 측에 전가하고 있다. 이게 과연 타당한가? 대한민국 이것밖에 안 되나? 이게 나라냐!] 라는 주장 할 수 있습니다.
물고 늘어졌습니다. 벼랑 끝에서 하루하루 버텨 온 레드오션 블랙기업의 모든 의지를 담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LH측 변호사가 빡쳐서 버럭 소리지를 만큼 집요하게 물어뜯었습니다.
물론, 논리적인 주장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외부적으로 유리한 요소가 2가지 더 있었습니다.
첫째, 중재위원이 모두 B건설 지명 위원이었습니다. LH측이 중재 거부 생각하면서 중재위원 지명을 안 해 버린 덕분에, 우리 쪽이 지명한 3명이 고스란히 중재재판부로 선임된 거죠.
둘째, 중재위원장은 법조인이 아니라 ‘건설회사 임원’이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을 수 밖에 없죠. 중재사건 기일 외에 따로 만날 기회도 있구요.
(이 영역은 제가 직접 한 게 아니라 잘 모릅니다. B건설의 윗분들이 해결하셨겠죠.)
법리적으로는 ‘LH의 관리소홀이 더 크다구욧 빼애애액!’ 시전. 기일 끝나면 중재위원장과 ‘사건 무관하게’ 따로 면담. 가아끔 LH 현장담당자도 면담.
그렇게 3개월이 지나갔습니다. 2011년 12월, 마침내 120억 (뻥튀기) 중재사건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9) 중재 판정 결과
40억 지체상금 공제당한 시공사가 (건설공제조합을 앞세워) 120억을 청구한 중재사건. 앞 건설사 지체상금 80억까지 모두 합쳐 청구한 중재사건. 그 결과는?
원금 57억 지급. 이자 포함하면 총 63억 지급.
해냈습니다. ‘중재는 어차피 반’이라던 얼치기 대리의 말대로, 절반 조금 넘는 금액을 받아냈습니다. 물론 변호사보수 줘야 하니 실제 통장에 남는 돈은 60억 정도였지만, 아무튼 뻥튀기한 청구액 절반 조금 넘게 인정받았습니다.
뭐, 돈이 건설공제조합 통장으로 들어가 버려서 그거 다시 받아오는 데에 또 며칠 걸리긴 했습니다만, 그 정도는 절차적인 문제일 뿐이었죠. 2011년 12월 말, B건설 통장에 63억 입금 찍혔고, 그 중 일부는 변호사보수로 나갔습니다.
여담이긴 한데, 2011년 B건설의 당기순이익이 +10억이었습니다. 매출이 1조 가까이 되는데 이익은 10억. 이익률 0.1%였습니다.
저 60억 없었으면 -50억 적자났을 겁니다. 장부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나중에 들은 카더라 소문에 의하면, 2012년 1월 급여지급이 중단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줄곧 저임금이긴 했지만 그래도 창사 이래 단 한 번도 임금체불 없던 회사였는데 처음으로 임금체불 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다 메꿔졌습니다. -50억 적자가 +10억 흑자로 바뀌었고, 직원들 월급 잘 나왔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특진 시켜 줄 만 하죠?
물론 제가 다 한 건 아닙니다. 저는 무모하게 뻥튀기하면서 사고쳤을 뿐, 뒷수습은 회장님이 하셨습니다. 중재과정에서 중재위원장 설득하신 건 부사장님이셨구요. 저는 그저 사고친 당사자로서 논리 근거 만드는 데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렇긴 한데, 특진시켜 주면 감사히 받아야죠.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땡큐베리감사 그랜절 하면서 받아야 합니다.
이리하여, 제 이력서에 들어가는 첫 문장의 절반이 완성되었습니다. [건설과 방송이라는 완전히 다른 두 영역에서 각각 2년 조기진급을 하였습니다.]라는 문장, 그 중 ‘건설 2년 조기진급’을 해냈습니다. 입사 1년 8개월 만에 대리에서 과장으로 진급했습니다.
‘뛸 듯이 기뻐한다’는 말 그대로였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12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봐도 흐뭇하네요.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된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다른 레드오션’을 찾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에필로그]로 넘겨야겠네요.